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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고려궁지에서 보는 고려 최우의 결단, 천도 1232년(고종 19) 2월, 개성 조정에서 강화 천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됩니다. 고종 임금과 신하들 대부분이 천도에 부정적이었습니다. 6월 16일, 최우가 자기 집 세간살이를 강화로 옮깁니다. 《고려사절요》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어요. “최우가 왕에게 … 강화도로 행차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하였다. 최우가 녹전거(수레) 100여 대를 빼앗아 집안의 재물을 강화도로 옮기니, 개경이 흉흉하였다.” 다음 날인 6월 17일, 최우는 강화에 궁궐을 짓기 시작합니다. 7월 6일, 고종도 어쩔 수 없이 개성 궁궐을 떠나 강화로 향합니다. 7월 7일, 칠월칠석날, 고종이 송해면 승천포에 도착합니다. 비가 하염없이 내렸습니다. 궁궐을 막 짓기 시작했으니, 그곳으로는 갈 수.. 더보기
몽골의 침략과 강화도 천도 거란·여진·몽골조선시대의 전쟁 그러면, 우리는 임진왜란(1592),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을 떠올립니다. 그렇습니다. 큰 전쟁은 이게 다예요. 조선 건국(1392) 이래 임진왜란 때까지 200년간 대규모 전쟁이 없었던 겁니다.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장기간의 평화 시대였어요. 병자호란 이후 다시 전쟁 없는 시대가 계속됩니다. 고려는 아니었습니다. 건국 초부터 멸망 시기까지 거듭 큰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때 국제 정세가 전쟁을 부르는 시대였습니다. 당시 중국은 송나라였어요. 문화, 경제적으로 번영했으나 군사력이 약했습니다. 그래서 송나라는 북방민족의 거듭된 침략으로 시련을 겪다가 결국은 몽골에 망하고 맙니다. 고려 역시 북방민족의 침략당합니다. 북방민족, 그들은 대개 만리장성 이북.. 더보기
강화 부근리 지석묘, 받침돌 균열 심각 공식 이름이 ‘강화 부근리 지석묘’이다. 1964년에 사적으로 지정할 때는 ‘강화 지석묘’였으나 2011년에 ‘강화 부근리 지석묘’로 변경됐다. 보통 ‘부근리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남한에서 제일 큰 탁자식(북방식) 고인돌로 균형미까지 탁월하여 우리나라 고인돌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덮개돌의 무게가 55톤이다. 수천 년 세월을 품은 이 고인돌이 위태로워 보인다. 뒤쪽에서 보아 오른쪽 받침돌에 생긴 균열이 심각하다. 균열이 생긴 것은 오래전인데 점점 심해지고 있다. 강화군에서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한다. 정부 차원의 관심과 지원도 필요하다. 세계문화유산, 그중에서도 으뜸인 고인돌이 ‘강화 부근리 지석묘’이다. (촬영일, 2023.05.10) 더보기
도구를 사용하는 원숭이 사진 한 장 사진에서 중요한 걸 배운다. 《단단한 고고학》(김상태)이라는 신간의 신문 서평에 실린 사진이다. 기자는 이렇게 서평을 시작했다. “도구를 사용하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이라는 학설은 물론 오래전에 파기되었다. 그러나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인간의 진화와 문명 발달에 가속도가 붙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한겨레신문, 2023.05.13. 최재봉 선임기자) 더보기
권필 유허비와 묘갈명 해석문 권필유허비 번역문과 원문은 '문화유산 지식e음'에서 볼 수 있다. 문화유산 지식e음 문화유산 지식e음 입니다. portal.nrich.go.kr 권필 묘 바로 아래 비각이 있다. 권필 묘갈명은 《국조인물고》에 실렸는데, 번역본을 네이버에서 볼 수 있다. 권필 아! 여기 고양현(高陽縣) 위양리(渭陽里)는 석주(石洲, 권필의 호) 권 선생(權先生)이 묻혀 있는 곳이다. 그의 선대에 대한 사적은 묘소 왼쪽 선생 선친(先親)의 묘비(墓碑)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terms.naver.com 더보기
‘5월의 독립운동가’와 한겨레신문 의미 있는 기사를 읽었다. 2023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일본인 두 사람을 선정했다는 내용이다. 다음은 기사 전문이다. 일본인이었지만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가네코 후미코와 후세 다쓰지가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고 국가보훈처가 30일 밝혔다.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한국인 유학생들이 만든 흑도회에 몸담고 노동자 후원과 친일파 응징 활동, 무정부주의 운동을 펼쳤다. 1923년 관동대지진 후 보호검속 명목으로 연행됐다가 박 의사의 폭탄구입 계획이 드러나 사형 판결을 받았다. 1926년 2월 도쿄 대심원 법정 공판에서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자신의 이름은 ‘박문자'라고 밝히고 사형 판결 즉시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이후 .. 더보기
월곶진과 월곶돈대 간 겨울, 영하 20도를 경험했습니다. 그래도 봄은 와 진달래, 개나리, 목련, 벚꽃, 영산홍, 강화가 꽃섬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신록입니다. 요맘때의 파릇한 저 신록, 참 좋아요. 모처럼 방구석을 벗어나 연미정으로 갑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렸습니다. 아래서부터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지요. 강화산성 남문 닮은 조해루(朝海樓)를 먼저 만납니다. 조해루는 강화외성의 성문입니다. 조선 후기, 강화 동쪽 해안에 외성을 쌓았습니다. 성을 쌓으면 드나드는 성문이 필요하죠. 조해루가 바로 외성 성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덕진진 공조루, 광성보 안해루 역시 강화외성 출입문입니다. 조해루에서 저 위 월곶돈대까지 성벽이 이어져 있지요? 그 성벽이 바로 강화외성의 일부입니다. 이제 경사 길 따라 연미정으로 향합니다. 정.. 더보기
불교와 강화도 사찰 이야기 오늘은 신라 원효대사(617~686)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원효가 불교 공부를 더 하려고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는 길입니다. 밤이 되었고 주변에 집은 없고 그래서 토굴로 들어가 잡니다. 중간에 목이 말라 깬 원효, 마침 곁에 물이 담긴 바가지가 있기에 벌컥벌컥 마십니다. 아~, 달다. 다시 잡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옆에 해골이 있는 겁니다. 으악!‘간밤에 마신 물이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구나.’ 알게 된 순간, 바로 오바이트 신호가 왔습니다. 꺽꺽 토해내다가 문득 깨달았다고 해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이 다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해골에 고인 물을 생수라고 여기고 마셨을 땐 시원하고 달았습니다. 배앓이도 하지 않고 잘 잤습니다. 그런데 해골바가지 물임을 알게 된 순간 몸이 따라 반.. 더보기
고려 대몽항쟁기 강화 천도 당시의 강화도와 지금 강화도 지도 고려대몽항쟁기 강화 천도 당시의 강화도 현재의 강화도(네이버 지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