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史 썸네일형 리스트형 거울도 안 보는 남자 사랑 찾아 헤매도는 쓸쓸한 여자가 있어요. 옷차림이 수수한 그녀는 거울도 안 보는 여자래요. 그녀는 왜 거울도 안 볼까요. 태진아는 답을 알겠죠.고려시대에 거울도 안 보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대몽항쟁기 강화도 조정에서 큰일을 했던 이규보(1168~1241)입니다. 길상면에 그의 묘소가 있지요. 술과 여자, 아니, 술과 거문고와 시를 아주 좋아해서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는 호를 쓰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거문고보다 가야금을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규보가 ‘거울 보지 않은 지 오래, 내 얼굴 어떤지 기억도 못해….’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처럼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꼭 그래야 할 일이 있었나 봐요. 거울이 뿌연 게 흐릿합니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묻습니다. “왜 그런 거울로 보십니까.. 더보기 일본 지배세력을 생각함 나라마다 우선 가치를 국익에 둡니다. 국제 관계는 의리, 인정, 이런 단어로 설명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상대국이 국익의 방향과 가치를 어디에 두는가에 맞춰 그 나라와의 관계를 풀어가야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일본 지배층이 인식하는 국익은 군국주의적 팽창이라는 야욕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청나라를 꺾고, 러시아마저 무너트리고, 대한제국을 차지하고, 미국까지 위협했던 ‘영광’을 재현하고 싶은 속내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큰 죄를 영광으로 여기는 자체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명징한 역사를 숨기고 부정하고 조작합니다. 전쟁 가해자임에도 외려 가련한 피해자를 자처합니다. 젊은 세대에게 그렇게 가르칩니다. 이웃사촌이 되어야 .. 더보기 병인양요, 하필 강화에서 서양에 맞서다 1863년, 고종의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철종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일찍 죽어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들(고종)이 왕위를 이었다고 말해집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철종은 아들 다섯에 딸 여섯을 두었습니다. 자식이 모두 11명입니다. 그런데 전부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아요. 그래서 고종이 즉위하게 된 것입니다. 즉위 당시 고종 나이가 12살. 너무 어려서 아버지 이하응이 사실상의 왕 역할을 하게 됩니다. 고종 3년 병인년, 1866년에 프랑스가 조선을 침공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병인양요(丙寅洋擾)라고 부릅니다. “뭘 찾아 먹겠다고 그 먼 프랑스에서 조선까지 쳐들어오고 그랬시꺄?”프랑스군이 유럽 땅 프랑스에서 조선으로 온 게 아니고요, 가까운 중국에서 왔습니다. 중국에 프랑스 함대가 주둔.. 더보기 [스크랩]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첫 상설 전시 14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에 꾸려진 ‘외규장각 의궤실’에서 직원들이 전시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강화도 외규장각을 떠난 지 145년 만인 2011년 고국으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를 15일부터 이곳에서 처음으로 상설 전시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두 차례 특별전만 있었다. 병자호란 후 종묘 신주를 새로 만들고 고친 일을 기록한 유일본 의궤 ‘종묘수리도감의궤’를 시작으로 한 번에 8책씩 1년에 4번 교체해 연간 32책이 공개될 예정이다.〈서울신문〉 2024-11-15 도준석 전문기자 더보기 철종 이원범은 어떤 임금일까 농사꾼 출신 임금님? 철종의 아버지 이광은 강화에서 위리안치 상태였습니다.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감금 생활이었던 것이죠. 반면에 이원범은 비교적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강화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들으면서 백성들 삶을 알게 됩니다. 즉위하면서 이시원을 개성유수로 삼습니다. 강화에 있을 때 주민들로부터 이시원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듣고 기억했던 것입니다. 이시원은 철종 조정에서 요직을 맡으며 활동하게 됩니다. 유배 시절 원범은 나무꾼이 아니었을 겁니다. 물론 농사꾼도 아니고요. 그런 거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 갇혀 지내던 아버지 이광도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먹을거리와 땔감을 공급받았으니까요. 이원범 가족은 생활비로 매달 50.. 더보기 안중근 친필 유묵, '獨立' 등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 간수였던 시타라 마사오에게 써 준 친필 휘호.일본 류코쿠 도서관 소장.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중. (2024.10.24~2025. 3.31) 사진 및 소식 출처 : 〈서울신문〉, 묵으로 외친 안중근의 ‘독립’ 열망, 2024.10.24. 이순녀 기자 더보기 이제, ‘문화재’가 아니라 ‘문화유산’입니다 우리는 오래도록 ‘문화재’라는 말을 듣고 쓰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문화재라는 호칭이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줄곧 있었습니다. 한자로 ‘文化財’라고 씁니다. 재(財) 자는 재물, 재산, 돈의 의미입니다. 선조들이 남긴 유물과 유적 등을 돈의 가치로 평가하는 듯한 의미가 문화재라는 용어 속에 배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문화재’라는 말도 따져보면,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인간을 문화재로 칭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 겁니다. 결국, 바뀌었습니다. 2024년 5월 17일부터 공식적으로 ‘문화재’ 대신 ‘국가유산’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화재청의 명칭이 국가유산청으로 변경되었고, 강화군청 문화재과도 국가유산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국가유산은 다시 문화유산·자연유산·무형유산으로 세분됩니다. 보물인 강화 전등.. 더보기 참성단에서 별 제사를 올리다 참성단과 첨성대마니산 참성단이 가끔은 첨성단인지, 참성단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 아마 경주 첨성대와 기억이 섞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첨성대(瞻星臺)라는 한자는 ‘별을 보는 대’라는 뜻이에요. 이름 안에 천문대라는 의미가 담긴 셈입니다. 그런데요, 세종 임금이 백두산·한라산·마니산에 역관을 보내 북극성을 관측하게 했다는 기록이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입니다. 역관이 참성단에서 별을 살폈을 것입니다. 단군의 제천단으로만 알려진 참성단이 천문대 역할도 했던 셈이죠. 그러니, 깜빡, 참성단을 첨성단으로 불러도 뭐,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네요. 단군의 제천단참성단의 본질적 의미라고 할까요, 역사 속의 참성단으로 가보겠습니다. 일단 이름부터 정리해봅니다. 의외로 한자 표기가 다양합니다. 그 .. 더보기 강화도령 원범이의 첫사랑은 당신은 누구십니까“강화도령인가, 우두커니 앉아 있게?”속담집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는 일 없이 날만 보내는 사람을 비꼬아, “강화도령인가?” 이렇게 말한대요. 강화도령이 이원범이잖아요. 철종으로 즉위했으나, 무능하고 무기력해서 그저 멍때리며 세월을 보냈다는 인식이 속담에 담겼습니다. ‘강화도령’이라는 네 글자의 느낌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정겹게 여기고, 어떤 이는 냉소합니다. 두 느낌이 합해지기도 합니다. 제 첫 직장이 경남 마산의 어느 고등학교였습니다. 수십 명 교사 가운데 경기도 출신이 저 하나뿐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저를 이경수 선생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더 자주 불린 호칭이 “강화도령!”이었습니다. 부르는 이나 듣는 저나 ‘강화도령’은 그저 친근하고 정겨운 별명이었습니다. ‘강화도령’에.. 더보기 이전 1 2 3 4 5 6 7 ··· 1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