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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조약, 그게 아니다 ① 강화 진무영 열무당 지난밤, 인터넷을 검색하다 강화도조약과 관련한 사진 ①을 보았다. ‘수호 조약 체결을 강요하는 일본군[강화부 연무당]. 1876년 촬영.(ⓒ국립중앙박물관)’이란 설명이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대백과사전)에 실린 사진과 글이다. 하지만 사진 속 배경은 연무당이 아니라 열무당이다. 대백과사전에서 밝힌 출처를 따라 국립중앙박물관 사이트로 들어가 봤다. 역시나 같은 사진에 같은 설명이 있었다. 열무당을 연무당으로 표기한 것은 단순 실수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사소해 보이는 오류의 부정적인 영향력이 너무 크다.연무당(鍊武堂)과 열무당(閱武堂)은 강화를 지키던 군영인 진무영의 부속건물이다. 연무당은 군인들이 훈련(訓鍊)하는 공간이고, 열무당은 지휘관이 사열(査閱)하고 지휘하는 공.. 더보기
연미정 연가 풍광 빼어나고 역사적 의미도 남다른 강화도 연미정. 그 가치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군부대가 자리하고 오래도록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묶여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언제라도 가볼 수 있다. 거기 서서 바다를 바라볼 때만큼은 시련도 잊는다. 한강이 바다와 만나 두 길로 나뉘는 물길이 제비 꼬리를 닮았다 하여 연미정(燕尾亭)이 되었다. 역사가 길다. 고려 대몽항쟁기 강화 도읍 시절에 고종이 여기에 와서, 공부하던 학생들을 격려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말이다. 조선시대엔 어떠했나. 후금의 침략으로 조정이 강화로 피해온다. 정묘호란(1627)이다. 그때 인조가 연미정에서 군사 훈련을 지켜보기도 했다.  연미정은 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이 화친 조약을 맺은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아닌 것 같.. 더보기
《연산 광해 강화》, 연산군과 광해군을 말하다 연산군과 광해군, 굳이 덜어내지 않고 더하지도 않고 그이들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강화도와의 인연도 돌아본다. 다음은 《연산 광해 강화》의 서문이다.  들어가는 글 연산군, 광해군.100년의 시차를 두고 태어난 두 사람.한 사람은 조선의 열 번째 임금, 한 사람은 열다섯 번째 임금.27명 조선의 군주 가운데 ‘반정’으로 폐위된 비운의 주인공.이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 강화에 유배되었다는 것. 성공한 사람보다 실패한 사람에게서 배울 점이 더 많은 법.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살아낼 교훈을 얻는다는 것.하지만, 교훈을 목적으로 역사를 읽는다는 건 좀 권태로운 일.그냥 읽으며 산 숲에서 밤알 줍듯, 알아가는 재미도 소중하다.독후, 딱이 교훈 같은 게 남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고. 읽다가 문뜩 멈추고저 사람, 흉.. 더보기
강화에 왔던 조선 임금 이야기 조선의 임금은 모두 27명인데, 이들 가운데 우리 강화에 왔던 임금은 누구누구일까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제가 확인해 본 이는 일단 태종, 연산군, 광해군, 인조, 효종, 영조, 철종 정도입니다. 인조 빼고 나머지 임금들은 즉위하기 전에 왔거나 폐위되고 나서 강화 땅을 밟았습니다. 태종(이방원)이 임금 되기 전 어느 해엔가 강화에 왔습니다. 《세종실록》에, 임금들이 해마다 봄·가을에 대언(승지)을 마리산 참성단에 보내 초제를 올리게 했는데, 이방원도 대언 신분으로 왔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나 귀양 왔습니다. 연산군은 교동에 갇힌 지 불과 2개월 만에, 마누라가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묘를 그대로 교동에 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