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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가꾸지’ 바닷길 역사산책④-덕진진

덕진진이다. 광성보보다 돌아볼 거리가 짧다. 초지진·덕진진·광성보는 한 세트로 묶여 말해지는데 덕진진은 광성보와 초지진보다 주목도가 덜한 것 같다. 삼형제 중에 둘째의 처지 같다고 할까. 하지만 여기도 의미 있는 문화유산이 자리한 곳이다. 홀로 산책하기엔 광성보보다 더 좋다.

진과 보 대개가 효종 때 설치됐는데 여기 덕진진은, 공식적으로 들어선 것이 숙종 때다. 1677(숙종 3)에 세웠다. 신미양요 때 미군에게 점령됐었다. 그때 미군은 덕진돈대 여장을 파괴하고 여기 있던 무기들을 바다로 던지고 광성보로 향했다.

덕진진에 가면 먼저 공조루(控潮樓)를 보게 된다. 사실, 공조루는 강화외성의 출입문일 뿐, 덕진진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덕진진에는 덕진진이 없다! 광성보는? 광성보에도 광성보가 없다. 광성보 안해루 역시, 덕진진 공조루처럼 강화외성을 출입하는 문루이다.

광성보덕진진은 해안경계 부대 명칭이다. 부대가 있으면 부대장을 비롯해 장수들이 근무하는 건물, 병사들의 숙소, 무기고, 창고 이런 게 있을 거 아닌가. 이러한 진과 보의 건물들을 진사(鎭舍)라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조금 전에 보고 온 광성보를 떠올려보라. 안해루, 광성돈대, 쌍충비각, 신미순의총, 손돌목돈대, 광성포대, 용두돈대. 이게 다다. 진사는 없다. 덕진진도 마찬가지다.

둘도 필요 없고 한 곳에만 진사가 복원됐으면 좋겠다. 교육적으로도 필요하다. 광성보도 괜찮지만, 여건이 좋은 곳은 월곶진이다. 월곶진은 12진보 가운데 지휘관 직급이 가장 높은 부대였다. 연미정 월곶돈대 아래 진사 위치도 지표 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조선 후기 강화도 지도에 월곶진 진사 그림이 비교적 상세히 나와 있다. 멋있게 말고 실제와 가깝게 복원되면 좋겠다.

 

덕진돈대

 

덕진진 공조루 지나면 앞이 탁 트인 전망, 바다가 보이고 초지대교가 보인다. 그 아래 숨은 듯 앉아 있는 남장포대를 만난다. 복원된 포대 가운데 제일 크다. 복제품 대포들이 쭉 늘어서서 무엇을 하던 곳인지 금방 알게 된다.

조선 후기 당시에는 포대의 이름이 없었던 것 같다. 옛지도를 보면 포대육혈(砲臺六穴)’, ‘포대십오혈식으로만 표기했다. 남장포대 등의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나온 속수증보강도지에 처음 보인다.

미 군함이 나타나자 강화의 돈대와 포대에서 일제히 포를 발사했다. 쌍방의 치열한 포격전이 시작됐다!” 이런 문장을 어디선가 읽었다고 치자. 또는 어느 강의에서 들었다고 치자. 맞는 말일까? 대개 이렇게 말하고 쓰지만, 필자 생각은 다르다. 틀렸다고 단언할 자신은 없고, 그냥 틀린 것 같은데요.” 이렇게 말하련다.

필자는 병인양요·신미양요 당시에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에 돈대만 있었고 포대는 없었다고 여긴다. 포대는 신미양요 이후에 설치된 것으로 본다. 신미양요 당시 미군이 촬영한 사진 중에 여기 남장포대 쪽을 찍은 것도 있는데 그냥 수풀 무더기일 뿐 포대가 보이지 않는다.

고종실록(1874.03.20.)에 이런 기록이 있다.

 

삼군부에서 아뢰기를, ‘지금 진무사 신헌의 장계를 보니, ‘용진 이하 세 진을 지키기 위하여 포대를 새로 세웠고

 

신미양요 3년 뒤인 1874년에 진무사 겸 강화유수 신헌이 용진진 아래 3개 진에 포대를 새로 세웠다고 보고했다. 3개의 진은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을 말하는 것일 게다. 신미양요 당시에는 강화도에 포대가 없었다고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 조금 더 가봅시다. 남장포대 끝에서 다시 계단. 그런데 계단 바로 옆에 대나무숲. 신기하다. 강화에서는 대나무가 잘 안된다. 자라도 아주 가늘다. 그런데 여기 대나무는 제법 실하다.

계단 오르면 덕진돈대. 사각형 모양이다. 단단해 보인다. 여장은 없다. 덕진돈대에 가시면, 포좌(포 쏘는 구멍)를 살펴보시기 바란다. 여느 돈대의 포좌와는 다른 구조다. 쌍으로 붙어있다.

돈대를 나와 왼쪽으로 돌아가면 귀한 비석 하나, 바다를 향해 서 있다.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라고 새겼다. “바다 문을 막아 지키니 다른 나라 배는 삼가 지나가지 말라.” 정도의 뜻이다. 이 비를 해문방수비라고도 부르고 경고비라고도 한다. 대원군이 세우게 했다고 한다. 병인양요 직후에 세운 것 같다. 병인양요 때 사실상 무방비로 여기가 뚫렸다. 그래서 한양이 위협받고 강화 읍내가 점령됐었다. 이에 이 비를 세워 경계를 강화한 것이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역사 산책 장소, 초지진으로 간다.

강화문화원, 江華文化16,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