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습니다. 교동향교 들어가는 길이 좁아서 불편했습니다. 주차 공간도 마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닙니다. 진입로를 넓게 열었고 주차장도 시원하게 닦아 놨습니다. 길목에 모셨던 옛 비석들은 향교 홍살문 옆으로 모두 옮겨 모셨습니다.
홍살문에서 외삼문 가는 길, 적당한 거리감도 좋습니다.
외삼문 밀고 들어갑니다. 다른 향교에 가면 그냥 좀 위축되는 느낌이에요. 권위적인 공기가 흐른다는 선입감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교동향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골 외할머니댁 대문 밀고 들어서는 느낌.
교동향교에 처음 오시는 분은 외삼문 들어가다가 잠시 놀랄 수 있습니다. 코앞에 건물이 확 나타나서 말이죠. 명륜당인데 외삼문과 거의 붙어있습니다. 앞마당이 아예 없는 겁니다. 향교 지을 때 땅이 부족해서 이렇게 건물 배치한 것은 아닐 겁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명륜당 앞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자리합니다. 그런데 교동향교는 동재와 서재가 명륜당과 거의 일직선 위에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이죠.
여기 동재와 서재는 규격화된 향교 건물이 아니라 그냥 시골집 민가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스러운 풍취를 느끼게 합니다. 동재 굴뚝은 저게 뭔가. 미소가 지어집니다. 툇마루에 앉아봅니다. 꽉 조였던 넥타이, 느슨하게 내리고,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잠시 눈 감고 있는 기분.
명륜당은 지금으로 치면 학교 교무실인데 교실 역할도 했습니다. 한자로 明倫堂입니다. 윤리, 즉 ‘사람의 도리를 밝히는 집’ 정도의 의미입니다. 진정한 교육은 명륜(明倫)인데, 작금의 교육 현장은 여러 가지 이유로 명륜이 불가합니다. 지나친 입시 위주 교육, 일부 학부모의 교사 괴롭힘, 걸면 걸리는 ‘아동학대’ 관련 법령…. 걱정입니다.
명륜당이 ‘교무실’이라면 그 안에 ‘교사’가 있었겠지요. 나라에서 선생님을 각 향교로 파견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조선시대 향교 선생님을 교수(종6품)와 훈도(종9품)라고 했습니다. 지금과 대략 비교했을 때 광역시에 있는 향교에는 교수를 보내고 일반 시, 군에는 훈도를 보냈습니다.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이 묵으며 공부하던 공간입니다. 기숙사인 셈입니다. 양반뿐 아니라 평민도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대개 서당에서 기초교육을 마치고 향교에 입학합니다. 향교에서 배우고 익혀 작은 과거, 즉 소과(小科)에 응시합니다. 소과는 진사시와 생원시입니다. 소과에 합격하면 생원이 되고 진사가 되는 겁니다.
아마, 이 노래를 처음 부른 가수가 조영남일 거예요. “건너 마을에 최진사댁에 딸이 셋 있는데 그중에서도 셋째 따님이 제일 예쁘다던데.” 우리는 ‘진사’ 그러면 노인을 연상합니다. 그런데 기실은 18살, 19살에도 얼마든지 생원, 진사가 되는 겁니다.
생원, 진사가 되면 한양 성균관에 진학해 공부를 더 해서 정식 과거인 대과(大科)를 치릅니다. 원칙이 그랬습니다.
그럼, 한양 아이들도 향교에 진학했을까요? 아니요. 한양에는 향교가 없습니다. 향교는 한문으로 ‘鄕校’입니다. ‘鄕’은 지방을 의미합니다. 향교는 지방에 있는 학교라는 뜻입니다. 한양 아이들은 향교 격인 4부학당에서 공부했습니다. 지금 서울에 양천향교가 있습니다만, 조선시대 양천은 한양이 아니었습니다.
대성전(大成殿) 앞입니다. 정면 다섯 칸, 아담한 규모에 단단함을 담았습니다. 공자 등을 모신 신성한 공간입니다. 그렇습니다. 향교의 중심 건물은 대성전과 명륜당입니다. 대성전은 제사 기능, 명륜당은 교육 기능을 합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 기능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공간이 바로 향교입니다.
대성전 앞에 서서 바다를 봅니다. 잔잔한 호수처럼 보입니다. 화개산 남쪽 기슭, 교동향교! 처음부터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닙니다. 원래 향교가 화개산 북쪽 고구리에 있었습니다. 지금 자리 읍내리로 옮겨 지은 해가 1741년(영조 17)입니다. 왜 옮겼을까.
읍치(邑治) 변경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전국 향교 대개가 관아와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향교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책임자가 해당 지역 수령입니다. 그래서 수령 근무처 인근에 향교가 자리하기 마련이었다. 읍치가 고구리였을 때 향교도 고구리에 있었고, 읍치가 읍내리로 변경됐을 때 향교도 읍내리에 있는 겁니다.
교동향교가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라고 말해지지만, 사실로 보기 어렵습니다. 1127년(인종 5)에 세워진 것으로도 전하는데 이 역시 근거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고려 말 안향이 중국에서 공자 화상(畵像)을 들여와 교동향교에 모셨다는 이야기도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전국 최초 향교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안향이 공자 화상 모셨던 곳 아니어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교동향교는 지금 이 자리, 이대로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고귀합니다.
강화문화원, 《江華文化》 제16호,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