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시기에 청와대에서 일한 이정우의 〈참여정부 천일야화〉가 한겨레에 연재되고 있다. 60화 에필로그(2024.04.02.)의 한 대목을 옮긴다. 캐리커처는 매일신문(박상철 일러스트레이터)에서 옮겨왔다. |
장례식 날 나는 한겨레신문에 추도문 ‘학자 군주 노무현을 그리며’를 썼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익보다 정의를 추구했다. 맹자가 양나라 혜왕을 찾아가자 혜왕이 물었다. “선생께서 불원천리 찾아오셨으니 우리나라에 큰 이익을 주시겠지요?” 맹자가 답했다.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그렇다. 노무현은 평생 이익 대신 정의를, 약자에 대한 배려를 앞세웠다. 늘 손해 보고 지는 길을 갔다.
노무현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말실수와 학벌을 든다. 노 대통령은 자신을 학벌사회, 연고사회의 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돛단배에 비유한 적이 있다. 노 대통령은 가난 탓에 학벌은 낮았으나 책을 많이 읽어 학식이 높았다. 학자 군주였다. 조선 왕조 5백년 27명의 왕 중에 학자 군주는 단연 세종과 정조다. 세종, 정조는 독서광이었고, 집현전, 규장각을 설치해 학자들과 대화했다. 노 대통령도 독서를 좋아했고, 위원회를 설치해 학자들과 대화했다. 정책을 만들 때도 눈앞의 인기보다 논리적 타당성과 진정 국민을 위한 정책인지를 따졌다.
시간 여유가 생길 때 노 대통령의 화제는 역사였다. 동서양 여러 나라 역사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질문하는 일이 많았다. 중국 최고의 명군으로 불리는 당 태종은 자신이 세 개의 거울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얼굴 보는 거울, 직언하는 신하 위징, 그리고 역사였다. 위징이 죽었을 때 태종은 거울을 하나 잃었다며 슬피 울었다. 노 대통령은 끊임없이 역사를 되돌아보려고 노력한 점에서 당 태종과 비슷하다. 직언을 잘 수용한 점도 비슷하다. “요즘 청와대에 위징이 너무 많아 일하기 힘들어”라고 농담하던 노 대통령이었다. 역대 대통령 중 단연 최고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대통령 밑에서 일한 나는 행운아였다. 지금도 문득문득 그때 일이 생각나고, 노무현 대통령이 그립다.
이정우는 57화(2024.03.12.)에서 위징 이야기를 했었다. 그 대목을 덧붙인다. |
2005년 2월25일(금) 12시 인왕실에서 대통령 내외와 실장, 수석들이 참석해 참여정부 2주년 기념 오찬이 있었다. 건배사 부탁을 미리 받고 생각을 해봤다. 청와대 떠날 때가 가까웠다고 생각하고 이런 건배사를 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칭송받는 당 태종 밑에 바른말 하는 위징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위징이 자주 바른말을 하니 당 태종이 참고 또 참다가 어느 날 드디어 분노가 폭발했다. ‘저놈의 영감탱이를 오늘은 죽이고야 말겠다’고 안방에 들어와 칼을 찾았다. 현모양처의 표본인 장손황후가 사라지더니 잠시 뒤 황후의 정식 예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태종에게 큰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폐하, 자고로 명군 밑에는 바른말 하는 신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바른말 하는 위징이 있음은 곧 폐하가 명군이라는 뜻이니 감축드립니다.” 기분이 좋아진 태종이 말했다. “아까 일은 없던 일로 하지요.” 내 건배사가 끝나자 노 대통령이 말했다. “호! 누군지 다음 건배사 할 사람 부담스럽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