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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야 고맙다, 울 아버지 외롭지 않게 해서 "아·부·지."하늘을 향해 아버지를 불러본다.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간다. 산수유 먼저 노란 봄을 알리더니 질세라 붉은 진달래꽃 대궐을 이뤘다. "너희 덕분에 울 아버지 외롭지 않으리. 너희가 나보다 낫다." 나이 오십 되고 보니 눈시울이 젖을 때가 잦다.아버지는 강화에서 오래도록 관광회사에 다니셨다. 국내외 관광 안내를 나가시다가 나중에는 배차 업무를 주로 하셨다. 지리부도보다 더 정확하게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꿰뚫고 계셨다. 그 관광회사 기사님들은 관광객 모시고 멀리 나섰다가 길을 잃으면 무조건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금방 어디 어디로 가라고 알려주시곤 했다.아버지가 잠드신 충렬사 뒷산은 이제 여린 초록이다. 새순 올라온 잔디가 대견하다. 일흔 겨우 넘기시고 하늘로 가신 지 1년여. 그.. 더보기
고3 담임의 넋두리 퇴근길, 목욕탕에 들러 땀을 빼냈다. 때도 밀었다. 그래도 영 개운하지 않았다. 울적한 날이면 잠시 들렀다 가던 초지진에 내렸다. 벤치에 앉아 초지대교 야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찰랑대는 바닷물 소리가 이제는 춥다. 전쟁, 그래 전쟁이었다. 약 한 달간 계속된 4년제 대학 수시 1차 원수접수가 끝났다. 오늘 마지막 남은 한 아이의 자기소개서 입력을 도와주는 것으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 오래도록 해오던 일을 끝내고 나면 시원섭섭하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런데 나는 시원하지도 섭섭하지도 않다. 그냥 맥이 빠지고 허탈하다. 몇 아이나 건질 수 있을까? 대한민국 고3 담임들의 공통된 심사가 아닐까 싶다. 우리 반 아이들 대부분이 적게는 한 대학, 많게는 여섯 개 대학에 원서를 썼다. 다해서 백 수십 통이다... 더보기
“떡 한 조각 더 가져와라” 좋은 사람들과 저녁밥 먹는 자리, 한 사람이 딸 자랑을 한다. 딸 없는 나는 말도 없다. 그저 부럽다. 머릿속에 뚝뚝한 아들놈을 떠올린다. 누가 그런다. “아들들은 문자해도 ‘응응’ 그런다데.” 누가 말을 받는다. “응응도 다행이지, 우리 애는 ‘ㅇㅇ’이야.” 나는 속으로 말한다. ‘우리 애는 답도 없어요.’ 딸!, 그래, 나도 딸 같은 녀석들이 있었다. 교직에서 물러나기 전, 우리 반 여학생들을 딸로 여겼다. 붙임성 있는 아이들은 정말 딸처럼 굴었다. 한 아이가 떠오른다. 십여 년 됐으려나. 그때 나는 고3 담임이었다. 성희가 교무실에 자주 놀러 왔다.어느 날 성희가 홍삼즙 몇 봉지를 들고 와서 먹으란다. 이게 웬 거냐고 물었더니, 이 녀석 왈, “집에서 훔쳐 왔어요.” 어이없다. “야 인마, 엄마 아.. 더보기
학교여 안녕히 오전이면 끝낼 줄 알았다. 아니었다. 오후 늦도록 이것저것 버리기에 열중했다. 서랍장 정리에 책상 정리, 근 30년 세월이 쌓인 흔적을 지우려니 그게 쉽지 않았다. 당시에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모아두었던 것들이 이제 보니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짐 정리가 자꾸만 지체된 것은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나오는 아이들의 쪽지와 편지 때문이었다. 2014년 것도 있고 2000년 것도 보인다. 하나하나 다시 읽어보게 된다. 텅 빈 교무실에 홀로 앉아 가물가물한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다 보니 어느덧 해가 기운다. 아이들은 민망하게도 나에게 고맙다고 썼다. 편지의 마지막은 대개가 “사랑합니다.” 사랑한다는 소리를 평생 듣고 살았으니 난 행복한 교사였다. 이 행복을 포기하고 학교를 떠나는 이유는 건강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서.. 더보기
강화도조약, 그게 아니다 ① 강화 진무영 열무당 지난밤, 인터넷을 검색하다 강화도조약과 관련한 사진 ①을 보았다. ‘수호 조약 체결을 강요하는 일본군[강화부 연무당]. 1876년 촬영.(ⓒ국립중앙박물관)’이란 설명이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대백과사전)에 실린 사진과 글이다. 하지만 사진 속 배경은 연무당이 아니라 열무당이다. 대백과사전에서 밝힌 출처를 따라 국립중앙박물관 사이트로 들어가 봤다. 역시나 같은 사진에 같은 설명이 있었다. 열무당을 연무당으로 표기한 것은 단순 실수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사소해 보이는 오류의 부정적인 영향력이 너무 크다.연무당(鍊武堂)과 열무당(閱武堂)은 강화를 지키던 군영인 진무영의 부속건물이다. 연무당은 군인들이 훈련(訓鍊)하는 공간이고, 열무당은 지휘관이 사열(査閱)하고 지휘하는 공.. 더보기
연미정 연가 풍광 빼어나고 역사적 의미도 남다른 강화도 연미정. 그 가치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군부대가 자리하고 오래도록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묶여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언제라도 가볼 수 있다. 거기 서서 바다를 바라볼 때만큼은 시련도 잊는다. 한강이 바다와 만나 두 길로 나뉘는 물길이 제비 꼬리를 닮았다 하여 연미정(燕尾亭)이 되었다. 역사가 길다. 고려 대몽항쟁기 강화 도읍 시절에 고종이 여기에 와서, 공부하던 학생들을 격려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말이다. 조선시대엔 어떠했나. 후금의 침략으로 조정이 강화로 피해온다. 정묘호란(1627)이다. 그때 인조가 연미정에서 군사 훈련을 지켜보기도 했다.  연미정은 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이 화친 조약을 맺은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아닌 것 같.. 더보기
《연산 광해 강화》, 연산군과 광해군을 말하다 연산군과 광해군, 굳이 덜어내지 않고 더하지도 않고 그이들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강화도와의 인연도 돌아본다. 다음은 《연산 광해 강화》의 서문이다.  들어가는 글 연산군, 광해군.100년의 시차를 두고 태어난 두 사람.한 사람은 조선의 열 번째 임금, 한 사람은 열다섯 번째 임금.27명 조선의 군주 가운데 ‘반정’으로 폐위된 비운의 주인공.이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 강화에 유배되었다는 것. 성공한 사람보다 실패한 사람에게서 배울 점이 더 많은 법.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살아낼 교훈을 얻는다는 것.하지만, 교훈을 목적으로 역사를 읽는다는 건 좀 권태로운 일.그냥 읽으며 산 숲에서 밤알 줍듯, 알아가는 재미도 소중하다.독후, 딱이 교훈 같은 게 남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고. 읽다가 문뜩 멈추고저 사람, 흉.. 더보기
강화에 왔던 조선 임금 이야기 조선의 임금은 모두 27명인데, 이들 가운데 우리 강화에 왔던 임금은 누구누구일까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제가 확인해 본 이는 일단 태종, 연산군, 광해군, 인조, 효종, 영조, 철종 정도입니다. 인조 빼고 나머지 임금들은 즉위하기 전에 왔거나 폐위되고 나서 강화 땅을 밟았습니다. 태종(이방원)이 임금 되기 전 어느 해엔가 강화에 왔습니다. 《세종실록》에, 임금들이 해마다 봄·가을에 대언(승지)을 마리산 참성단에 보내 초제를 올리게 했는데, 이방원도 대언 신분으로 왔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나 귀양 왔습니다. 연산군은 교동에 갇힌 지 불과 2개월 만에, 마누라가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묘를 그대로 교동에 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