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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교동도 역사 산책④-교동읍성

읍성(邑城)이라, 읍성. 읍을 둘러쌓은 성!

오늘날 읍·면의 ‘읍’과 조선시대 ‘읍’은 쓰임이 좀 다르답니다. 조선시대의 ‘읍’은 한양을 제외한 전국 행정구역을 아우르는 용어로 쓰였습니다. 현, 군, 도호부, 목, 대도호부, 부. 모두 개개의 읍으로 칭했습니다. 현도 읍이고, 군도 읍이고 도호부도 읍이라는 얘기죠. 그래서 한양에는 도성이 있고 지방에는 읍성이 있던 것입니다. ‘읍치(邑治)’라는 말도 여기서 나온 것이고요.

조선시대 모든 읍이 읍성을 갖추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330곳 내외의 전국 행정구역 가운데 19세기 기준으로 123개의 읍성이 있었습니다. 하삼도 그러니까 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 특히 많았답니다. 경기지역은 의외로 적어서 강화·교동·개성·수원 이렇게 네 곳에만 읍성이 있었다고 해요.

경기지역 네 개의 읍성 가운데 북한 땅인 개성읍성을 논외로 하면, 강화·교동·수원이 남습니다. 지금 강화읍성의 공식 명칭이 강화산성이고, 수원읍성은 수원 화성입니다. 그러니까 교동읍성만 ‘읍성’이라는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동읍성 남문

 

조선 후기 교동 관아가 있었던 교동읍성 남문 앞에 섰습니다.

운동장 육상 트랙 모양의 교동읍성은 둘레가 856m이고 면적은 46,516㎡(약 14,187평)라고 합니다. 성문으로 남문, 북문, 동문이 있었는데 북문과 동문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남문이라도 남아 준 것이 고맙지요. 오래도록 남문 홍예만 있었습니다. 2017년에야 문루를 새로 올리고 庾亮樓(유량루)라고 쓴 현판을 걸었습니다.

단정하게 복원한 건 좋은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옛 지도들을 보면 교동읍성 남문, 동문, 북문에 모두 옹성이 그려져 있어요. 옹성이 있던 겁니다. 복원 전 남문 왼쪽(서쪽)에 옹성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루를 올리면서 옹성을 밀어버리고 대신에 미끈한 돌들을 아주 낮게 쌓았네요. 무슨 제단처럼 보이는 정체불명의 구조물이 탄생한 셈입니다. 이왕 하는 거, 옹성까지 제대로 쌓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아쉽습니다.

이제 남문 앞 경관을 살펴봅니다. 집들이 꽤 있으나 조선 후기 그때는 남문 밖이 공터였습니다. 여기서 장시가 섰거든요. 장이 서는 날이면 사는 이, 파는 이, 구경하는 이, 왁자했겠지요. 규모 큰 읍성은 성안에 장시가 섰고 작은 읍성은 보통 남문 밖에서 장이 열렸다고 합니다.

교동읍성 동벽
교동읍성 북벽

 

이쪽저쪽 기웃해봅니다. 읍성이라는데 성곽이 별로 보이지 않네요. 세월이 헐어내고 사람이 헐어내고 그러면서 성의 형태를 잃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신작로 낼 때 성돌을 옮겨다 부숴서 깔았다고 해요. 성돌은 또 주민들 집의 축대가 되고 담장이 되고 그랬습니다. 그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교동읍성을 찾는 답사객 상당수가 남문만 보고 돌아갑니다. 이름은 읍성인데 정작 성이 보이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요. 하지만, 멀리서 보이지 않을 뿐, 가까이 가 보면 성곽이 꽤 남아있습니다. 성곽길 따라 한 바퀴 돌아보면 새로운 과거를 보게 됩니다.

 

강화문화원, 《江華文化》 제16호,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