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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스크랩]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첫 상설 전시 14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에 꾸려진 ‘외규장각 의궤실’에서 직원들이 전시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강화도 외규장각을 떠난 지 145년 만인 2011년 고국으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를 15일부터 이곳에서 처음으로 상설 전시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두 차례 특별전만 있었다. 병자호란 후 종묘 신주를 새로 만들고 고친 일을 기록한 유일본 의궤 ‘종묘수리도감의궤’를 시작으로 한 번에 8책씩 1년에 4번 교체해 연간 32책이 공개될 예정이다.〈서울신문〉 2024-11-15 도준석 전문기자 더보기
철종 이원범은 어떤 임금일까 농사꾼 출신 임금님? 철종의 아버지 이광은 강화에서 위리안치 상태였습니다.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감금 생활이었던 것이죠. 반면에 이원범은 비교적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강화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들으면서 백성들 삶을 알게 됩니다. 즉위하면서 이시원을 개성유수로 삼습니다. 강화에 있을 때 주민들로부터 이시원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듣고 기억했던 것입니다. 이시원은 철종 조정에서 요직을 맡으며 활동하게 됩니다. 유배 시절 원범은 나무꾼이 아니었을 겁니다. 물론 농사꾼도 아니고요. 그런 거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 갇혀 지내던 아버지 이광도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먹을거리와 땔감을 공급받았으니까요. 이원범 가족은 생활비로 매달 50.. 더보기
안중근 친필 유묵, '獨立' 등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 간수였던 시타라 마사오에게 써 준 친필 휘호.일본 류코쿠 도서관 소장.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중. (2024.10.24~2025. 3.31) 사진 및 소식 출처 : 〈서울신문〉, 묵으로 외친 안중근의 ‘독립’ 열망, 2024.10.24. 이순녀 기자 [단독]‘긴 탄식 한마디로 일본을 먼저 弔喪’…안중근 유묵, 115년 만에 고국 품으로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1879∼1910)가 사형을 앞두고 옥중에서 쓴 유묵 ‘장탄일성 선조일본’(長歎一聲 先吊日本)이 최근 고국으로 돌아왔다. 1910년 3월 안 의사가 중국 뤼순형무소에서 일본인www.donga.com 더보기
이제, ‘문화재’가 아니라 ‘문화유산’입니다 우리는 오래도록 ‘문화재’라는 말을 듣고 쓰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문화재라는 호칭이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줄곧 있었습니다. 한자로 ‘文化財’라고 씁니다. 재(財) 자는 재물, 재산, 돈의 의미입니다. 선조들이 남긴 유물과 유적 등을 돈의 가치로 평가하는 듯한 의미가 문화재라는 용어 속에 배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문화재’라는 말도 따져보면,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인간을 문화재로 칭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 겁니다. 결국, 바뀌었습니다. 2024년 5월 17일부터 공식적으로 ‘문화재’ 대신 ‘국가유산’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화재청의 명칭이 국가유산청으로 변경되었고, 강화군청 문화재과도 국가유산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국가유산은 다시 문화유산·자연유산·무형유산으로 세분됩니다. 보물인 강화 전등.. 더보기
참성단에서 별 제사를 올리다 참성단과 첨성대마니산 참성단이 가끔은 첨성단인지, 참성단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 아마 경주 첨성대와 기억이 섞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첨성대(瞻星臺)라는 한자는 ‘별을 보는 대’라는 뜻이에요. 이름 안에 천문대라는 의미가 담긴 셈입니다. 그런데요, 세종 임금이 백두산·한라산·마니산에 역관을 보내 북극성을 관측하게 했다는 기록이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입니다. 역관이 참성단에서 별을 살폈을 것입니다. 단군의 제천단으로만 알려진 참성단이 천문대 역할도 했던 셈이죠. 그러니, 깜빡, 참성단을 첨성단으로 불러도 뭐,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네요.  단군의 제천단참성단의 본질적 의미라고 할까요, 역사 속의 참성단으로 가보겠습니다. 일단 이름부터 정리해봅니다. 의외로 한자 표기가 다양합니다. 그 .. 더보기
강화도령 원범이의 첫사랑은 당신은 누구십니까“강화도령인가, 우두커니 앉아 있게?”속담집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는 일 없이 날만 보내는 사람을 비꼬아, “강화도령인가?” 이렇게 말한대요. 강화도령이 이원범이잖아요. 철종으로 즉위했으나, 무능하고 무기력해서 그저 멍때리며 세월을 보냈다는 인식이 속담에 담겼습니다. ‘강화도령’이라는 네 글자의 느낌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정겹게 여기고, 어떤 이는 냉소합니다. 두 느낌이 합해지기도 합니다. 제 첫 직장이 경남 마산의 어느 고등학교였습니다. 수십 명 교사 가운데 경기도 출신이 저 하나뿐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저를 이경수 선생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더 자주 불린 호칭이 “강화도령!”이었습니다. 부르는 이나 듣는 저나 ‘강화도령’은 그저 친근하고 정겨운 별명이었습니다. ‘강화도령’에.. 더보기
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 사도세자의 죽음쌀도 아닌데, 사람인데, 그것도 무려 세자였는데, 뒤주에 갇혔습니다. 때는 1762년(영조 38) 윤달 5월 13일. 양력으로는 7월 4일, 꽤 더울 때였습니다. 뒤주 속 세자는 목마름과 배고픔을 견디다 9일 만인 윤달 5월 21일에 죽고 맙니다. 향년 28세!그를 죽인 아버지 영조가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죽일 거라면, 사약 정도로 하지, 굳이 뒤주에…. 思는 생각할 사, 悼는 슬퍼할 도 자(字)입니다. 영조는 사도세자(1735~1762)가 왕이 되면 나라가 망할 거라고 했습니다.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사도세자가 정신병을 앓았다는 말도 있고, 반역을 꾀했다고도 전합니다. 소론 세력의 지지를 받는 사도세자를 노론 세력이 죽게 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현재의 권력과 .. 더보기
동검도가 검문하던 섬일까요? 동검도에 동검북돈대이 작은 섬에 처음 가본 게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수련회 같은 걸 거기서 했어요. 그땐 길상면 선두리에서 작은 나룻배를 타고 건너갔습니다. 맑고 맑은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전망 끝내주는 자리에 동검국민학교도 있었지요. 1986년에 선두리와 동검도를 잇는 연륙교가 놓였습니다. 오랜 세월, 사람 실어 나르던 나룻배가 그때 은퇴 당했습니다. 오가기 편해졌지요. 풍광 좋은 섬이라, 관광객이 점점 늘었습니다. 섬에 흐르던 ‘고즈넉’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폐교된 동검국민학교는 이제 건물조차 없습니다. 연륙교 덕에 사람은 편해졌지만, 건강하던 갯벌이 병들었습니다. 둑 쌓듯, 제방 형태로 만든 연륙교라서 갯벌이 서로 끊긴 겁니다. 강물이건, 바닷물이건, 물은 흘러야 하는 데 흐르지 못했습니.. 더보기
창덕궁에 규장각, 강화에 외규장각 더위가 무서워“내 평생 오늘이 제일 더운 것 같아.” 이 말을 열 번쯤 하고서야 8월의 끝을 봅니다. 더위도 더위지만, 끈적한 습기가 사람을 참 힘들게 했습니다. 더워도 습해도 할 일을 안 할 수 없는 법! 이번 호는 어떤 주제로 글을 쓰나, 고민합니다. 그래, 외규장각으로 하자. 결정하고 우선 고려궁지에 갔습니다. 오랜만에 외규장각 안에 들어가 봤어요. 중앙 자리 차지하고 있던 전시대를 치웠더군요. 좀 허전하다 싶다가, 아니, 외려 잘했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좁은 실내 공간에 전시대까지 있어서 여러 명이 관람하기에는 불편했거든요. 벽면에 설치한 자료만으로도 외규장각이 어떤 곳이고, 거기 보관하고 있던 의궤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규장각과 집현전 조선시대 임금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임금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