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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강화전쟁박물관(갑곶돈대) 삼충사적비에 박힌 쇠못 두 개 병자호란 때 강화도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청군에 맞서 전투를 이끌어야 할 책임자, 김경징과 장신은 지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다. 그럼에도 황선신·구원일·강흥업은 죽음으로 청군에 맞섰다. 이들을 기리는 비가 삼충사적비이다. 강화전쟁박물관 마당에 삼충사적비(三忠事蹟碑, 1733)가 있다. 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오호라. 이 갑곶나루터 진해루 아래는 곧 삼충신이 죽음을 보이고 돌아간 곳이다. 죽은 날은 실로 정축년(1627) 정월 22일이었다. 슬프도다. 삼충신은 강화부 사람이었다. 중군 황선신은 분개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우부천총 구원일은 칼을 쥐고 물로 뛰어들어 전사하였으며, 좌부천총 강흥업은 중군과 함께 전사하였으니, 이른바 삼충이라 한다.…” 갑곶돈대 수많은 비석 가운데 강화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 더보기
참성단이여, 고맙습니다 참성단에 성화가 올랐다. 육군 군악대의 반주에 맞춰 수많은 사람이 노래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 장관 등이 개천절 경축사를 한다. 이어지는 만세 소리. 기념식이 끝나고 공군 비행기들이 마리산 하늘을 난다. 멋진 경축 비행에 사람들이 환호한다.상상이 아니다. 1949년 10월 3일, 참성단에서 실제 있었던 개천절 기념식의 모습이다. 정부 차원의 국가 행사였다. 지금은 참성단에서 채화해서 전국체전 장소로 성화가 봉송되는데 1949년 그날은 삼랑성 안에서 채화해 참성단으로 모셨다. 일 년 전 1948년 개천절 때는 신익희 국회의장을 포함해 30여 명의 국회의원이 참성단에 집결했다. 그때는 그랬다.일제에 맞서 싸우던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으로 돌아와 먼저 찾아오던 곳, 광복을 맞은 대한민국 정부 .. 더보기
6.25전쟁기 강화도 사람들의 삶(강영뫼 순의비 포함) 반공 교육의 명암산에서 낚싯대를 들고 내려오는 사람, 신발에 갯벌 흙이 묻은 사람, 담뱃값을 모르는 사람, “동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꼭 신고하라는 말을 무진장 듣고 읽으며 자랐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북한 간첩이라고 했다.나이 육십이 다 된 지금도 기억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반복 학습’을 당했던 모양이다. 초등학생 때인데, 참 궁금했다. 빨갱이는 얼굴이 빨개서 금방 알아볼 수 있을 텐데 굳이 낚싯대와 신발을 살필 필요가 있을까.분단된 나라에서 반공 교육, 안보 교육이 필요한 건 당연하지만, 과했다. “국가 안보”라고 쓰고 “정권 안보”라고 읽어야 했던 특정 시대도 문제였다. 아무튼, 이런 영향인지, 6·25전쟁 때 북한군이 남쪽 사람들을 보이는 대로 죽인 줄 알았다. 군인이건, .. 더보기
강화에 돈대는 도대체 몇 개? 강화에는 보물과도 같은 문화재가 즐비합니다. 저는 그 가운데 돈대에 주목합니다. 사실상 전국에서 강화에만 있습니다. 많아서 더 소중합니다. 하나보다 무리 지어 핀 코스모스가 더 예쁘고 하나보다 함께 어우러져 빛나는 별들이 더 설레는 법입니다. 동서남북 어느 해안에서든 만날 수 있는 돈대는 그래서 강화의 보물입니다.그런데 돈대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습니다. 자료를 찾다 보면, 이름이 바뀐 경우가 있고 건립된 돈대의 수도 제각각으로 나오고 심지어 건립 연대도 다르게 나오기까지 합니다. 어느 게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돈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정리해보려고 합니다.우선 다음 글을 읽어보셔요. 공신력 있는 어느 기관 홈페이지에 ‘선수돈대’를 소개한 글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모두 오류.. 더보기
강화도조약, 그게 아니다 ① 강화 진무영 열무당 지난밤, 인터넷을 검색하다 강화도조약과 관련한 사진 ①을 보았다. ‘수호 조약 체결을 강요하는 일본군[강화부 연무당]. 1876년 촬영.(ⓒ국립중앙박물관)’이란 설명이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대백과사전)에 실린 사진과 글이다. 하지만 사진 속 배경은 연무당이 아니라 열무당이다. 대백과사전에서 밝힌 출처를 따라 국립중앙박물관 사이트로 들어가 봤다. 역시나 같은 사진에 같은 설명이 있었다. 열무당을 연무당으로 표기한 것은 단순 실수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사소해 보이는 오류의 부정적인 영향력이 너무 크다.연무당(鍊武堂)과 열무당(閱武堂)은 강화를 지키던 군영인 진무영의 부속건물이다. 연무당은 군인들이 훈련(訓鍊)하는 공간이고, 열무당은 지휘관이 사열(査閱)하고 지휘하는 공.. 더보기
연미정 연가 풍광 빼어나고 역사적 의미도 남다른 강화도 연미정. 그 가치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군부대가 자리하고 오래도록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묶여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언제라도 가볼 수 있다. 거기 서서 바다를 바라볼 때만큼은 시련도 잊는다. 한강이 바다와 만나 두 길로 나뉘는 물길이 제비 꼬리를 닮았다 하여 연미정(燕尾亭)이 되었다. 역사가 길다. 고려 대몽항쟁기 강화 도읍 시절에 고종이 여기에 와서, 공부하던 학생들을 격려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말이다. 조선시대엔 어떠했나. 후금의 침략으로 조정이 강화로 피해온다. 정묘호란(1627)이다. 그때 인조가 연미정에서 군사 훈련을 지켜보기도 했다.  연미정은 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이 화친 조약을 맺은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아닌 것 같.. 더보기
강화에 왔던 조선 임금 이야기 조선의 임금은 모두 27명인데, 이들 가운데 우리 강화에 왔던 임금은 누구누구일까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제가 확인해 본 이는 일단 태종, 연산군, 광해군, 인조, 효종, 영조, 철종 정도입니다. 인조 빼고 나머지 임금들은 즉위하기 전에 왔거나 폐위되고 나서 강화 땅을 밟았습니다. 태종(이방원)이 임금 되기 전 어느 해엔가 강화에 왔습니다. 《세종실록》에, 임금들이 해마다 봄·가을에 대언(승지)을 마리산 참성단에 보내 초제를 올리게 했는데, 이방원도 대언 신분으로 왔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나 귀양 왔습니다. 연산군은 교동에 갇힌 지 불과 2개월 만에, 마누라가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묘를 그대로 교동에 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