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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위리안치, 천극안치, 가극안치 ‘안치’의 의미를 따져보자.안치(安置)라는 한자 자체는 안전하게 둔다는 뜻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유배라는 의미로 쓰인다. 유배 자체를 뜻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유배 형벌의 하나로 ‘○○안치’로 쓰여서 ‘감금’을 뜻하기도 한다. 위리안치(圍籬安置)가 대표적이다. 죄인이 유배 사는 집에 울타리를 두르고 문밖출입을 금하는 것이다. 외부인의 접근도 불가하다.  천극안치(栫棘安置), 가극안치(加棘安置)도 있다. 위리안치보다 천극안치가, 천극안치보다 가극안치가 이론상 더 무거운 형벌이다. 천극안치는 죄인이 갇힌 집에 이중으로 가시울타리를 치는 것이다. 가극안치는 천극안치보다 더 겹겹이 가시울타리를 치는 정도인 것 같다. 실제 적용은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위리안치와 천극안치·가극안치는 사실상 거기서 .. 더보기
강화 충렬사를 알아봅시다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1871년(고종 8), 흥선 대원군이 명령했습니다. “영원히 높이 받들어야 할 47개 서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서원들은 모두 제사를 그만두게 하고 현판을 떼어내도록 하라.”이게 바로 흥선 대원군의 업적 중 하나로 말해지는 ‘서원 철폐’입니다. 당시 전국에 있던 서원이 600여 개라고도 하고 1,000개가 넘었다고도 합니다. 정확히 몇 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엄청나게 많은 전국의 서원이 사라지고 딱 47개만 살아남았습니다. 서원은 기본적으로 교육기관입니다. 그런데 점점 조선사회의 암적인 존재가 되어 갔습니다. 교육 기능은 부실해지고, 정치 싸움의 지방 거점 역할을 하는가 하면, 힘없는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재산을 늘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세금 납부는 회피해서 국가.. 더보기
교동도 역사 산책④-교동읍성 읍성(邑城)이라, 읍성. 읍을 둘러쌓은 성!오늘날 읍·면의 ‘읍’과 조선시대 ‘읍’은 쓰임이 좀 다르답니다. 조선시대의 ‘읍’은 한양을 제외한 전국 행정구역을 아우르는 용어로 쓰였습니다. 현, 군, 도호부, 목, 대도호부, 부. 모두 개개의 읍으로 칭했습니다. 현도 읍이고, 군도 읍이고 도호부도 읍이라는 얘기죠. 그래서 한양에는 도성이 있고 지방에는 읍성이 있던 것입니다. ‘읍치(邑治)’라는 말도 여기서 나온 것이고요. 조선시대 모든 읍이 읍성을 갖추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330곳 내외의 전국 행정구역 가운데 19세기 기준으로 123개의 읍성이 있었습니다. 하삼도 그러니까 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 특히 많았답니다. 경기지역은 의외로 적어서 강화·교동·개성·수원 이렇게 네 곳에만 읍성이 있었다고 해요. 경.. 더보기
교동도 역사 산책③-교동향교 좋습니다. 교동향교 들어가는 길이 좁아서 불편했습니다. 주차 공간도 마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닙니다. 진입로를 넓게 열었고 주차장도 시원하게 닦아 놨습니다. 길목에 모셨던 옛 비석들은 향교 홍살문 옆으로 모두 옮겨 모셨습니다.홍살문에서 외삼문 가는 길, 적당한 거리감도 좋습니다.  외삼문 밀고 들어갑니다. 다른 향교에 가면 그냥 좀 위축되는 느낌이에요. 권위적인 공기가 흐른다는 선입감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교동향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골 외할머니댁 대문 밀고 들어서는 느낌. 교동향교에 처음 오시는 분은 외삼문 들어가다가 잠시 놀랄 수 있습니다. 코앞에 건물이 확 나타나서 말이죠. 명륜당인데 외삼문과 거의 붙어있습니다. 앞마당이 아예 없는 겁니다. 향교 지을 때 땅이 부족해서 이렇게 .. 더보기
교동도 역사 산책②-대룡시장 궂은 비 내리는 날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짙은 색소폰 소리를 들어보렴새빨간 립스틱에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내 가슴이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언제 들어도 좋습니다. 가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도 인기를 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금방 식는 것 같아요. 노래의 오랜 생명력은 귀로 들어오는 가사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아, 내 얘기 같아’ 공감하면서 시 낭송 듣듯 노래를 들으며 또 들으며 나이를 쌓아갑니다. 저도 옛날에 읍내 별다방에서, 성다방에서, 아가씨에게 실없이 농담 던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최백호는 이 노래 만든 사.. 더보기
교동도 역사 산책①-연산군 유배지 언젠가 강화역사박물관에 갔을 때였어요. 강화에서 출토된 항아리 모양의 유물을 보았습니다. 고대시대에 제작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표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 거예요. ‘뭐라고 쓴 거냐, 보자.’ 高, 木, 根, 縣. 아! 교동(喬桐)의 옛 이름 고목근현(高木根縣)입니다. 책이 아니라 항아리에 새긴 거라서 더 반가웠습니다.  고구려 때 교동을 고목근현으로 불렀고요, 통일신라 시기부터 교동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강화(江華)라는 지명은 고려 때 처음 쓰게 됐으니까, ‘강화’보다 ‘교동’이라는 지명이 먼저 나온 겁니다. 교동의 또 다른 이름으로 ‘대운도’, ‘고림’, ‘달을참’이 전해집니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는 말이 있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래 누워있다보면 다시 일어나고 싶어.. 더보기
수자기(帥字旗)가 간대요, 글쎄 2018년 10월이었어요. 그때 제주도에서 해군 국제 관함식이 열렸습니다. 대통령이 탄 우리 구축함에 수자기를 높이 내걸었습니다. 이를 본 일본 방송에서 한국을 비난했습니다. 이웃 나라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이죠. 일본 사람들이 수자기를 보고 발끈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이순신 장군을 연상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은 역사를 아는 일본인들에게 어쩔 수 없는 열등감의 대상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배에 수자기가 걸렸던 것을 그들이 압니다. 그래서 수자기를 이순신장군기(李舜臣將軍旗)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수자기(帥字旗)는 이순신 장군만 썼던 게 아닙니다. 조선시대 각 군영에 걸었던 대장기입니다.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조선후기에 상당히 많았던 수자기가 어인 .. 더보기
거란의 침략과 서희의 외교 담판 《고려사》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거란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낙타 50필을 보냈다. 왕은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 계속 화목하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켰으니, 이는 매우 무도(無道)하여 친선 관계를 맺을 이웃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교류를 끊고 사신 30인을 섬으로 유배 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매어두니 모두 굶어 죽었다.  태조 왕건 때인 942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거란(契丹)’은 종족의 명칭이면서 나라 이름이기도 해요. 왕건 재위기에 이미 거란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고려와 잘 지내자며 낙타를 선물했는데, 왕건이 굶겨 죽이고 사신들을 섬으로 유배 보냈습니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거란을 향한 고려의 시선이 곱지 않았음을 알 수.. 더보기
언제인지 모호한 ‘구한말’ 굳이 써야 할까 “그렇죠, 구한말에 그런 일이 있었죠.” 강의 중에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구한말’(舊韓末)을 쓰지 말아야겠다고 맘먹은 지 꽤 오랜데, 또 불쑥 튀어나왔다. 습관을 고치기가 참 어렵다.  ‘나말여초’ ‘여말선초’처럼 구한말도 특정 시기를 구분하는 용어로 널리 쓰인다. 하지만 말뜻과 실제 쓰임에 괴리가 크고,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가리키는지 규정되지 않아서 혼란스럽다. 특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힘들어한다. 국어사전은 구한말을 ‘대한제국의 시기’라고 풀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부터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1910년까지 14년 동안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명쾌해 보이지만, 바른 풀이라고 할 수 없다. ‘말’(末)을 못 본 체하면서 구한말을 ‘구한국’과 똑같은 의미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구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