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史

참성단에서 별 제사를 올리다 참성단과 첨성대마니산 참성단이 가끔은 첨성단인지, 참성단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 아마 경주 첨성대와 기억이 섞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첨성대(瞻星臺)라는 한자는 ‘별을 보는 대’라는 뜻이에요. 이름 안에 천문대라는 의미가 담긴 셈입니다. 그런데요, 세종 임금이 백두산·한라산·마니산에 역관을 보내 북극성을 관측하게 했다는 기록이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입니다. 역관이 참성단에서 별을 살폈을 것입니다. 단군의 제천단으로만 알려진 참성단이 천문대 역할도 했던 셈이죠. 그러니, 깜빡, 참성단을 첨성단으로 불러도 뭐,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네요.  단군의 제천단참성단의 본질적 의미라고 할까요, 역사 속의 참성단으로 가보겠습니다. 일단 이름부터 정리해봅니다. 의외로 한자 표기가 다양합니다. 그 .. 더보기
강화도령 원범이의 첫사랑은 당신은 누구십니까“강화도령인가, 우두커니 앉아 있게?”속담집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는 일 없이 날만 보내는 사람을 비꼬아, “강화도령인가?” 이렇게 말한대요. 강화도령이 이원범이잖아요. 철종으로 즉위했으나, 무능하고 무기력해서 그저 멍때리며 세월을 보냈다는 인식이 속담에 담겼습니다. ‘강화도령’이라는 네 글자의 느낌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정겹게 여기고, 어떤 이는 냉소합니다. 두 느낌이 합해지기도 합니다. 제 첫 직장이 경남 마산의 어느 고등학교였습니다. 수십 명 교사 가운데 경기도 출신이 저 하나뿐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저를 이경수 선생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더 자주 불린 호칭이 “강화도령!”이었습니다. 부르는 이나 듣는 저나 ‘강화도령’은 그저 친근하고 정겨운 별명이었습니다. ‘강화도령’에.. 더보기
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 사도세자의 죽음쌀도 아닌데, 사람인데, 그것도 무려 세자였는데, 뒤주에 갇혔습니다. 때는 1762년(영조 38) 윤달 5월 13일. 양력으로는 7월 4일, 꽤 더울 때였습니다. 뒤주 속 세자는 목마름과 배고픔을 견디다 9일 만인 윤달 5월 21일에 죽고 맙니다. 향년 28세!그를 죽인 아버지 영조가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죽일 거라면, 사약 정도로 하지, 굳이 뒤주에…. 思는 생각할 사, 悼는 슬퍼할 도 자(字)입니다. 영조는 사도세자(1735~1762)가 왕이 되면 나라가 망할 거라고 했습니다.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사도세자가 정신병을 앓았다는 말도 있고, 반역을 꾀했다고도 전합니다. 소론 세력의 지지를 받는 사도세자를 노론 세력이 죽게 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현재의 권력과 .. 더보기
동검도가 검문하던 섬일까요? 동검도에 동검북돈대이 작은 섬에 처음 가본 게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수련회 같은 걸 거기서 했어요. 그땐 길상면 선두리에서 작은 나룻배를 타고 건너갔습니다. 맑고 맑은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전망 끝내주는 자리에 동검국민학교도 있었지요. 1986년에 선두리와 동검도를 잇는 연륙교가 놓였습니다. 오랜 세월, 사람 실어 나르던 나룻배가 그때 은퇴 당했습니다. 오가기 편해졌지요. 풍광 좋은 섬이라, 관광객이 점점 늘었습니다. 섬에 흐르던 ‘고즈넉’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폐교된 동검국민학교는 이제 건물조차 없습니다. 연륙교 덕에 사람은 편해졌지만, 건강하던 갯벌이 병들었습니다. 둑 쌓듯, 제방 형태로 만든 연륙교라서 갯벌이 서로 끊긴 겁니다. 강물이건, 바닷물이건, 물은 흘러야 하는 데 흐르지 못했습니.. 더보기
창덕궁에 규장각, 강화에 외규장각 더위가 무서워“내 평생 오늘이 제일 더운 것 같아.” 이 말을 열 번쯤 하고서야 8월의 끝을 봅니다. 더위도 더위지만, 끈적한 습기가 사람을 참 힘들게 했습니다. 더워도 습해도 할 일을 안 할 수 없는 법! 이번 호는 어떤 주제로 글을 쓰나, 고민합니다. 그래, 외규장각으로 하자. 결정하고 우선 고려궁지에 갔습니다. 오랜만에 외규장각 안에 들어가 봤어요. 중앙 자리 차지하고 있던 전시대를 치웠더군요. 좀 허전하다 싶다가, 아니, 외려 잘했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좁은 실내 공간에 전시대까지 있어서 여러 명이 관람하기에는 불편했거든요. 벽면에 설치한 자료만으로도 외규장각이 어떤 곳이고, 거기 보관하고 있던 의궤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규장각과 집현전 조선시대 임금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임금은.. 더보기
역사의 숲속, 전등사 옥등을 전하여 전등사, 한자로 傳燈寺라고 씁니다. 등(燈)을 전(傳)한 절이라는 뜻이 이름에 담겼네요. 전등사가 자리잡은 산은 정족산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정족산을 전등산으로도 불렀습니다. 전등사가 있는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처음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대요. 고려 충렬왕 때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옥등(玉燈)과 중국서 들여온 대장경 인쇄본을 시주해서, 절 이름을 전등사로 바꿨다고 합니다. ‘아, 정화궁주가 옥등을 전해줘서 전등사가 되었구나.’ 그렇습니다. 그런데요, 대장경도 등(燈)입니다. 법등(法燈)이라고 합니다. 자연의 어두움을 밝히는 게 옥등이라면, 인간의 어두움을 밝히는 게 법등이래요. 대장경을 시주해서 전등사라고 이름하였다! 이렇게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정말 전등사에 옥등이 있었을까.. 더보기
강화 항일의병과 진위대 일본의 노예가 되느니…여기 한 소년이 있습니다. 엄마가 너무 아파요. 쌀도 떨어졌고요. 소년은 물어물어 멀리 아버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하지만 거절당합니다. 아버지는 한 푼도 주지 않고 돌아가라고만 합니다. 아버지 아랫사람이 딱하게 여기고 몰래 돈을 주었습니다. 어머니 약값에 쓰고 쌀도 좀 사라고 했겠지요. ‘어휴, 이제는 엄마에게 약도 밥도 드릴 수 있겠구나.’ 소년의 안도는 잠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알았는지, 돈을 빼앗아버린 겁니다. 소년은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참 매정한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고 나서 뜨거운 눈물을 삼켰을 것입니다.  이 나쁜 아버지, 그이 이름이 연기우(延基羽)입니다. 강화 진위대 출신, 항일 의병장이에요. 어느 아비에게나 자식은 너무도 .. 더보기
참성단 소사나무 미스터리 마리산 참성단 소사나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단수(神壇樹)를 연상하게 한다. 참성단의 신비성을 더한다. 2009년에 천연기념물이 되었다. 사적 참성단 안에서 천연기념물 소사나무가 사는 것이다.  소사나무를 빼고 찍어봤다. 분위기가 다르다. 좀 삭막하기도 하다. 역시 참성단에 소사나무가 있어야 한다. 그저, 나무뿌리가 참성단 돌들을 무너지게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뿐.   산마루, 저 돌틈에서 기어이 살아내 우람한 기둥을 이룬 생명력.경외다. 수령을 150년으로 추정한다. 150년 전이면, 1870년대다. 그런데  1947년에 촬영한 사진 속에는 소사나무가 안 보인다. 그럼 이후 언젠가, 누군가 옮겨심은 것일까?궁금하다.  관련기사를 링크한다.   참성단 소사나무, 1947년엔 없었다천연기념물 강화 마.. 더보기
국가명 “조선” 단상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죽었다. 그날 일제는 칙령 제318호로 이렇게 선언했다. “한국의 국호를 고쳐 지금부터 조선이라 칭한다.” 식민지 백성들은 ‘조선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본말로 ‘조센징’이다. 조선이라는 두 글자에 생채기가 났다. ‘조선’은 단군 고조선에서 시작됐다. 애초 고조선 국호는 조선이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면서 위만조선과 구분하려고 ‘고’를 더해 고조선(古朝鮮)이라고 칭했다. 1392년에 이성계가 나라를 열었다. 다시 조선이다. 대중적으로 제일 익숙한 조선이다. 조선을 우러르는 이가 있고, 싫어하는 이도 있다. 미워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한 개인에게도 좋은 점과 아쉬운 부분이 다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나라임에랴.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미추가 갈린다. 분명한 것..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