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리미 장어집, 장어집, 장어집. 냄새만 맡고 달린다. 용진진, 용당돈대, 화도돈대, 오두돈대, 오늘은 그냥 지나쳐 간다. 저 앞에 어재연 장군 동상이 보인다. 광성보에 다 온 거다. 광성보는 강화의 국방 유적 가운데 가장 찾는 이가 많은 곳이다. 신미양요 때 미군과 최후의 격전을 벌인 곳이라는 역사성과 뛰어난 풍광이 어우러진 결과일 것이다.
조선후기 강화 해안에 12개의 진보가 설치됐다. 월곶진·제물진·용진진·덕진진·초지진·인화보·철곶보·승천보·광성보·선두보·장곶보·정포보, 이렇게 5진과 7보, 그래서 12진보이다. 지휘관의 직급이 가장 높은 곳은 월곶진이다. 월곶진은 연미정 아래 있었다. 갑곶돈대 쪽에는 제물진이 있었다.
여기 광성보가 설치된 것은 1658년(효종 9)이다. 광성보의 얼굴, 커다란 문루, 안해루(按海樓) 앞이다. 문루 왼쪽으로 광성돈대가 붙어있다. 돈대부터 들어가 보자. 돈대는 진과 보에 소속된 일종의 초소이다.
어라, 앞이 꽉 막혔네. 정면으로 나무가 가득하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안 그랬다.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나무를 베어냈다. 적의 침략을 감시하는 초소이니, 당연히 그래야 했다.
다른 돈대와 달리 광성돈대 안에는 포가 몇 개 전시돼 있다. 큰 포에 눈이 가지만, 사실 중요했던 것은 작은 포다. 몸통 위가 뻥 뚫린, 이상하게 생긴 포, 불랑기이다. 이 불랑기가 강화도 돈대의 주력 무기였다.
불랑기의 장점은 일종의 연발 사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일반 포는 포 구멍으로 포알을 넣는다. 발사 후 다음 발사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불랑기는 모포와 자포로 구성됐다. 지금 우리가 보는 건 모포다. 자포가 없다. 모포의 비어있는 공간에 포알과 화약이 들어간 자포를 넣고 쏜다. 자포만 갈아 넣으면 계속 사격할 수 있다. 물론 무한정 사격이 가능한 건 아니다.
불랑기? 이름이 이상해. 불랑기는 유럽에서 발명한 포다. 중국을 통해 조선에 도입됐다. 얼마 후 조
선은 이 포를 자체 생산하게 된다. 중국인들이 유럽인을 ‘프랑크’로 불렀다고 한다. 그들이 만든 포도 ‘프랑크’. 그 ‘프랑크’를 음역한 이름이 불랑기(佛狼機, 佛狼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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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봐도 좋은 소나무 숲길, 나지막한 언덕을 오른다. 오른쪽으로 열린 샛길로 가면 최근에 완공된 어재연 장군의 사당, 충장사(忠壯祠)를 볼 수 있다. 광성보 산책 나오시게 되면 들러 보시길.
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비(辛未洋擾殉國無名勇士碑) 앞이다. 1978년에 세웠다. 현대의 비이지만, 존재 가치가 있다. 이 나라 5천 년 역사를 지켜낸 이는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만이 아니다. 기꺼이 목숨 바쳐 싸운 무명의 용사들, 보통 백성들, 수많은 우리의 할아버지가 진정한 주인공이다.
바로 옆에 쌍충비각(雙忠碑閣). 비각 안에 비석 두 개가 나란히 섰다.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순절비와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이다. 1873년(고종 10)에 세웠다. 이곳에서 전사한 어재연·어재순 그리고 김현경, 박치성 등을 새겼다. 어재연·어재순 순절비에는 “형은 나라 위해 죽고, 아우는 형을 위해 죽으니[兄死於國 弟死於兄(형사어국 제사어형)]”라는 표현이 있다.
1871년(고종 8) 신미년, 미군 함대가 강화로 쳐들어왔다. 병인양요 겪고 5년 만에 조선은, 강화는, 다시 서양 군대의 침략을 받았다. 이때 고종은 어재연(1823~1871)을 강화 진무영 중군으로 임명하고 광성보로 가게 했다.
어느 날 광성보로 동생 어재순이 왔다. 고향에서 공부나 하고 있어야 할 동생이 나타나자 어재연은 깜짝 놀랐다. 왜 왔느냐, 물었더니 형과 함께 싸우러 왔다고 한다. 형은 동생을 타일러 보내려 했다. 너는 시골 선비일 뿐이다. 처지가 나와 다르니, 돌아가거라.
그러나 동생은 가지 않았다. “형님을 사지(死地)에 두고 저 혼자 사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그리고 나라 지키는데 신하와 백성을 구분해야 합니까.” 어재연은 동생을 돌려보내지 못했다. 결국, 형제는 함께 미군과 싸우다 함께 죽었다. 兄死於國 弟死於兄(형사어국 제사어형)! 아리다.
쌍충비각 아래 신미순의총, 전사한 조선군의 시신을 모신 묘소라고 한다. 연고가 확인되지 않은 병사들을 모신 것 같다. 신미순의총 지나면 바로 손돌목돈대다. 정갈하게 정비된 손돌목돈대, 그러나 그때 그날 여기는 아수라였다.
1871년 4월 23일(양력: 6월 10일), 미군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됐다. 초지진이다. 함락됐다. 전투다운 전투는 없었다. 미군은 상륙하기 전에 군함에서 초지진으로 대포를 쏘아댔다. 초지진 수비군은 미군의 함포사격에 밀려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4월 24일(양력: 6월 11일), 미군은 덕진진을 점령한다.
1871년 4월 24일(양력: 6월 11일) 그날, 어재연 부대는 여기 손돌목돈대 안에 있었다.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은 바로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배를 타고 이동한 게 아니다. 초지진에서 덕진진, 덕진진에서 광성보, 육로로 왔다. 여기서도 우선 포격 먼저. 곡사포를 쏘아댔다. 바다에선 함포사격이 계속됐다.
어재연 부대. 도망가지 않았다. 끔찍한 포격에도 돈대 안에서 견뎠다. 그럼 다 죽을 텐데? 사망자가 속출했지만, 그래도 꽤 많은 병사가 살아남았다. 돈대 가장자리에 깊은 참호를 파고 그 안에 몸을 숨긴 덕이었던 것 같다. 살아남았다 해도 포탄 파편에 몸들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포격이 끝나자 미군이 돈대로 짓쳐들어왔다. 포연 채 가시지 않은 돈대 안에서 조선군과 미군은 그렇게 처절한 백병전을 벌였다. 조선 병사들은 하나둘 쓰러져갔다. 다리를 다쳐 주저앉은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땅바닥 흙을 긁어 미군 눈에 뿌리고 눈 비비는 미군을 넘어뜨려 주먹을 날렸다. 움직이기조차 어렵게 된 조선 병사는 제 칼로 제 목을 찔렀다. 결국, 어재연 부대는 거의 다 전사했다. 여기 펄럭이던 수자기를 미군이 끌어내렸다.
미군이 승리했다. 그러나 그들은 환호하지 못했다. 이기고도 주눅 들었다. 처절하게 싸우는 조선군에게 질렸다. 때리는 사람이 오히려 맞는 사람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격이다.
1871년 4월 25일(양력: 6월 12일), 미군은 강화에서 철수한다. 정박지 물치도(작약도)로 가서 꽤 여러 날 머물다 그대로 돌아갔다. 군사 위협으로 일본을 개항시켰듯, 조선의 문도 열겠다는 목표로 강화도에 왔던 미군. 그들은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미군의 조선 원정은 실패였다.
손돌목돈대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간다. 오른쪽으로 손돌목포대가 있다. 상당히 낮은 위치다. 포대 이야기는 다음 장소인 덕진진에서 조금 하련다. 용두돈대로 가자. 54돈대 가운데 제일 마지막에 설치된 돈대다.
용두돈대에서 보니 물 건너 김포 땅이 아주 가깝다. 김포 땅 거기에는 덕포진이 있다. 바다 폭이 좁고 물길이 꺾이니 물살 셀 것은 당연하겠지. 이곳을 손돌목이라고 부른다. 흐르는 물소리가 아주 크다. 그 옛날 조선 병사의 절규처럼 들린다.
용두돈대 여장에 기대서서 어재연 장군을 떠올린다.
어재연 장군은 추앙받아 마땅하다. 그와 병사들의 항전은 가슴을 뛰게 한다. 그들의 죽음은 거룩하다. 그런데, 어재연의 군사 작전에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승정원일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경기감사 박영보가 고종에게 아뢴 말이다. “광성(廣城)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진무 중군이 새로 부임하여 미처 두서를 분별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적절한 평가는 아니지만, 어재연이 광성보를 지키던 기간이 길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날짜를 한번 따져보자. 어재연이 진무 중군의 직책을 받고 광성보로 온 날은 4월 16일(양력: 6월 3일)이다. 전사한 날은 4월 24일(양력: 6월 11일)이다. 광성보에 머물던 기간은 열흘이 채 안 된다. 주변 지형지물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변 상황을 잘 아는 부하 장수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듣고 수용해서 작전을 세웠다면 어땠을까? 《속수증보강도지》에 따르면, 진무영 천총 김현경이 어재연 장군에게 진을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건의했었다.
고립된 손돌목돈대는 위험하니 대모산으로 옮겨 가서 적을 맞자고 했다. 지금 덕진진 사거리 서쪽이 대모산이다. 그러나 어재연이 거절했다. 그러자 천총 김현경이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했다. 김현경, 그도 어재연과 함께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어재연이 광성보가 아니라 대모산에 진을 쳤다면 어땠을까?
강화문화원, 《江華文化》16,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