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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가꾸지’ 바닷길 역사산책⑤-초지진 초지진에 왔다. 무엇이 보이는가. 소나무! 언제 보아도 정말 멋지다. 저 소나무 없는 초지진은 상상할 수 없다. 연미정을 느티나무가 빛내주었듯 초지진은 저 소나무가 빛내준다. 부디 오래도록 건강하시길, 그 어떤 태풍에도 끄떡없으시길. 초지진은 1656년(효종 7)에 설치됐다. 초지돈대, 장자평돈대, 섬암돈대를 거느렸다. 지금까지 이 글을 꼼꼼하게 읽어 온 분은 알아챘을 것이다. 그렇다. 초지진이 아니다. 여기는 초지진이 아니라 초지진에 소속됐던 여러 돈대 가운데 하나인 초지돈대이다. 갑곶돈대처럼 이름을 잘못 붙인 것이다.  초지진은 참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다. 신미양요(1871) 때 미군이 상륙한 곳이다. 몇 년 뒤 운요호사건(1875)도 여기서 벌어진다. ‘운요호사건’을 예전에는 한자 그대로 운양호사건.. 더보기
‘가꾸지’ 바닷길 역사산책④-덕진진 덕진진이다. 광성보보다 돌아볼 거리가 짧다. 초지진·덕진진·광성보는 한 세트로 묶여 말해지는데 덕진진은 광성보와 초지진보다 주목도가 덜한 것 같다. 삼형제 중에 둘째의 처지 같다고 할까. 하지만 여기도 의미 있는 문화유산이 자리한 곳이다. 홀로 산책하기엔 광성보보다 더 좋다. 진과 보 대개가 효종 때 설치됐는데 여기 덕진진은, 공식적으로 들어선 것이 숙종 때다. 1677년(숙종 3)에 세웠다. 신미양요 때 미군에게 점령됐었다. 그때 미군은 덕진돈대 여장을 파괴하고 여기 있던 무기들을 바다로 던지고 광성보로 향했다. 덕진진에 가면 먼저 공조루(控潮樓)를 보게 된다. 사실, 공조루는 강화외성의 출입문일 뿐, 덕진진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덕진진에는 덕진진이 없다! 광성보는? 광성보에도 광성보가 없다. 광성.. 더보기
‘가꾸지’ 바닷길 역사산책③-광성보 더리미 장어집, 장어집, 장어집. 냄새만 맡고 달린다. 용진진, 용당돈대, 화도돈대, 오두돈대, 오늘은 그냥 지나쳐 간다. 저 앞에 어재연 장군 동상이 보인다. 광성보에 다 온 거다. 광성보는 강화의 국방 유적 가운데 가장 찾는 이가 많은 곳이다. 신미양요 때 미군과 최후의 격전을 벌인 곳이라는 역사성과 뛰어난 풍광이 어우러진 결과일 것이다. 조선후기 강화 해안에 12개의 진보가 설치됐다. 월곶진·제물진·용진진·덕진진·초지진·인화보·철곶보·승천보·광성보·선두보·장곶보·정포보, 이렇게 5진과 7보, 그래서 12진보이다. 지휘관의 직급이 가장 높은 곳은 월곶진이다. 월곶진은 연미정 아래 있었다. 갑곶돈대 쪽에는 제물진이 있었다.  여기 광성보가 설치된 것은 1658년(효종 9)이다. 광성보의 얼굴, 커다란 .. 더보기
‘가꾸지’ 바닷길 역사산책② - 강화전쟁박물관 연미정에 안녕을 고하고 나와 한적한 해안도로로 들어선다. 시속 30km! 다행히 뒤따르는 차가 없어서 내 맘대로 천천히 간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 나도 살 좀 찌고 싶다. 아~, 공기 좋다. 벼 다 익은 들판이 아름답다. 벼는 뾰죽 선 초록 때도 이쁘고 저렇게 농익어 고개 숙인 노랑도 이쁘다. 아이구, 그러고 보니 모낼 때가 엊그제인데 어느새 벼 벨 때가 됐구나. 화살은 멀리 갈수록 느려지는데 인생은 멀리 갈수록 빨라지는 것 같다. 강화전쟁박물관 도착! 강화전쟁박물관을 포함한 일대 영역을 갑곶돈대라고 한다. 문화재(사적) 공식 명칭은 ‘강화 갑곶돈(江華 甲串墩)’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갑곶돈대에는 갑곶돈대가 없다. 진짜 갑곶돈대는 옛 강화대교 입구쯤에 있었다. 지금은 없.. 더보기
마리산 참성단 “한번 보고 가득한 회포를 풀고 두 번 보고 천 년 역사를 알만한 강화! 우리가 원하여 보고자 하는 강화! 우리가 기어코 가야만 할 강화!”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가자봉인’이라는 필명을 쓰는 이가 잡지 《개벽》에 실은 글의 일부입니다. 가고 싶은 강화가 아니라 ‘기어코 가야만’ 하는 강화라고 했습니다. 가자봉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열망하는 이마다 ‘기어코’ 강화에 다녀갔습니다. 교통 불편하던 시절, 왜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강화를 찾았을까요. 참성단을 ‘뵙기’ 위함이었습니다. 마리산 참성단에 오른 가자봉인은 그 감회를 이렇게 썼습니다. “단군이 등을 어루만지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아 감격의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그렇습니다. 나라 잃은 백성의 처지가 되어 찾아온 마.. 더보기
‘가꾸지’ 바닷길 역사 산책① – 연미정 살다 보면, 특별한 이유도 없이 확 짜증이 나고 가슴이 답답할 때가 있다. 그러면 난 연미정에 가곤 한다. 방문객이 거의 없어서, 그 귀한 공간이 오롯이 내 것이 된다. 돈대 여장에 기댄 채 바다를 보고 하늘도 보고 바닥에 주저앉아 멍도 때리고 그러다 보면, 그래, 사는 게 다 그렇지, 훌훌 털어내게 된다. 그랬는데, 요즘은 연미정 분위기가 다르다. 찾는 이들이 평일에도 제법 많다. 나는 여전히 연미정을 사랑하지만, 여기서 멍때리기는 이제 하지 않는다. “응? 정자라는데 웬 성벽이야?”“저 안에 있나 보지.”내 바로 앞에서 걷는 이들이 말한다. 처음 오시는 분들인 모양이다. 아래에서 보니 월곶돈대가 정말 높다란 성벽 같다. 아치형 출입문으로 들어간다. 그 많은 돈대 가운데 출입문이 아치형인 것은 몇 개 .. 더보기
강화의 선사시대 강화의 선사시대 오늘은 강화의 선사시대를 살펴봅니다. 아득한 옛날, 사람들이 문자를 발명하고 기록을 남기게 된 이후부터를 역사시대라고 하고 문자 발명 이전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합니다. 선사(先史)는 역사 이전 시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시대까지를 선사시대로 분류합니다. 선사시대는 문자 기록이 없는 시대이기에 당시 사람들이 남긴 유물이나 유적 등을 통해 그들의 삶을 추정하게 됩니다. 물론 자연환경도 고려합니다. 한반도에서 구석기시대가 시작된 것은, 교과서 기준으로, 대략 70만 년 전이고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8000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1만 년 전쯤부터입니다. 만약 강화에서 3만 년 전에 만들어진 어떤 도구가 나왔다고 하면, 그건 구석기시대 유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 더보기
강화도 충렬사 안내판 해설 강화도 충렬사 앞에 선 안내판 전문입니다.  병자·정축호란(1636~1637) 당시 종묘의 위패를 받들고 세자빈과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강화가 함락되었을 때 순절한 김상용을 비롯하여 공조판서 이상길, 장령 이시직, 돈녕도정 심현, 천총 구원일 등을 배향하기 위하여 인조 19년(1642)에 건립된 사당이다. 효종 9년(1658)에 사액되었다.1657년 훈련정 황선신, 훈련첨정 강흥업을, 1658년에는 금부도사 권순장, 생원 김익겸, 필선 윤전을, 영조 4년(1728)에 좌승지 홍명형을, 1787년에 광흥수 이돈오, 홍익한과 병자호란 때 근왕병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가려다 순절한 윤계를 함께 추향하였다.건립 당시에는 현충사(顯忠祠)라 하였으나 효종 9년(1658)에 효종이 유수 허휘에게 현판과.. 더보기
강화전쟁박물관(갑곶돈대) 삼충사적비에 박힌 쇠못 두 개 병자호란 때 강화도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청군에 맞서 전투를 이끌어야 할 책임자, 김경징과 장신은 지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다. 그럼에도 황선신·구원일·강흥업은 죽음으로 청군에 맞섰다. 이들을 기리는 비가 삼충사적비이다. 강화전쟁박물관 마당에 삼충사적비(三忠事蹟碑, 1733)가 있다. 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오호라. 이 갑곶나루터 진해루 아래는 곧 삼충신이 죽음을 보이고 돌아간 곳이다. 죽은 날은 실로 정축년(1627) 정월 22일이었다. 슬프도다. 삼충신은 강화부 사람이었다. 중군 황선신은 분개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우부천총 구원일은 칼을 쥐고 물로 뛰어들어 전사하였으며, 좌부천총 강흥업은 중군과 함께 전사하였으니, 이른바 삼충이라 한다.…” 갑곶돈대 수많은 비석 가운데 강화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