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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교동도 역사 산책①-연산군 유배지

언젠가 강화역사박물관에 갔을 때였어요. 강화에서 출토된 항아리 모양의 유물을 보았습니다. 고대시대에 제작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표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 거예요. ‘뭐라고 쓴 거냐, 보자.’ 高, 木, 根, 縣. 아! 교동(喬桐)의 옛 이름 고목근현(高木根縣)입니다. 책이 아니라 항아리에 새긴 거라서 더 반가웠습니다.

고대 항아리에 새긴 고목근현(강화역사박물관)

 

고구려 때 교동을 고목근현으로 불렀고요, 통일신라 시기부터 교동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강화(江華)라는 지명은 고려 때 처음 쓰게 됐으니까, ‘강화’보다 ‘교동’이라는 지명이 먼저 나온 겁니다. 교동의 또 다른 이름으로 ‘대운도’, ‘고림’, ‘달을참’이 전해집니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는 말이 있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래 누워있다보면 다시 일어나고 싶어지잖아요. 교동대교로 차 타고 건너서 너무 편하고 좋은데요, 가끔은 예전처럼 저 아래 창후리에서 배 타고 건너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창후리 포구에서 교동 오가던 배

 

쭈욱 갑니다. 고구리 저수지가 보입니다. 고구리? 고구리라고 하니까 왠지, 고구려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살짝 듭니다. 아니에요. 고구리라는 지명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닙니다. 구산리(龜山里)와 고읍리(古邑里)가 합쳐진 지명이라고 해요. 고읍리의 ‘고’와 구산리의 ‘구’를 합해 고구리(古龜里)가 된 것입니다.

‘고읍(古邑)’이 있다면, ‘신읍(新邑)’도 있겠죠? 예, 신읍은 지금의 읍내리(邑內里)입니다. 대략 조선 전기까지 교동의 중심지는 고구리 저수지 위쪽 마을이었던 것 같아요. 옛날, 수령이 근무하는 중심지를 읍치(邑治)라고 했는데, 굳이 지금과 비교하면 ‘면 소재지’ 정도의 의미입니다.

조선 후기에 교동의 읍치가 지금의 읍내리로 옮겨갑니다. 읍치가 있는 마을이라서 지명이 읍내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읍리’라는 지명은 읍치가 읍내리로 옮겨간 조선 후기에 생겨난 지명으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고구리 저수지 지나자마자 좌회전하면 ‘연산군 유배지’가 있습니다. 요즘 뜨고 있는 화개정원 안입니다. 예전에는 ‘연산군 유배지’ 분위기가 진짜 유배지 같았는데, 지금은 안 그러네요. 그냥 꽃대궐이 되었습니다. 유배지가 아니라 임금님 별장 같은 느낌도 듭니다.

여기가 정말 연산군이 유배됐던 장소 맞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교동에서 연산군의 유배지로 알려진 곳이 적어도 세 곳입니다. 여기랑, 교동대교 건너자마자 오른쪽 봉소리 마을, 그리고 교동읍성입니다. 셋 중에서 가장 가능성 큰 곳은, 지금 꾸며 놓은 ‘연산군 유배지’를 포함한 고구리 지역입니다.

유배 죄인은 감시 대상입니다. 더구나 폐왕은 1급 감시 대상입니다. 민간인에게 감시를 맡길 수 없습니다. 관아 가깝게 두는 게 일반적입니다. 당시 읍치가 고구리이니 연산군도 이곳 어딘가에 갇혔을 것입니다.

봉소리에서 고구리, 고구리에서 읍내리, 이런 식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던 것은 아닐까? 아닐 겁니다. 연산군이 교동에서 유배살이한 기간은 단 두 달에 불과합니다. 겨우 두 달 있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더구나 폐위된 임금 가둘 유배 시설 만드는 것도 몹시 어려운 일입니다. 교동에서 유배지를 옮겼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연산군이 폐위되어 교동도로 귀양 온 것은 1506년(중종 1)입니다. 사망 후 그대로 교동에 묻힙니다.

7년 뒤인 1513년(중종 8)에 경기도 양주(지금 서울 도봉구)로 묘를 옮겨갑니다. 연산군의 부인 폐비 신씨가 이장을 요청해서 그리되었습니다. 연산군과 교동도의 인연은 살아서 두 달, 죽어서 7년이었습니다.

 

교동도 화개정원 내 연산군 유배지

 

화개정원 들어가 유배지 앞에 서면 제법 큰 비석이 먼저 보입니다. ‘연산군 유배지(위리안치)’라고 새겼고 뒷면엔 한자로 ‘燕山君流配址(圍籬安置)’라고 새겼습니다. 위리안치는 유배 형벌 가운데 가장 가혹한 것입니다. 편안하다는 뜻의 안(安) 자가 보여서 그럭저럭 무난한 형벌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단순 유배자는 유배 지역 안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습니다. 위리안치형을 받은 유배자는 감옥 같은 집에 갇혀 대문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위(圍)는 ‘에워싸다’, 리(籬)는 ‘울타리’라는 뜻입니다. 안치(安置)는 안전하게 잘 모셔두었다는 뜻도 있고 죄인을 가두었다는 뜻도 있습니다. 위리안치의 안치는 죄인을 가두었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밖에서 대문을 잠가 외부와 접촉할 수 없습니다. 항상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연산군을 교동까지 호위했던 신하가 조정에 돌아가 중종 임금에게 이렇게 보고 했습니다.

“안치소에 도착해 보니 둘레에 친 울타리가 좁고 높아서 해를 볼 수가 없었으며, 다만 작은 문 하나가 있어 음식을 통하였습니다. … 신이 하직을 고하니 말씀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고 수고했으니 고맙고 고맙다.’라고 했습니다.”

 

끌려온 연산군 모형(화개정원 연산군 유배지)

 

비석 옆에 유배문화관이 있고 그 옆으로, 끌려오는 연산군, 갇혀 있는 작은 집, 지키는 포졸 등의 모형을 배치했습니다. 분홍색 옷을 입은 연산군이 소가 끄는 수레에 타고 앉아 있는 모형을 봅니다. 그런 모습으로 끌려왔다는 얘기죠. 사실일까요? 다음 사료에서 답을 찾아보셔요.

 

전왕(前王)을 교동에 안치하였다. 밤 2고(鼓)에 봉사 안윤국이 와서 아뢰기를, "폐주는 갓을 쓰고 분홍 옷에 띠를 띠지 않고 나와서, 땅에 엎드려 가마에 타며 말하기를, ‘내가 큰 죄가 있는데, 특별히 상의 덕을 입어 무사하게 간다.’ 했으며, 폐비 신씨도 또한 정청궁으로 나왔습니다." 하였다. 거사하던 날, 비(妃)를 이 궁에 옮겨 있게 하였다.

《중종실록》 1년(1506) 9월 2일.

 

분홍 옷을 입은 것은 맞네요. 타고 온 것은 가마입니다. 교동까지 내내 가마 타고 온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소가 끄는 수레는 아닙니다. TV 연속극을 보면 죄인이 귀양 갈 때 흰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 내리고 저런 수레를 타고 갑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져 얼굴에서 피가 흐르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사실 귀양 가는 사람들 대개 걸어서 가거나 말을 타고 갑니다.

연산군 부인, 왕비에서 폐비가 된 신씨는 궁궐에서 쫓겨나 정청궁이라는 곳으로 거처를 옮겼네요. 신씨는 남편 연산군 따라 교동으로 오려고 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아서 오지 못했습니다. 광해군은 강화로 귀양 올 때 부인과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왔지만, 연산군은 홀로 와야 했습니다.

가만있자, 연산군도 아들이 있었나? 예,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됐는지 말씀드릴게요.

반정 세력은 폐세자 이황을 강원도 정선에 안치했습니다. 창녕대군 이성은 충청도 제천, 양평군 이인을 황해도 수안, 이돈수를 황해도 우봉으로 보내 안치했습니다. 그리고 스무날도 지나지 않아 열 살도 안 된 어린애 넷을 모두 독약 먹여 죽였습니다.

1506년(중종 1) 9월 24일, 박원종을 비롯한 대신들이 연산군 자식들을 “오래 두어서는 안 되니, 모름지기 일찍 처단하소서.” 했습니다. 중종은 “황 등이 나이가 모두 어리고 연약하니,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다.”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대신들이 거듭 죽여야 한다고 외칩니다.

중종이 신하들에게 부탁합니다. “황 등은 나이 연약하고 형세가 고단하니, 비록 있은들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그래도 대신들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는 국가의 큰일이니, 차마 못 하는 마음으로써 대체(大體)에 누가 있게 하여서는 안 됩니다. 모름지기 대의로써 결단하여야 합니다. 이는 신 등의 뜻일 뿐만 아니라 곧 일국 신민의 뜻입니다.”

결국, 중종이 허락합니다. “황 등의 일은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으나, 정승이 종사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므로 과감히 좇겠다.” 그래서 연산군의 아들 넷이 연산군보다 먼저 하늘로 갔습니다.

 

궁녀 모형(화개정원 연산군 유배지)

 

포졸이 지키는 울타리 안을 보니 내시 같은 인물 모형도 있고 여인들도 있네요. 궁녀들입니다. 정말 연산군 모시라고 딸려 보낸 사람들일까요? 예, 그렇습니다. 궁녀 4명과 내시 2명이 교동까지 따라와 연산군을 시중들었습니다.

강화문화원, 《江華文化》 제16호, 2023.

 

 

《연산 광해 강화》, 연산군과 광해군을 말하다

연산군과 광해군, 굳이 덜어내지 않고 더하지도 않고 그이들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강화도와의 인연도 돌아본다. 다음은 《연산 광해 강화》의 서문이다.  들어가는 글 연산군, 광해군.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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