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입니다
꽃이 피었다고 봄이 아닙니다. 저에게 봄날은 내복 벗은 날, 비로소 시작됩니다. 이제 벗었으니 진짜 봄입니다. 봄맞이 관광객이 강화로 많이들 들어옵니다. 그래서 휴일이면 교통 체증이 심해집니다.
어디 좀 가려면 차가 막혀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그럼, 운전대 잡고 혼잣말하게 되죠. “뭘 볼 게 있다고 이렇게들 내려오나.”
우리 눈엔 볼 게 없을 수 있습니다. 너무 익숙한 일상의 환경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외지에서 강화를 찾는 이들에겐 산, 바다, 갯벌이 다 멋진 볼거리입니다. 설사 볼거리가 없다 해도 여전히 강화는 매력적인 여행지입니다.
서울도 아니고, 김포 장기동 사는 친구가 그러더군요. “강화대교 건너는 순간 코가 뻥 뚫려.” 진짜 그러냐, 기분에 그런 거 아니냐? 물어봤더니 진짜라고 했습니다. 공기가 확 다르다는 겁니다. 맑은 공기만 실컷 마시고 가도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강화의 가치는 절대 가볍지 않습니다.
더해서, 강화 땅 구석구석 켜켜이 밴 역사의 숨결과 문화유산은 화룡점정이라 할만합니다.
문화유산 풍성한 역사 도시, 그러면, 대개 경주를 떠올립니다. 경주는 정말 자연과 역사문화가 어우러진, 아름답고 소중한 역사 공간입니다. 저는 경주에 갈 때마다 부러움을 느낍니다. 특히 경주 남산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경주는 거의 신라에 국한됩니다. 우리가 가서 보게 되는 거기는 다 신라의 무엇무엇입니다.
강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시대까지 두루 연결되는 각종 역사유적에 굵직한 사건과 인물들까지. 참 다채롭습니다. 강화의 역사만으로 한국사 서술이 가능할 정도입니다. 전국적으로 이런 독특한 성격을 가진 곳이 강화 말고 없을 겁니다.
역사의 섬 강화도
대략 볼까요.
남한에서 제일 큰 탁자식 고인돌, ‘강화 부근리 지석묘’를 비롯해 수많은 고인돌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청동기 시대 강화의 위상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전국에서 사실상 유일한 고조선 단군 관련 유적이 있습니다. 마리산 참성단과 삼랑성이지요.
전등사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찰로 말해집니다. 정수사, 보문사, 백련사, 청련사, 적석사도 삼국시대에 세워집니다. 강화의 사찰들을 통해 고대시대 불교의 유입 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는 대몽항쟁의 중심으로 빛납니다. 당시 세계 최강국 몽골과 맞서 수십 년간 항쟁할 수 있었던 근간은 강화 천도였습니다. 덕분에 고려를 지켜냈습니다.
강화도읍기에 팔만대장경이 조성되고 금속활자 인쇄도 이루어집니다. 강화에서 발굴된 청자 상당수가 국보이거나 국보급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홍릉을 비롯한 고려 왕릉이 여럿 존재하는 것도 강화만의 특색입니다. 대규모 간척도 강화도읍기 강화에서 비롯됐습니다. 우리나라 간척사 분야에서도 강화는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조선시대 삼포왜란을 진압한 황형과 임진왜란을 이겨낸 권율이 강화 출신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강화도는 한양을 수복하기 위한 전초기지였습니다. 의병과 관군에 명나라군까지 강화에 집결해 있었습니다. 강화를 통해 임금의 지시가 전국으로 전달되기도 했습니다.
정묘호란 때는 인조와 조정이 강화로 피해와 위기를 넘겼지요. 병자호란 때는 청군에게 점령당하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강화가 무너지면서 남한산성의 인조 조정은 청군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강화에 진·보·돈대, 강화외성, 강화산성이 세워집니다. 정족산성 안에는 정족산사고가 들어서 조선왕조실록을 모시게 됩니다. 외규장각에는 의궤를 비롯한 나라의 귀한 책을 모셨습니다.
강화는 또 ‘유배의 섬’으로도 주목받습니다.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유배지가 강화였습니다. 이외 많은 왕족이 강화에서 유배 살았습니다. 이원범은 강화에서 유배 생활하다가 임금으로 즉위해 철종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서양 제국주의 국가와 전쟁을 치른 곳이 또한 여기입니다. 프랑스와 병인양요를, 미국과 신미양요를 겪었습니다. 강화가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나라를 지키는 교두보가 되어 힘을 다해 싸웠던 현장입니다. 운요호 사건은 초지진 앞바다에서 벌어졌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의 중심 강화”
몇 해 전에 강화교육지원청 홈페이지에서 이런 글귀를 보았습니다. 공감합니다. 제가 20여 년 전에 쓴, 강화 역사와 문화유산을 다룬 첫 책의 제목도 《역사의 섬 강화도》입니다. 강화의 독특한 역사성에 주목해서 썼던 책입니다.
이러한 강화만의 매력을 알아보고, 강화의 역사와 문화를 직접 느끼려고, 강화를 찾는 이들이 전부터 아주 많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많습니다.
“한번 보고 가득한 회포를 풀고, 두 번 보고 천 년 역사를 알만한 강화! 우리가 원하여 보고자 하는 강화! 우리가 기어코 가야만 할 강화!”
한번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요.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가자봉인’이라는 필명을 쓰는 이가 잡지 《개벽》에 실은 글의 일부입니다. 가고 싶은 강화가 아니라 ‘기어코 가야만’ 하는 강화였습니다.
강화의 이미지
강화 사람이라고 해도 이 땅의 역사를, 문화유산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미처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작은 관심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우선 동네에서 가까운 문화유산부터 산책 삼아 찾아가 보세요. 바람에 실려 오는 역사의 내음을 음미해 보세요. 어디든 가서 살피다 보면 뭔가 궁금해집니다. 조금씩 공부하며 알아가면 됩니다.
인터넷만 열어도 정보가 무궁합니다. 책을 통해 강화를 알아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강화도서관에 강화를 풀어낸 책들이 많습니다. 강화도 관련 도서를 따로 모아놓아서 보기도 편리합니다.
몇몇 기관에서 강화의 역사문화와 관련된 강좌를 진행합니다. 시간 사정에 맞는 강좌를 찾아 참석해 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학생 때는 공부가 지겨웠어도 나이 들어 찾아보는 공부는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이 나이에, 뭐에 써먹겠다고 공부를 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의 마음속에도 사실은 공부에 대한 끌림이 있을 겁니다. 제 친구 장모님이 내가면 사시는데요, 아흔 다 된 분이 손자에게 부탁해서 알파벳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뭐에 써먹으려고 공부하시는 게 아니지요. 이게 A라는 글씨구나, B는 이렇게 쓰는 거구나. LOVE, 러브, 이게 사랑이지? 새로 알아가는 재미를 맛보신 겁니다. ‘아하, 그렇구나.’ 앎이 쌓이면 흐뭇해지고, 흐뭇해지면 행복합니다.
외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강화의 관광지는 전등사였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전적지(戰迹地)로 불리는 국방 유적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초지진, 광성보 등을 홍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광성보 등을 찾는 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30여 년 전, 제 첫 직장이 경상남도 마산에 있었습니다. 남한 땅 북쪽 끝에서 남쪽 끝으로 가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마산 하숙집 아주머니도 광성보 안해루 앞에서 찍은 사진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강화는 조선시대에만도 정묘호란,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의 전쟁을 겪었습니다. 격전의 현장이었습니다. 여기에 ‘전적지’의 이미지가 합해져서 강화의 인상을 만들어낸 측면이 있습니다. 무(武)로 다 설명되는 섬, 문(文)이나 문학(文學)과는 거리가 먼 섬, 강화도!
그렇지가 않은데 말입니다.
조선 양명학 즉 ‘강화학’의 자궁이며 심장이 이곳이고, 금속활자와 팔만대장경을 탄생시킨 곳이 또한 여기입니다. 이규보 문학이 꽃핀 곳이 강화였습니다. 특히 정제두부터 이건창 등으로 이어지는 강화학파는 강화도 정신문화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규보가 강화 사람인가?
예, 강화 사람 맞습니다. 강화에서 태어난 사람만 강화 사람이 아닙니다. 살거나 살았거나 이 땅에 잠든 이가 모두 강화 사람입니다.
조선시대 의병장 중봉 조헌은 김포 출신입니다. 지금 김포시는 조헌을 김포의 인물로 추앙합니다. 중봉도서관, 중봉청소년수련관, 중봉문화제, 중봉문학상. 호칭만 보아도 김포에서 조헌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충북 옥천군도 조헌을 옥천의 인물로 꼽습니다. 조헌의 묘가 옥천에 있습니다.
강화문학관
읍내에 강화문학관이 있습니다. 강화가 문무(文武)의 조화와 융합을 바탕으로 나라의 생명줄을 이어온 땅임을 확인하게 해주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2010년 7월 6일에 개관했으니, 올해로 벌써 14년 됐네요.
1층은 강화 역사 인물의 생애와 문학작품 등을 소개했고요, 2층은 강화 출신 수필가인 조경희 선생의 작품과 그분의 기증품을 전시합니다. 한번 들러보시면 강화문학사의 얼개를 파악하실 수 있습니다. 정철, 권필, 김상용…. 거기 소개된 이들의 이름만 보고 나와도,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공부입니다.
강화문학관은 읍내 답사의 중심지에 위치합니다. 고려궁지, 용흥궁공원, 성공회 강화읍성당, 용흥궁이 강화문학관 주변에 다 있습니다. 그래서 외지 답사객 대개가 강화문학관 앞에서 원도심 답사를 시작합니다. 그들에게 강화문학관은 강화의 첫인상입니다.
인물 선정이 적합하고 게시 내용도 충실합니다. 처음에 이 공간을 만들어낸 이들의 고민과 정성이 보이는 듯합니다. 그런데요, 십여 년 지난 이제는, 개선의 필요성도 느껴집니다. 1층, 역사 인물을 소개한 공간의 자료 배치가 너무 평면적인 것 아닌가 싶습니다. 입체감을 살리는 쪽으로 고급지게 재정비하면 좋겠습니다.
2층에 자그마한 세미나실이 있었습니다. 주민에게 열린 공간으로 각종 문학 행사가 펼쳐지던 곳입니다. 저도 정호승 시인 강연을 이곳에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세미나실은 전시실이 되었습니다. 사실상 주민에게 닫힌 공간이 된 셈입니다. 세미나실을 되살리면 좋겠습니다.
장기적으로 건물 외벽을 포함해 전체적인 리모델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건물 외관을 더 보기 좋게 바꾸고 내부 공간을 넓혀서 내실 있게 꾸미는 방안이 마련되면 참 좋겠습니다.
머릿속에 제 맘대로 그림을 그려봅니다. 3층으로 증축된, 외관도 아름다운 건물로 완성된, 강화문학관! 외지 탐방객들이 문학관 앞에서 하차합니다.
“와, 저 건물 뭐야, 멋진데”
“강화문학관이래, 들어가 보자.”
〈강화투데이〉 2024년 4월 15일 제6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