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위헌과 이아
1231년(고종 18), 몽골의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됩니다. 다음 해인 1232년(고종 19)에 고려 조정은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깁니다. 6월 17일에 강화 궁궐 공사가 시작됩니다. 고종이 개경을 떠난 날은 7월 6일, 강화에 도착한 날은 7월 7일입니다. 궁궐 조영이 시작된 지 스무날 정도밖에 안 됐을 때입니다.
당연히, 궁궐이, 없습니다. 임금 고종은 어디로 가야 하나.
객관(客館)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강화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궁궐이 제대로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은 1234년(고종 21)쯤이었습니다. 새로운 도읍, 강화도에 새로운 궁궐이 들어선 것입니다. 지금, 고려궁궐은 없고요, 궁궐터만 전합니다. 우리는 이곳을 고려궁지(高麗宮址)라고 부릅니다.
고려궁지 계단 올라 ‘昇平門’(승평문)이라는 현판 걸린 대문으로 들어갑니다. 원래 승평문은 고려 궁궐 성곽의 남문 이름입니다. 들어가 보니 궁궐 자리치고는 공간이 좁네요. ‘전쟁이라는 비상시국이라서 작게 지었나 보다.’ 싶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사적 고려궁지는 대몽항쟁 당시 궁궐 후원 정도의 공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궁궐 중심 영역은 고려궁지 아랫마을, ‘궁골’이었던 것 같고요. 궁궐 남쪽 경계는 용흥궁공원 아래 김상용 순의비각쯤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거기에 궁궐의 남문인 승평문이 있었을 겁니다.
지금 고려궁지에 있는 건물들은?
조선시대와 관련된 건축물입니다. 먼저 보이는 곳으로 가지요. 높다란 느티나무 앞세우고 선 당당한 옛 건물 앞에서 현판을 읽어봅니다. 음, 음, 못 읽겠습니다. 저렇게 흘려 쓴 글체는 한문 전공자라도 읽기 어렵다고 하더군요.
안내판을 보니 ‘明威軒’(명위헌)이라고 나와 있네요. 아, 명위헌이라고 쓴 거구나. 명위헌은 강화유수부 동헌입니다. 강화유수 집무처였던 것이죠. 지금 고려궁지 안에는 명위헌 외에 외규장각, 강화부종각, 이방청이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철종 재위기를 기준으로 하면, 서쪽부터 행궁과 외규장각 그리고 왕실 사당인 장녕전, 만녕전, 봉선전 등이 있었습니다. 지금 고려궁지 동쪽 담장 너머까지가 그 영역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당시의 고려궁지는 한마디로 ‘조선 왕실의 공간’이었던 셈입니다. 유수가 근무하는 동헌은 지금 자리가 아니라 저만치 아래쪽(남쪽)에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한순간 모두 불타 사라졌습니다.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이 퇴각하면서 불질렀습니다. 프랑스군이 물러간 뒤 주민 통치에 꼭 필요한 동헌과 객사만 새로 지었습니다. 새로 지은 동헌이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명위헌입니다. 함께 지었던 객사는 사라지고 명위헌만 남았습니다.
1782년(정조 6)에 정조의 명으로 들어선 외규장각(外奎章閣)! 의궤를 비롯한 나라의 중요 서적을 보관했던 왕실 도서관입니다. 프랑스군이 불 질러 없앴던 것을 2003년에 복원했습니다.
강화동종을 건 강화부종각(江華府鐘閣)은 어떤가요, 원래 자리가 여기였을까요?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행궁·장녕전 등이 있던 그 시절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임금 모신 신성한 사당 코앞에서 큰 종을 맨날 쳐댈 수는 없는 것입니다.
1711년(숙종 37)에 전등사에서 제작한 강화동종은 강화산성 출입문의 여닫는 시간을 알리던 동종입니다. 저 아래 김상용순의비각 자리에 있던 것인데 1970년대에 지금 자리로 옮겼습니다. 진품은 강화역사박물관에 있고요, 여기 있는 것은 새로 만든 복제품입니다.
강화부종각에서 이방청(吏房廳) 뒷문으로 길이 이어집니다. 들어갑니다. ‘⊓’ 형태의 날렵한 건물이에요. 뭐하던 곳인지 느낌이 옵니다. “여봐라, 이방!”, “예, 사또!” 할 때의 그 이방입니다. 자연스레 ‘이방청은 이방의 근무처’라고 짐작하게 됩니다. 사실, 각종 설명도 그렇게 하고 있고요. 하지만, 문제가 좀 있습니다.
우선, 이방청이라는 이름 자체가 적절하지 않아요. 전국적으로 이방청이라는 이름을 가진 관아 건물은 없습니다. 이방을 비롯한 고을의 행정 실무자들이 모여 일하던 공간은 이방청이 아니라 이청(吏廳)입니다. 이청은 작청, 질청 등으로도 불렸습니다. ‘강화유수부 이방청’이 아니라 ‘강화유수부 이청’이라고 이름 짓는 것이 그나마 무난했을 겁니다.
공식 명칭을 이방청으로 지은 근거는 무엇일까요. 《속수증보강도지》에 ‘이방청’이라는 호칭이 나옵니다. 이 기록을 따서 이방청으로 지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속수증보강도지》는 지금의 ‘이방청’을 ‘이아’라고도 썼습니다.
이리저리 따져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이방청으로 부르는 건물은 이청이 아니라 이아(貳衙)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청과 이아가 다른 것인가? 그렇습니다. 수령이 근무하는 동헌을 상아(上衙)라고 합니다. 이아는 두 번째[貳] 아(衙)라는 뜻이에요. 강화유수부의 이인자 격인 경력(판관)의 근무처가 바로 이아입니다.
1904년에 강화진위대 대대장 이동휘가 강화에 보창학교를 세웁니다.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 건물을 몇 번 옮겼는데요, 1911년부터 폐교되던 1915년까지 옛 이아 건물을 교사(校舍)로 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의 사진도 남아 있고요. 보창학교였던 옛 이아 건물이 바로 지금의 ‘이방청’인 것입니다. ‘이방청’이 ‘이아’의 오용(誤用)일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까지 고려궁지 안에 있는 조선의 강화유수부 동헌 등을 보았습니다. 이제 유수부가 무엇이고, 강화가 유수부가 된 것은 언제이며, ‘유수부 강화’가 갖는 의미는 또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강화, 유수부가 되다
1627년(인조 5) 정묘년, 후금이 조선을 침공하니, 정묘호란입니다. 인조 조정은 강화도로 피란해서 위기를 넘기게 됩니다. 후금군은 강화도를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1월 13일에 후금군이 조선 땅으로 짓쳐들어왔고 1월 17일에 우찬성 이귀가 “강화를 피난처로 정해놓았다가 만일 안주에서 패보(敗報)가 오거든 상께서는 곧바로 강도로 들어가소서.” 권합니다. 1월 19일에 인조가 강화로 파천할 것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1월 26일에 한양 궁궐을 떠나 1월 29일에 강화에 도착합니다. 3월 3일에 조선과 후금이 강화도호부에서 화친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냅니다. 전쟁 기간이 채 두 달도 되지 않습니다.
전쟁 끝난 1627년(인조 5) 4월 2일 조정. 비변사가 인조에게 강화에 유수부를 설치하고 심열을 유수로 임명하자고 아룁니다. 강화도호부를 강화유수부로 올리자는 것입니다. 심열은 1604년(선조 37)부터 1605년(선조 38)까지 강화도호부사를 지냈기에 강화 사정에 밝은 관료였습니다.
인조가 환도(還都)한 뒤에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환도? 예, 아직도 강화도 조정입니다. 3월 3일에 정묘호란이 종료됐으나 인조는 계속 강화도에 머물렀습니다. 후금군이 조선 땅에서 모두 철수한 뒤인 4월 10일에야 강화도를 떠나 한양 궁궐로 돌아갑니다. 70여 일 동안 인조 조정이 강화도에 있었던 것입니다. 환도하고 한 달 흐른 1627년(인조 5) 5월 11일, 인조가 심열을 종2품 강화유수로 삼습니다. 이렇게 강화가 유수부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지방행정구역과 지방관 품계>
읍격 | 부 | 대도호부 | 목 | 도호부 | 군 | 현 | |
대현 | 소현 | ||||||
지방관 | 부윤 | 대도호부사 | 목사 | 도호부사 | 군수 | 현령 | 현감 |
품계 | 종2품 | 정3품 | 정3품 | 종3품 | 종4품 | 종5품 | 종6품 |
위 표는 조선시대 지방행정구역 단위와 해당 지방관의 품계를 정리한 것입니다. 현(縣)부터 부(府)까지 모두 더해서 330곳 내외였습니다. 강화유수는 왜 표에서 뺐나? 넣는 게 좀 그렇습니다. 강화유수는 법적으로 외관직(外官職, 지방관직)이 아니라 영의정, 이조판서 등과 함께 경관직(京官職, 중앙관직)에 포함됐습니다.
《경국대전》(1485)은 중앙 종2품 관청으로 사헌부, 개성유수부, 충익부를 들었어요. 당시에는 유수부가 개성 하나뿐이었던 것이죠. 《속대전》(1746)에는 중앙 종2품 관청으로 사헌부, 개성유수부, 강화유수부가 나옵니다. 영조 당시 유수부가 개성과 강화에 설치된 것입니다.
“무릇 유수(留守)라고 하는 것은 고도(古都)를 맡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강도(江都)의 관원을 무턱대고 유수라는 명호로 일컫는 것은 부당하니 부윤(府尹)으로 개정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광해군일기》
1618년(광해 10)에 광해군이 한 말입니다. 신하들이 강화도호부사를 강화유수로 올리자고 청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광해군이 거절하면서 부윤으로 올리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무릇 유수라고 하는 것은 고도(古都)를 맡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렇습니다. 원래 유수란, 옛 도읍지의 수령을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개성이 고려의 도읍이었잖아요. 개성이 유수부가 된 것은 세종 때인 1438년(세종 20)입니다.
광해군은 강화를 강도(江都)라고 말하면서도 대몽항쟁기 강화가 고려의 도읍이었음을 인정하지 않는 듯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1619년(광해 11)에는 우의정 조정이 강화는 고려의 옛 궁궐터가 남아 있는 구도(舊都)라고 하면서 유수부로 삼을 것을 간접적으로 청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시대 강화의 수령은 도호부사(부사, 종3품)였다가 광해군 때 부윤(종2품)이 되고 인조 때부터 유수(종2품)가 되는 것입니다.
인조가 강화를 유수부로 삼은 것은 강화가 고려의 도읍지였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결정일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서 나라를 지키고 한양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라는 중요성이 반영된 것입니다. 인조 때부터 ‘옛 도읍지’라는 유수부의 개념이 국방상 중요 지역이라는 의미로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성과 강화 둘뿐이던 유수부가 정조 때 추가됩니다. 수원유수부와 광주유수부입니다. 수원에 화성이 있고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있습니다. 이제 유수부의 성격이 완전히 바뀝니다. 옛 도읍지가 아니라 한양을 외곽에서 지키는 국방 개념의 행정구역이 된 것입니다. 개성유수부는 북쪽에서 한양을 지키는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강화투데이〉 2024년 3월 30일 제5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