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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마리산 참성단 “한번 보고 가득한 회포를 풀고 두 번 보고 천 년 역사를 알만한 강화! 우리가 원하여 보고자 하는 강화! 우리가 기어코 가야만 할 강화!”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가자봉인’이라는 필명을 쓰는 이가 잡지 《개벽》에 실은 글의 일부입니다. 가고 싶은 강화가 아니라 ‘기어코 가야만’ 하는 강화라고 했습니다. 가자봉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열망하는 이마다 ‘기어코’ 강화에 다녀갔습니다. 교통 불편하던 시절, 왜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강화를 찾았을까요. 참성단을 ‘뵙기’ 위함이었습니다. 마리산 참성단에 오른 가자봉인은 그 감회를 이렇게 썼습니다. “단군이 등을 어루만지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아 감격의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그렇습니다. 나라 잃은 백성의 처지가 되어 찾아온 마.. 더보기
‘가꾸지’ 바닷길 역사 산책① – 연미정 살다 보면, 특별한 이유도 없이 확 짜증이 나고 가슴이 답답할 때가 있다. 그러면 난 연미정에 가곤 한다. 방문객이 거의 없어서, 그 귀한 공간이 오롯이 내 것이 된다. 돈대 여장에 기댄 채 바다를 보고 하늘도 보고 바닥에 주저앉아 멍도 때리고 그러다 보면, 그래, 사는 게 다 그렇지, 훌훌 털어내게 된다. 그랬는데, 요즘은 연미정 분위기가 다르다. 찾는 이들이 평일에도 제법 많다. 나는 여전히 연미정을 사랑하지만, 여기서 멍때리기는 이제 하지 않는다. “응? 정자라는데 웬 성벽이야?”“저 안에 있나 보지.”내 바로 앞에서 걷는 이들이 말한다. 처음 오시는 분들인 모양이다. 아래에서 보니 월곶돈대가 정말 높다란 성벽 같다. 아치형 출입문으로 들어간다. 그 많은 돈대 가운데 출입문이 아치형인 것은 몇 개 .. 더보기
강화의 선사시대 강화의 선사시대 오늘은 강화의 선사시대를 살펴봅니다. 아득한 옛날, 사람들이 문자를 발명하고 기록을 남기게 된 이후부터를 역사시대라고 하고 문자 발명 이전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합니다. 선사(先史)는 역사 이전 시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시대까지를 선사시대로 분류합니다. 선사시대는 문자 기록이 없는 시대이기에 당시 사람들이 남긴 유물이나 유적 등을 통해 그들의 삶을 추정하게 됩니다. 물론 자연환경도 고려합니다. 한반도에서 구석기시대가 시작된 것은, 교과서 기준으로, 대략 70만 년 전이고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8000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1만 년 전쯤부터입니다. 만약 강화에서 3만 년 전에 만들어진 어떤 도구가 나왔다고 하면, 그건 구석기시대 유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 더보기
강화도 충렬사 안내판 해설 강화도 충렬사 앞에 선 안내판 전문입니다.  병자·정축호란(1636~1637) 당시 종묘의 위패를 받들고 세자빈과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강화가 함락되었을 때 순절한 김상용을 비롯하여 공조판서 이상길, 장령 이시직, 돈녕도정 심현, 천총 구원일 등을 배향하기 위하여 인조 19년(1642)에 건립된 사당이다. 효종 9년(1658)에 사액되었다.1657년 훈련정 황선신, 훈련첨정 강흥업을, 1658년에는 금부도사 권순장, 생원 김익겸, 필선 윤전을, 영조 4년(1728)에 좌승지 홍명형을, 1787년에 광흥수 이돈오, 홍익한과 병자호란 때 근왕병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가려다 순절한 윤계를 함께 추향하였다.건립 당시에는 현충사(顯忠祠)라 하였으나 효종 9년(1658)에 효종이 유수 허휘에게 현판과.. 더보기
강화전쟁박물관(갑곶돈대) 삼충사적비에 박힌 쇠못 두 개 병자호란 때 강화도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청군에 맞서 전투를 이끌어야 할 책임자, 김경징과 장신은 지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다. 그럼에도 황선신·구원일·강흥업은 죽음으로 청군에 맞섰다. 이들을 기리는 비가 삼충사적비이다. 강화전쟁박물관 마당에 삼충사적비(三忠事蹟碑, 1733)가 있다. 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오호라. 이 갑곶나루터 진해루 아래는 곧 삼충신이 죽음을 보이고 돌아간 곳이다. 죽은 날은 실로 정축년(1627) 정월 22일이었다. 슬프도다. 삼충신은 강화부 사람이었다. 중군 황선신은 분개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우부천총 구원일은 칼을 쥐고 물로 뛰어들어 전사하였으며, 좌부천총 강흥업은 중군과 함께 전사하였으니, 이른바 삼충이라 한다.…” 갑곶돈대 수많은 비석 가운데 강화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 더보기
참성단이여, 고맙습니다 참성단에 성화가 올랐다. 육군 군악대의 반주에 맞춰 수많은 사람이 노래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 장관 등이 개천절 경축사를 한다. 이어지는 만세 소리. 기념식이 끝나고 공군 비행기들이 마리산 하늘을 난다. 멋진 경축 비행에 사람들이 환호한다.상상이 아니다. 1949년 10월 3일, 참성단에서 실제 있었던 개천절 기념식의 모습이다. 정부 차원의 국가 행사였다. 지금은 참성단에서 채화해서 전국체전 장소로 성화가 봉송되는데 1949년 그날은 삼랑성 안에서 채화해 참성단으로 모셨다. 일 년 전 1948년 개천절 때는 신익희 국회의장을 포함해 30여 명의 국회의원이 참성단에 집결했다. 그때는 그랬다.일제에 맞서 싸우던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으로 돌아와 먼저 찾아오던 곳, 광복을 맞은 대한민국 정부 .. 더보기
6.25전쟁기 강화도 사람들의 삶(강영뫼 순의비 포함) 반공 교육의 명암산에서 낚싯대를 들고 내려오는 사람, 신발에 갯벌 흙이 묻은 사람, 담뱃값을 모르는 사람, “동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꼭 신고하라는 말을 무진장 듣고 읽으며 자랐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북한 간첩이라고 했다.나이 육십이 다 된 지금도 기억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반복 학습’을 당했던 모양이다. 초등학생 때인데, 참 궁금했다. 빨갱이는 얼굴이 빨개서 금방 알아볼 수 있을 텐데 굳이 낚싯대와 신발을 살필 필요가 있을까.분단된 나라에서 반공 교육, 안보 교육이 필요한 건 당연하지만, 과했다. “국가 안보”라고 쓰고 “정권 안보”라고 읽어야 했던 특정 시대도 문제였다. 아무튼, 이런 영향인지, 6·25전쟁 때 북한군이 남쪽 사람들을 보이는 대로 죽인 줄 알았다. 군인이건, .. 더보기
강화에 돈대는 도대체 몇 개? 강화에는 보물과도 같은 문화재가 즐비합니다. 저는 그 가운데 돈대에 주목합니다. 사실상 전국에서 강화에만 있습니다. 많아서 더 소중합니다. 하나보다 무리 지어 핀 코스모스가 더 예쁘고 하나보다 함께 어우러져 빛나는 별들이 더 설레는 법입니다. 동서남북 어느 해안에서든 만날 수 있는 돈대는 그래서 강화의 보물입니다.그런데 돈대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습니다. 자료를 찾다 보면, 이름이 바뀐 경우가 있고 건립된 돈대의 수도 제각각으로 나오고 심지어 건립 연대도 다르게 나오기까지 합니다. 어느 게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돈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정리해보려고 합니다.우선 다음 글을 읽어보셔요. 공신력 있는 어느 기관 홈페이지에 ‘선수돈대’를 소개한 글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모두 오류.. 더보기
강화도조약, 그게 아니다 ① 강화 진무영 열무당 지난밤, 인터넷을 검색하다 강화도조약과 관련한 사진 ①을 보았다. ‘수호 조약 체결을 강요하는 일본군[강화부 연무당]. 1876년 촬영.(ⓒ국립중앙박물관)’이란 설명이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대백과사전)에 실린 사진과 글이다. 하지만 사진 속 배경은 연무당이 아니라 열무당이다. 대백과사전에서 밝힌 출처를 따라 국립중앙박물관 사이트로 들어가 봤다. 역시나 같은 사진에 같은 설명이 있었다. 열무당을 연무당으로 표기한 것은 단순 실수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사소해 보이는 오류의 부정적인 영향력이 너무 크다.연무당(鍊武堂)과 열무당(閱武堂)은 강화를 지키던 군영인 진무영의 부속건물이다. 연무당은 군인들이 훈련(訓鍊)하는 공간이고, 열무당은 지휘관이 사열(査閱)하고 지휘하는 공..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