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고려 대몽항쟁을 다룬 책을 준비할 때였다. 전국의 이름난 항쟁지를 거의 다 답사했다. 전라남도 장성군 입암산성에 갔을 때다. 얼추 시간 따져보니 해가 지기 전에 산성 돌아보고 사진 찍고 내려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차하고 바로 입산 시작. 점점 오가는 등산객이 줄어들었다. 깊이 들어갔다. 사람이 없다. 길을 잃었다. 아직 해질 시간이 아닌데 어둡다? 그때야 내가 선글라스를 쓰고 있음을 알았다. 벗으니 환하긴 한데 앞이 안 보였다. 시력이 지독히 나쁘니 당연한 일. 차에서 내릴 때 선글라스 벗고 안경을 쓰고 왔어야 했다. 벗을 수도 쓸 수도 없는 상황.
사위가 컴컴해지고 우두망찰 주저앉은 나는 울고 싶었다. 목이 말랐지만, 물병도 없이 왔다. 나무뿌리에 채고 돌부리에 채면서 겨우겨우 내려왔다. 심청이 아부지가 그랬듯, 긴 나뭇가지 하나 주워 땅을 짚으며 그렇게 주차장에 도착. 산신령님 고맙습니다.
처음 산성으로 향할 때 진중해야 했다. 안내판도 살피며 길을 제대로 찾아야 했다. 반성했다. 높든 낮든 산에 들 때는 겸손하자. 덜렁대지 말자, 건방 떨지 말자. 이후 나는 산에 갈 때만큼은 겸손하려고 애쓴다.
오랜만에 강화 남산(222.5m)에 간다. 집 뒤 북산(140m)은 자주 가는 편인데 남산은 잘 안 가진다.강화산성 서문이나 남문에서 올라가면 되는데 나는 남문 길을 택했다. 여기가 덜 힘드니까.^^
강화산성은 읍내를 빙 둘렀다. 남산에서 북산으로 이어진다. 대략 7㎞이다.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이 있다. 동문·서문·남문·북문, 지금도 주민들 드나드는 보행로이다. 여전히 살아있다. 서울의 남대문, 동대문처럼 고립된 ‘섬’이 아니다. 문은 열려야 문이다. 닫혀만 있으면 담이다. 벽이다.
남문이다. 운동화 끈 조여 매고 겸손하게 출발. 밟고 오르는 등산로가 바로 산성이다. 여장은 일부에만 복원됐다. 산성 가까이 있는 나무들을 모두 베어냈다. 깨끗해 보이기는 하는데 좀 허전하다. 그늘이 없어 햇빛 강할 땐 부담스럽다. 숨이 가빠질수록 전망도 좋아진다. 한 시간 이상 달려야 할 인천 땅인데 여기서 보니 참 가깝다.
정상, 날렵한 건물이 우뚝하다. 남장대이다. 강화산성 완공하고 50여 년 뒤인 1769년(영조 45)에 지었다. 지금 건물은 2010년에 복원한 것이다. 장수가 여기 남장대에서 군사 훈련을 지휘했다고 한다. 북산에는 북장대가 있었는데 지금 터만 다져 놓았다.
강화산성은 1709년(숙종 35)에 쌓기 시작해서 1711년(숙종 37)에 완성됐다. 우여곡절을 겪었다. 조정에 반대 의견도 많았다. 불과 몇 년 전 대기근을 겪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백성이 굶어 죽었다. 대규모 축성공사를 벌일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산성 공사가 추진됐다. 그만큼 절실했다. 강화도는 외침시 최후의 항쟁 거점이었다.
백성에게 가급적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공사를 진행했다. 성을 쌓게 되면 주변 많은 묘가 훼손되게 된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묘 이장 비용을 지급했다. 강화산성 축성을 주도한 이는 강화유수 민진원이었다. 열정적으로 매달려 끝내 이루어냈다. 그가 없었다면 강화산성도 없었을 것이다. 숙종의 여인, 하면 누가 떠오르시는지? 장희빈! 또 한 사람, 인현왕후! 민진원은 인현왕후의 친오빠다.
엉덩이 툭툭 털고 일어난다. 이제 내려간다. 온 길로 다시 내려가면 심심하니까 서문 쪽으로 내려가련다. 산은 내려갈 때가 더 위험한 법, 겸손하게 전진. 조금 가면 성벽 속에 뚫려 있는 사각형 모양의 조그만 문이 있다. 이런 문을 암문이라고 한다. 적의 눈에 띄지 않게 우리끼리만 비밀히 드나들려고 만드는 문이다. 강화산성에 암문이 몇 개 있었는데 남은 건 이 문 하나다.
가파른 내리막길 내려와 서문에 이른다. 서문 성벽 안뜰이 연무당 옛터이다. 서문 돌아보고 이어지는 옛 성벽도 잠시 살펴보자. 큰 돌은 큰 돌대로 작은 돌은 또 작은 것대로 무심히 쌓아 올린 듯해도 빈틈이 없다. 새로 복원한 성벽과 옛것 그대로의 성벽의 차이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다.
내친김에 북산으로 향한다. 곳곳 세월이 밀어낸 성돌들이 누웠다. 봄에는 꽃다지가 곱게 깨어난다. 여전히 견고한 옛 산성 그대로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이 무거운 돌 올려다 쌓기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돌 하나하나에 쌓던 이들의 눈물이 얼룩진 것 같다. 이걸 이렇게 밟고 다니는 게 당연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강화산성이 고려시대 대몽항쟁기에 쌓은 거라는 이야기가 떠돈다. 고려시대 산성이 아니다. 고려시대에는 읍내 쪽에 지금보다 훨씬 작은 성이 있었다.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다. 조선시대 강화산성과 별개다. 다만, 지금 걷고 있는 강화산성 북문 구간은 고려시대 토성 쌓았던 그 자리와 겹칠 것이다.
강화문화원, 《江華文化》 제15호(2021)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