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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박신, 갑곶나루, 염하 강화해협, 염하 강화읍 월곳리 연미정쯤에서 길상면 초지리 황산도 어름까지, 김포와 마주한 좁은 바다를 강화해협이라고 합니다. 염하라고도 하고요. 김포로 보면 월곶면 보구곶리에서 대곶면 약암리까지입니다. 길이가 17㎞ 정도, 폭은 넓은 곳이라야 1㎞ 남짓, 좁은 곳은 300m 정도입니다. 한강보다도 좁습니다. 그래서 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육지 사이 좁고 긴 바다를 해협(海峽)이라고 하기에 강화해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상어로는 강화해협보다 염하라는 호칭을 더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사랑에 빠진 남자 강원도 강릉에 경포호가 있습니다. 거기 있는 경포대라는 누각이 유명하죠. 경포대 근처 길가에 아기자기한 동상이 여럿 서 있어요. 박신(朴信, 1362~1444)의 사랑 이야기를 몇 장면.. 더보기
'강화돈대의 날' 제정을 위한 토론회 안내 더보기
[스크랩] 진관사 태극기 최초의 태극기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조인식에서 역관 이응준이 사용한 것이다. 조선은 국기 제정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도안을 미루던 차였다. 1882년 5월 14일 미국 공사 로버트 슈펠트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에 사용할 국기를 지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통리기무아문 김홍집이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를 그리게 해 최초로 사용했다. 이전까지는 박영효의 태극기가 최초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2004년 이응준 태극기가 미국에서 처음 발견되면서 최초로 인정받았다.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태극기 사용이 금지됐다. 이때부터 태극기는 독립운동의 상징이 됐다. ‘진관사 태극기’도 1919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장기 위에 먹으로 태극과 4괘를 덧칠해 태극기로 만든 유일하고 가장 오.. 더보기
강화역사신문, 〈강화역사심문〉 제4호 발간 강화의 역사를 소개하는 계간 신문 〈강화역사심(沁)문〉 제4호(2025.6)가 나왔다. 이번 호에는 신미양요 기록 사진과 해설, 강화 참성단 천재궁 터, 《속수증보강도지》, 황사영 백서, 강화도조약의 과정, 의병장 이능권, 보창학교, 족실방죽(쪽실방죽) 이야기, 화남 고재형의 한시-월곶동(《심도기행》)이 실렸다.배부처는 강화읍 청운서림, 강화읍 디자인센터산, 선원면 프란츠(쓰) 카페 등이고, 발행처는 강화역사문화연구소이다.발행인 김형우 소장, 편집인 전동광 연구위원. 더보기
강화 참성단 천재궁 터 고려 때도, 조선 들어서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하늘 제사를 올렸습니다. 임금이 고위 관료 중에서 제사 책임자를 선정해 강화로 보냅니다. 참성단 제사의 책임자를 보통 행향사(行香使)라고 불렀어요. 행향사로 강화에 왔던 인물 가운데 이방원도 있습니다. 물론 조선 태종으로 즉위하기 전, 고려 조정에서 벼슬할 때였습니다. 행향사가 와서 묵으며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할 장소가 필요합니다. 제사 음식 준비도 해야 하고요. 그곳이 바로 마니산 북쪽 기슭, 화도면 문산리에 있던 재실, 천재궁입니다. 지금은 터만 남았으나, 옛날에는 제관들의 숙소와 제기 보관소를 비롯해 여러 건물이 있었을 겁니다. 목은 이색(1328~1396)이 지은 시에 따르면 앙산정(仰山亭)이라는 정자도 있었습니다. 천재궁 가는 길 들머리에 금표도.. 더보기
북일곶돈대 강화도가 서해안에 있다 보니, 일몰 광경 볼만한 데가 여럿입니다. 유명한 곳이 고려산 적석사 낙조봉이고 또 화도면 장화리입니다. 찾는 이들이 많아지자, 적석사에서 낙조대를 설치했고, 강화군은 ‘장화리일몰조망지’를 조성했습니다. 북일곶돈대는 장화리일몰조망지에서 2㎞ 정도 숲길을 걸어야 만날 수 있습니다. 주차 공간도 좁아서 승용차 너덧 대 겨우 대는 정도입니다. 불편합니다. 그래도 불편함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입니다. 장곶보 소속입니다. 북일곶(北一串)에 들어선 돈대라 북일곶돈대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위치가 강화도 남서쪽 해안인데 어떻게 북(北)자가 들어갔을까. ‘北’의 본디 의미는 ‘등지다’, ‘배후’, ‘뒤’였다고 해요. 마을 사람들이,.. 더보기
광성보 광성돈대 안내판 철거 광성돈대 앞 하얀 안내판 참 오래됐다. 남루해 보였다. 내용에 오류가 많아서 거시기 했다. 특히, 조선군의 주력 화포였던 불랑기를 프랑스군이 쓰던 것이라고 설명한 부분은 좀 심했다.최근에야 철거했다. 다행이다. 강화군시설관리공단에 박영길 이사장이 부임하면서 많은, 긍정적 변화가 있는 것 같다. 더보기
귀 열어 하늘의 경고를 들으시라 연산군 3년(1497년), 대궐에 벼락이 쳤다. 국왕 비서 기관인 승정원에서 아뢰길, 임금이 덕을 잃어 하늘이 꾸지람을 내린 것이라고 했다. 연산군은 조정에 나가 “내가 부덕하여 하늘이 벼락을 내렸다”라고 하면서 대책을 말해달라 이른다. 신하들이, 성찰하고 근신하며 정사를 부지런히 돌보셔야 한다고 말했다. 천둥소리는 백성들이 고통스러워 울부짖는 소리이니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고도 했다. 연산군의 대답이 대략 이러했다. “그동안 날이 너무 더워서 내가 정사에 게을렀다. 경연에도 응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열심히 하겠다.”연산군 6년(1500년), 사헌부가 상소했다. 임금이 잘못하면 하늘이 천재지변을 내려 꾸짖고 경고한다는 한나라 동중서의 말을 인용하면서 “근래 수재와 한재가 잇따르고 흉년과 기근이 .. 더보기
강화도조약을 알아봅시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올해는 2025년입니다. 150년 전인 1875년(고종 12)에 초지진 수비군이 무단 침입한 일본 군함을 쫓아냈습니다. 운요호 사건입니다. 다음 해 1876년(고종 13) 2월, 그들이 다시 강화에 왔습니다. 조선 정부에 따지겠다고 왔습니다. 서계(외교문서) 접수 거부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사과를 받겠다는 겁니다. 중국에 가다가 물이 부족해 물 좀 달라고 간 사람들에게, 그것도 국기를 달아 국적을 밝힌 사람들에게 물은 안 주고 포격한 이유가 뭐냐. 인도주의적으로도 그렇고, 국제법상으로도 그렇고, 조선이 잘못했다는 얘기입니다. 지난 호(제77호, ‘운요호 사건의 진실’)에서 말씀드린 대로 식수를 구하러 왔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중국 가던 길이라는 말도 거짓입니다. 국기를 달았다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