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선조 26), 선조가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명합니다.
“적의 난리를 겪는 2년 동안 군사 한 명 훈련 시키거나 기계 하나 수리한 것 없이, 명나라 군대만을 바라보며 적이 제 발로 물러가기만을 기다렸으니 불가하지 않겠는가.…이렇게 세월만 보내면서 망할 때를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내 생각에 따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합당한 인원을 차출해서 장정을 뽑아 날마다 활을 익히기도 하고 포를 쏘기도 하여 모든 무예를 닦도록 하고 싶으니, 의논하여 처리하라.”
이리하여 훈련도감이 창설되었습니다. 이후 인조 재위기에 총융청, 어영청, 수어청이, 숙종 때 금위영이 들어서면서 중앙군영 5군영 체제가 성립됩니다. 5군영 가운데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이 도성 수비를 맡아 삼군문으로 불리게 됩니다. 총융청과 수어청은 도성 외곽, 그러니까 경기지역을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수어청은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대략 경기 동쪽 지역을 맡고 총융청은 경기 서쪽을 관할했습니다. 따라서 강화는 총융청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됩니다.
삼군문 가운데 하나인 어영청은 강화도에 돈대를 쌓은 군영입니다. 경기지역은 물론 충청과 황해 그리고 경상, 전라 지역에 어영청 소속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교대로 번상하여 도성을 지키고 치안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어요. 각종 축조(築造) 사업에도 어영청 병력이 동원됐습니다. 숙종 당시 어영청 소속 정군이 약 2만 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강화도 돈대 축조에 소집된 인원은 4,262명이었습니다.
이제 강화의 진무영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진무영은 5군영과 별도로 숙종 때 강화에 창설된 군영입니다.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이 한양을 지키고 총융청·수어청이 경기지역을 방어한다고 했지요. 진무영은 오롯이 강화를 지키는 군영입니다.
강화에 유수부를 설치하고 20년 넘게 흐른 1649년(인조 27), 강화유수 여이징이 상소했어요. 강화도 방비 대책을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 부(府)는 백성이 잔폐하고 군사가 적어서 한 모퉁이도 감당할 만하지 못한데, 수군은 통어영에 속하고 육군은 총융청에 속하여 수신(守臣, 강화유수)의 직임은 행정상의 일뿐입니다.” 《인조실록》
빛 좋은 개살구라고 호칭만 유수일 뿐, 실제로는 군사적으로 별 권한도 없다는, 푸념 섞인 상소입니다. 강화도 수군은 교동도 삼도수군통어영의 지휘를 받고 육군은 총융청의 통제 아래 있던 상황을 말한 것입니다.
애초 인조가 강화도호부를 강화유수부로 올린 것은 유수에게 군사적 역할까지 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강화유수에게 군사를 통솔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의욕적인 유수라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겠죠. 이후 강화유수의 군사적 권한이 커지게 됩니다.
숙종 때 이르러 강화유수의 군사적 위상이 훅 올라갑니다. 1678년(숙종 4) 도승지 윤심이 숙종에게 청합니다. “강화유수에게 밀부(密符)를 내려주소서.” 대사헌 이원정이 말을 보탭니다. “강화에 새로운 군영을 두고 유수에게 밀부와 유서(諭書)를 내려주심이 마땅합니다.” 숙종이 승낙하면서, 강화에 설치할 군영의 이름을 대신들이 상의해서 정하라고 지시합니다.
대신들 논의를 거쳐 강화의 군영 이름이 결정됐어요. 이름하여 진무영(鎭撫營)! 이렇게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점차 규모를 키우고 조직을 정비하면서 중앙군영을 능가하는 세를 과시하게 됩니다.
밀부? 유서?
밀부와 유서는 군사 발동권을 의미해요. 《대전통편》은 밀부의 생김새를 “원형이다. 한 면에는 제 몇부[第幾符]라고 밀부의 번호를 쓰고 다른 면에는 어압(임금 사인)을 새긴다. 가운데를 둘로 나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서 “오른쪽은 관찰사, 통제사, 수어사, 총융사, 양도(兩都)의 유수, 절도사, 방어사에게 나누어주고, 왼쪽은 대내에 보관하되, 만약 군병을 동원하거나 기밀에 응할 일 등이 있으면 서로 맞추어 보아 간계(奸計)를 방지하고, 한결같이 받은 유서(諭書)에 따라 거행한다.” 이렇게 적었습니다. 유서는 국왕이 군사권을 가진 관원에게 내렸던 명령서입니다.
양도(兩都)의 유수?
《대전통편》은 1785년(정조 9)에 나온 새로운 법전이에요. 당시까지는 개성유수와 강화유수밖에 없었기에 ‘양도(兩都)의 유수’라고 한 것입니다.
진무영의 수장은 진무사(鎭撫使)입니다. 강화유수가 진무사를 겸하는 체제입니다. 그런데 소속 병사 수가 적었어요. 외침 시 소속 군사들로만 강화도를 지키기에 버거운 겁니다. 강화유수 이선의 상소에 이러한 고민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본 고을은 섬 둘레가 3백여 리이며, 돈대는 48처인데, 군병은 단지 3천 인입니다. 혹시라도 사변(事變)이 생기면 이 3천여의 군사로 3백여 리의 지역을 어떻게 경계하고 지키며,…본부(강화유수부)에서 어떻게 곳곳마다 응접할 수 있겠습니까?” 《숙종실록》
대책이 필요합니다. 대규모 병력을 강화도로 보내 상주하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운영 비용 등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전에 병력 차출부터가 난관입니다. 숙종이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강화 인근 지역을 진무영의 외영(外營)으로 삼아 비상시에 외영의 군사들을 강화도로 투입하는 방안을 마련한 것입니다.
무작정 외지의 군사들이 강화도에 들어오면 우왕좌왕, 혼란스럽겠죠. 그래서 A지역 군사들은 어느 돈대에서 어느 돈대까지, B지역 군사들은 또 어느 돈대에서 어느 돈대까지, 이런 식으로 지킬 구역을 미리 설정했습니다. 통제 지휘권은 강화 진무영 진무사에게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진무영은 5영 체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종2품 진무사(겸 강화유수) 아래 정3품 진영장(鎭營將) 5명이 배속된 겁니다. 전영장은 부평부사, 좌영장은 통진부사, 중영장은 진무영 본부 중군, 우영장은 풍덕부사, 후영장은 연안부사가 맡았습니다. 세가 약해진 총융청의 반발로 이후 진무영 외영의 규모가 축소되는 등 변화를 겪게 되지만, 기본적인 틀은 유지됩니다.
부평·통진·풍덕·연안의 수령이 비상시에 지역 병사를 이끌고 강화도로 와서 외적을 막는다는 진무영 시스템! 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영장들을 지휘하는 진무사의 권한을 강화해야 합니다. 그래서 강화유수가 진무영 진무사로서 외영장(外營長)인 부평부사, 통진부사, 풍덕부사, 연안부사에 대한 포폄(褒貶), 즉 근무성적 평가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포폄은 상·중·하, 3등급으로 행해집니다. 평가자는 대개 ‘상(上)’으로 점수를 매깁니다. 형식적인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드물게 ‘하(下)’를 주는 경우가 있는데, ‘하’를 받은 관리는 교체되는 게 일반적입니다. 사실상 잘리는 겁니다.
1678년(숙종 4)에 설치된 강화 진무영이 네 곳 외영을 관리하는 체제로 완성된 것은 1684년(숙종 10)쯤입니다. 완성된 진무영 조직 체계를 표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진무영 조직 체계>
영 | 소재 | 속읍 | 집결지 | 파수지 |
중영 (5,652명) |
강화 | 본부 | ||
전영 (1,713명) |
부평 | 인천, 안산 | 덕진 | 6돈 장자평돈대~오두돈대 |
좌영 (1,841명) |
통진 | 김포, 양천, 금천 | 갑곶 | 8돈 화도돈대~망해돈대 |
우영 (1,307명) |
풍덕 | 고양, 교하 | 승천보 | 10돈 옥창돈대~의두돈대 |
후영 (1,820명) |
연안 | 배천 | 인화보 | 10돈 불장돈대~망양돈대 |
별중영 (5,443명) |
해미 | 해미, 예산, 대흥, 온양, 신창, 면천, 평택, 당진, 결성, 덕산, 아산, 서산 |
16돈 서남쪽 지역의 돈대들 (건평돈대~섬암돈대) |
이렇게 해서 비상시 강화 진무영의 총 병력은 외영과 별중영을 포함해서 17,776명이 됩니다. 이 가운데 17,046명이 군병이고 730명은 장교와 출신입니다.
별중영?
표에 별중영이 슬그머니 들어갔지요? 외침이 있을 때, 모든 돈대에 외영 군사가 배치되는 게 아닙니다. 건평돈대에서 섬암돈대까지, 강화도 서남쪽에 있는 돈대들은 빠졌어요. 서남쪽 해안은 외적의 침략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작은 곳이라서 그랬던 모양입니다. 대신 이 지역을 별중영(別中營)이라고 해서, 충청도 12고을의 군사들이 와서 지키게 했습니다. 하지만 별중영은 얼마 안 가 진무영 체제에서 제외됩니다.
한편, 19세기 중엽이 되면 진무영의 위계가 더 올라갑니다. 병인양요(1866)를 겪고 나서 흥선대원군이 종2품이던 진무사의 품계를 정2품으로 올립니다. 정3품이던 진무영 중군도 종2품으로 올립니다. 신미양요(1871) 당시 광성보 전투를 이끌었던 어재연의 직책이 ‘진무중군’, 즉 진무영의 중군입니다. 그때 어재연의 품계가 종2품이었던 것이에요. 진무영의 수장이 진무사이지만, 실질적인 전투 지휘자는 중군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화유수부 동헌과 객사가 지금의 고려궁지에 있었고, 진무영 중영은 고려궁지 아래 강화읍사무소 주변에 있었습니다. 진무영 중영 앞은 아주 넓은 연병장이었습니다. 이후 연병장 공간은 강화 오일장이 서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강화 3·1운동도 이 시장에서 일어났습니다.
시장 중간으로 동락천이 흐릅니다. 그래서 예전에 강화 주민들이 동락천을 기준 삼아 ‘웃장판’(관청리), ‘아랫장판’(신문리), 이렇게 나눠 불렀었지요. 지금이야 뭐, 참 많이 변했죠. 오래간만에 웃장판이라는 말을 쓰고 보니, 옛날 생각이 납니다. 웃장판 옆에 있던 중국집, 태풍관도 떠오르고요. 아, 짜장면이 땡기는 오늘입니다.
〈강화투데이〉 2024년 4월 30일 제6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