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史 썸네일형 리스트형 '욱일승천기' 대신 '일제기'라고 쓰자 동아시안컵 축구대회 한·일전 응원 때 등장했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가 여전히 뜨겁다. 플래카드를 떼어버린 축구협회의 처사에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랬나 싶다가도, 스포츠는 그냥 스포츠여야 한다는 FIFA적 관점도 공감하게 된다. 이기면 신나고 지면 속상하지만, 질 수도 있는 것이 스포츠다. 일본 응원단에서 '욱일승천기'를 흔들어댄 것, 우리 플래카드 내용을 문제 삼아 한국 국민의 '수준' 운운한 일본 각료의 발언에서는 화가 나기보다 왠지 그들의 열패감을 보는 듯해 측은하게 들린다.그런데 이 사건을 보도하는 우리 신문, 방송들은 하나같이 '욱일승천기'라고 한다. 일본인들조차 줄여서 '욱일기'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 언론은 왜 정성스럽게 꼬박꼬박 '욱일승천기'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욱일승천(旭日.. 더보기 ‘문화재’ 이야기 국보 1호 남대문, 보물 1호 동대문, 사적 1호 포석정. 외우던 기억이 나실 겁니다. 참성단이 사적 136호인 것도 알고 계신 분이 계실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고려궁지가 사적 몇 호였더라?’ 찾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2021년 11월 19일부터 문화재 지정번호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제도가 변경됐거든요. 그때 문화재청이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문화재 지정번호는 국보나 보물 등 문화재 지정 시 순서대로 부여하는 번호로, 일부에서 문화재 지정순서가 아닌 가치 서열로 오인해 서열화 논란이 제기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문화재청은…‘지정(등록)번호’를 삭제하고 문화재 행정에서 지정번호를 사용하지 않도록 정책을 개선하였다.” 이를테면 보물 30호가 보물 70호보다 더 가치 있는 문화재라고 오해하는 이들이.. 더보기 ‘가꾸지’ 바닷길 역사산책⑤-초지진 초지진에 왔다. 무엇이 보이는가. 소나무! 언제 보아도 정말 멋지다. 저 소나무 없는 초지진은 상상할 수 없다. 연미정을 느티나무가 빛내주었듯 초지진은 저 소나무가 빛내준다. 부디 오래도록 건강하시길, 그 어떤 태풍에도 끄떡없으시길. 초지진은 1656년(효종 7)에 설치됐다. 초지돈대, 장자평돈대, 섬암돈대를 거느렸다. 지금까지 이 글을 꼼꼼하게 읽어 온 분은 알아챘을 것이다. 그렇다. 초지진이 아니다. 여기는 초지진이 아니라 초지진에 소속됐던 여러 돈대 가운데 하나인 초지돈대이다. 갑곶돈대처럼 이름을 잘못 붙인 것이다. 초지진은 참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다. 신미양요(1871) 때 미군이 상륙한 곳이다. 몇 년 뒤 운요호사건(1875)도 여기서 벌어진다. ‘운요호사건’을 예전에는 한자 그대로 운양호사건.. 더보기 ‘가꾸지’ 바닷길 역사산책④-덕진진 덕진진이다. 광성보보다 돌아볼 거리가 짧다. 초지진·덕진진·광성보는 한 세트로 묶여 말해지는데 덕진진은 광성보와 초지진보다 주목도가 덜한 것 같다. 삼형제 중에 둘째의 처지 같다고 할까. 하지만 여기도 의미 있는 문화유산이 자리한 곳이다. 홀로 산책하기엔 광성보보다 더 좋다. 진과 보 대개가 효종 때 설치됐는데 여기 덕진진은, 공식적으로 들어선 것이 숙종 때다. 1677년(숙종 3)에 세웠다. 신미양요 때 미군에게 점령됐었다. 그때 미군은 덕진돈대 여장을 파괴하고 여기 있던 무기들을 바다로 던지고 광성보로 향했다. 덕진진에 가면 먼저 공조루(控潮樓)를 보게 된다. 사실, 공조루는 강화외성의 출입문일 뿐, 덕진진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덕진진에는 덕진진이 없다! 광성보는? 광성보에도 광성보가 없다. 광성.. 더보기 ‘가꾸지’ 바닷길 역사산책③-광성보 더리미 장어집, 장어집, 장어집. 냄새만 맡고 달린다. 용진진, 용당돈대, 화도돈대, 오두돈대, 오늘은 그냥 지나쳐 간다. 저 앞에 어재연 장군 동상이 보인다. 광성보에 다 온 거다. 광성보는 강화의 국방 유적 가운데 가장 찾는 이가 많은 곳이다. 신미양요 때 미군과 최후의 격전을 벌인 곳이라는 역사성과 뛰어난 풍광이 어우러진 결과일 것이다. 조선후기 강화 해안에 12개의 진보가 설치됐다. 월곶진·제물진·용진진·덕진진·초지진·인화보·철곶보·승천보·광성보·선두보·장곶보·정포보, 이렇게 5진과 7보, 그래서 12진보이다. 지휘관의 직급이 가장 높은 곳은 월곶진이다. 월곶진은 연미정 아래 있었다. 갑곶돈대 쪽에는 제물진이 있었다. 여기 광성보가 설치된 것은 1658년(효종 9)이다. 광성보의 얼굴, 커다란 .. 더보기 ‘가꾸지’ 바닷길 역사산책② - 강화전쟁박물관 연미정에 안녕을 고하고 나와 한적한 해안도로로 들어선다. 시속 30km! 다행히 뒤따르는 차가 없어서 내 맘대로 천천히 간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 나도 살 좀 찌고 싶다. 아~, 공기 좋다. 벼 다 익은 들판이 아름답다. 벼는 뾰죽 선 초록 때도 이쁘고 저렇게 농익어 고개 숙인 노랑도 이쁘다. 아이구, 그러고 보니 모낼 때가 엊그제인데 어느새 벼 벨 때가 됐구나. 화살은 멀리 갈수록 느려지는데 인생은 멀리 갈수록 빨라지는 것 같다. 강화전쟁박물관 도착! 강화전쟁박물관을 포함한 일대 영역을 갑곶돈대라고 한다. 문화재(사적) 공식 명칭은 ‘강화 갑곶돈(江華 甲串墩)’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갑곶돈대에는 갑곶돈대가 없다. 진짜 갑곶돈대는 옛 강화대교 입구쯤에 있었다. 지금은 없.. 더보기 마리산 참성단 “한번 보고 가득한 회포를 풀고 두 번 보고 천 년 역사를 알만한 강화! 우리가 원하여 보고자 하는 강화! 우리가 기어코 가야만 할 강화!”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가자봉인’이라는 필명을 쓰는 이가 잡지 《개벽》에 실은 글의 일부입니다. 가고 싶은 강화가 아니라 ‘기어코 가야만’ 하는 강화라고 했습니다. 가자봉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열망하는 이마다 ‘기어코’ 강화에 다녀갔습니다. 교통 불편하던 시절, 왜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강화를 찾았을까요. 참성단을 ‘뵙기’ 위함이었습니다. 마리산 참성단에 오른 가자봉인은 그 감회를 이렇게 썼습니다. “단군이 등을 어루만지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아 감격의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그렇습니다. 나라 잃은 백성의 처지가 되어 찾아온 마.. 더보기 ‘가꾸지’ 바닷길 역사 산책① – 연미정 살다 보면, 특별한 이유도 없이 확 짜증이 나고 가슴이 답답할 때가 있다. 그러면 난 연미정에 가곤 한다. 방문객이 거의 없어서, 그 귀한 공간이 오롯이 내 것이 된다. 돈대 여장에 기댄 채 바다를 보고 하늘도 보고 바닥에 주저앉아 멍도 때리고 그러다 보면, 그래, 사는 게 다 그렇지, 훌훌 털어내게 된다. 그랬는데, 요즘은 연미정 분위기가 다르다. 찾는 이들이 평일에도 제법 많다. 나는 여전히 연미정을 사랑하지만, 여기서 멍때리기는 이제 하지 않는다. “응? 정자라는데 웬 성벽이야?”“저 안에 있나 보지.”내 바로 앞에서 걷는 이들이 말한다. 처음 오시는 분들인 모양이다. 아래에서 보니 월곶돈대가 정말 높다란 성벽 같다. 아치형 출입문으로 들어간다. 그 많은 돈대 가운데 출입문이 아치형인 것은 몇 개 .. 더보기 강화의 선사시대 강화의 선사시대 오늘은 강화의 선사시대를 살펴봅니다. 아득한 옛날, 사람들이 문자를 발명하고 기록을 남기게 된 이후부터를 역사시대라고 하고 문자 발명 이전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합니다. 선사(先史)는 역사 이전 시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시대까지를 선사시대로 분류합니다. 선사시대는 문자 기록이 없는 시대이기에 당시 사람들이 남긴 유물이나 유적 등을 통해 그들의 삶을 추정하게 됩니다. 물론 자연환경도 고려합니다. 한반도에서 구석기시대가 시작된 것은, 교과서 기준으로, 대략 70만 년 전이고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8000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1만 년 전쯤부터입니다. 만약 강화에서 3만 년 전에 만들어진 어떤 도구가 나왔다고 하면, 그건 구석기시대 유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 더보기 이전 1 ··· 12 13 14 15 1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