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유산 상속을 하지 않고 돌아가신 모양이다. 자식들이 모여서 아버지가 남긴 재산을 나누는데, 문제는 노비였다. 노비도 재산으로 취급되던 시대다. 건강한 노비, 병약한 노비, 젊은 노비, 늙은 노비. 공평하게 나누기가 어렵다. 누군들 병약하고 나이 많은 노비를 택하고 싶겠는가. 아들, 딸들이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다. 드디어 방법을 찾았다. 어떤 방법?
제비뽑기였다. 자식들은 제비뽑기로 노비들을 분배했다. 딸도 노비를 받았다고? 그렇다. 고려시대에는 유산 상속에 딸, 아들 차별이 없었다(이 과정에서 노비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고통을 겪기도 했을 것이다). 아버지 제사도 아들, 딸이 같이 모셨다. 만약 아들 없이 딸만 있다면? 당연히 딸들이 제사를 지냈다.
“장가를 가서 처가에 있으며 내 몸에 쓰이는 것을 처가에 의지했으니 장인 장모의 은혜가 부모와 같다.” 이렇게 말한 인물은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이다. 이규보가 처가살이했다. 이규보는 이를 부끄러워했을까. 아니다. 그때는 대개 처가살이다. 남자가 결혼하는 걸 장가간다고 한다. 장가(丈家)의 원래 뜻은 ‘장인의 집’ 즉 처가다. 장가간다는 것은 장인의 집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처가살이 풍속에서 ‘장가간다’라는 말이 나온 것 같다.
......
고려시대에는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부모 유산을 공평하게 분배받았고, 집안의 호주(戶主)가 될 수 있었으며, 개가(재혼)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재혼에 따른 불이익도 없었다.
그런데 대략 조선중기 이후가 되면 여성의 지위에 큰 변화가 생긴다. 유산 상속과 제사에서 딸은 배제됐다. 딸들만 있는 집안에서는 양자를 들여 제사를 모시게 했다. 결혼하면 친정이 아닌 시댁으로 가서 시부모님을 모셨다. 남편이 일찍 죽어도 평생 재혼할 수 없었다. 만약 어기고 재혼하면 그 자식들은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다. 양반 신분을 잃게 되는 것이다.
※ 처가살이의 역사가 생각보다 길다. 고구려에 서옥제가 있었으니까. 서옥제는 ‘남자가 혼인 후 일정 기간 처가에서 살다가 남자 집으로 돌아와 사는 혼인풍속’이다.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하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런 속담은 조선시대 후기에 가서야 생겨났을 것이다.
《한국사 키워드 배경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