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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강화외성을 소개합니다 강화도에 대한 믿음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강도(江都)를 내가 다 봤는데 지세와 형편은 강도가 가장 뛰어났다. 옛날에 김경징으로 인해 제대로 지키지는 못했지만, 이는 실로 김경징의 죄이지 어찌 지리 때문이겠는가.” 영조 임금이 한 말인데요, 《승정원일기》에 나옵니다. 병자호란 때 강화가 청군에게 함락된 것은 김경징 등 지키는 이들의 잘못 때문이지 강화의 지형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강화가 외적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는 믿음을 여전히 갖고 있던 영조입니다. 앞의 임금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봉림대군 시절 강화에서 직접 병자호란을 겪었던 효종도 영조와 같은 생각이었지요. 효종은 강화도를 더욱 안전하게 지키려고 해안에 군사시설을 설치합니다. 월곶진, 초지진 등이에요. 강화에 진·보가 설치되기.. 더보기
성종의 세자 교육을 살펴보며 성종의 선택은?“세자가 어린데도 날마다 서연에 나와 빡빡한 공부 일정 따라가느라 지친 것 같습니다. 적절히 여가를 주어서 몸과 마음을 휴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조선시대, 임금의 공식적인 공부를 경연(經筵)이라고 하고, 세자의 공부를 서연(書筵)이라고 합니다. 지금 세자 나이 겨우 8살입니다. 서연 일정이 너무 빡빡합니다. 김수광이라는 신하가 성종에게 세자를 적절히 쉬게 해주자고 청했습니다. 성종이 다른 신하들의 생각은 어떤지 물었습니다. 김종직이 대답합니다. “공부를 잠시라도 그치게 되면 태만함에 익숙해지는 법입니다. 신은 김수광의 생각이 그르다고 생각합니다.”노는 맛을 들이게 되면 공부를 안 하게 되니 쉼 없이 시켜서 공부 습관을 잡아줘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자 김수광은 김종직의 말을.. 더보기
강화도 진·보·돈대 지도 『강화도史』 (역사공간 출판사)  /  원자료 :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 더보기
[스크랩] 한국 가톨릭, 병인양요 첨병 노릇 참회(1997) 1866년 9월 18일 중국 천진을 떠나 강화도로 향하던 프랑스 함대에는 프랑스 신부 1명과 조선인 천주교 신자 3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조선 침략 함대를 인도하고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의 머리 속에는 군사적 침략이 야기할 참상보다 대원군의 종교 박해에 보복하겠다는 생각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해 2월부터 시작된 병인박해에서 프랑스 주교 2명과 신부 7명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인 신자가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7척의 프랑스 극동함대에 탑승한 리델 신부와 최선일·최인서·심순녀 등 조선인 신자들은 물길 안내인과 통역관으로서 함대를 이끌었다. 종교 박해를 이유로 유럽 제국주의 세력을 앞장서서 이 땅에 끌어들인 셈이다. 프랑스가 강화도 침략을 감행한 지 1백31년 만에, 침략의 첨병 노릇을 했던 한국 가톨릭이.. 더보기
광해군 폐위되던 날 《속잡록》에 명나라 장수 조도사(趙都司)가 한양에 와서 지은 시가 나온다. 《대동야승》과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광해군 말년인 1622년(광해군 14) 2월 3일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조도사는 실록에 나오는 조유격인 것 같다. 유격(遊擊, 관직명) 조우(趙佑)이다. 다음은 조도사가 지은 시이다.  맑은 향 맛난 술은 천 사람의 피요 / 淸香旨酒千人血가늘게 썬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고혈일세 / 細切珍羞萬姓膏촛불 눈물 떨어질 때 사람 눈물 떨어지고 / 燭淚落時人淚落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성도 드높구나 / 歌聲高處怨聲高 《속잡록》은 이 시를 “광해군 시대에 정사가 어지럽고 백성이 곤궁함을 지적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어디 광해군 시대뿐이랴. 어디 조선시대뿐이랴. 가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금.. 더보기
진무영이 뭐예요?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선조 26), 선조가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명합니다. “적의 난리를 겪는 2년 동안 군사 한 명 훈련 시키거나 기계 하나 수리한 것 없이, 명나라 군대만을 바라보며 적이 제 발로 물러가기만을 기다렸으니 불가하지 않겠는가.…이렇게 세월만 보내면서 망할 때를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내 생각에 따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합당한 인원을 차출해서 장정을 뽑아 날마다 활을 익히기도 하고 포를 쏘기도 하여 모든 무예를 닦도록 하고 싶으니, 의논하여 처리하라.”이리하여 훈련도감이 창설되었습니다. 이후 인조 재위기에 총융청, 어영청, 수어청이, 숙종 때 금위영이 들어서면서 중앙군영 5군영 체제가 성립됩니다. 5군영 가운데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이 도성 수비를 맡아 삼군문으로 불리.. 더보기
장가간다는 말의 숨은 의미는 고려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유산 상속을 하지 않고 돌아가신 모양이다. 자식들이 모여서 아버지가 남긴 재산을 나누는데, 문제는 노비였다. 노비도 재산으로 취급되던 시대다. 건강한 노비, 병약한 노비, 젊은 노비, 늙은 노비. 공평하게 나누기가 어렵다. 누군들 병약하고 나이 많은 노비를 택하고 싶겠는가. 아들, 딸들이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다. 드디어 방법을 찾았다. 어떤 방법?제비뽑기였다. 자식들은 제비뽑기로 노비들을 분배했다. 딸도 노비를 받았다고? 그렇다. 고려시대에는 유산 상속에 딸, 아들 차별이 없었다(이 과정에서 노비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고통을 겪기도 했을 것이다). 아버지 제사도 아들, 딸이 같이 모셨다. 만약 아들 없이 딸만 있다면? 당연히 딸들이 제사를 지냈다. “장가.. 더보기
강화 역사와 강화문학관 다시, 봄입니다꽃이 피었다고 봄이 아닙니다. 저에게 봄날은 내복 벗은 날, 비로소 시작됩니다. 이제 벗었으니 진짜 봄입니다. 봄맞이 관광객이 강화로 많이들 들어옵니다. 그래서 휴일이면 교통 체증이 심해집니다. 어디 좀 가려면 차가 막혀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그럼, 운전대 잡고 혼잣말하게 되죠. “뭘 볼 게 있다고 이렇게들 내려오나.” 우리 눈엔 볼 게 없을 수 있습니다. 너무 익숙한 일상의 환경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외지에서 강화를 찾는 이들에겐 산, 바다, 갯벌이 다 멋진 볼거리입니다. 설사 볼거리가 없다 해도 여전히 강화는 매력적인 여행지입니다. 서울도 아니고, 김포 장기동 사는 친구가 그러더군요. “강화대교 건너는 순간 코가 뻥 뚫려.” 진짜 그러냐, 기분에 그런 거 아니냐? 물어봤더니 진짜라.. 더보기
고려궁지와 강화유수부 명위헌과 이아1231년(고종 18), 몽골의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됩니다. 다음 해인 1232년(고종 19)에 고려 조정은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깁니다. 6월 17일에 강화 궁궐 공사가 시작됩니다. 고종이 개경을 떠난 날은 7월 6일, 강화에 도착한 날은 7월 7일입니다. 궁궐 조영이 시작된 지 스무날 정도밖에 안 됐을 때입니다. 당연히, 궁궐이, 없습니다. 임금 고종은 어디로 가야 하나. 객관(客館)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강화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궁궐이 제대로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은 1234년(고종 21)쯤이었습니다. 새로운 도읍, 강화도에 새로운 궁궐이 들어선 것입니다. 지금, 고려궁궐은 없고요, 궁궐터만 전합니다. 우리는 이곳을 고려궁지(高麗宮址)라고 부릅니다. 고려궁지 계단 올라 ‘昇平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