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全 썸네일형 리스트형 강화도조약 내용과 해설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전문대일본국과 대조선국은 평소 우의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우의가 미흡한 것을 고려하여 다시 옛날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여 친목을 공고히 한다. 그러므로 일본국 정부에서는 특명전권변리대신 육군중장 겸 참의 개척장관 구로다 키요타카와 특명부전권변리대신 의관 이노우에 카오루를 조선국 강화부에 나아가게 하고 조선국 정부에서는 판중추부사 신헌과 부총관 윤자승에게 유지(諭旨)를 받들어 조관을 의논하여 세우게 한 것이다. 아래에 열거한다. ← 애초 일본이 작성하여 체결을 요구했던 초안에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와 ‘조선국왕 전하’ 라는 호칭이 있었다. 조선의 요구로 삭제되었다. 일본도 이 부분을 조선이 절대 수용하지 않을 것임을 짐작했을 것이다. 폐하와 전.. 더보기 시집, 《무당벌레》와 《함바집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짓기 어려운 글이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상대방이 시인이라고 하면 그이의 작품을 보기도 전에, 바로, 존경할 준비가 됩니다. 그동안 살아오며 시집을 꽤 읽었습니다. 후딱 한 권을 다 읽어버리지 않고 야금야금 아껴가며 읽습니다. 때로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때로는 가슴이 촉촉해졌습니다. 유명한 시인들의 시집을 주로 보았습니다. 강화에도 무슨, 무슨 문학회 활동을 하며 시를 쓰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고백하건대, 그런 분들의 시는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이제, 반성합니다. 적절한 비유는 아닌 것 같은데 내공 깊은 ‘재야의 고수’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분들 중에 구경분 시인과 임경자 시인을, 그이들의 시집으로 만났습니다. 조금 거만한 마음으로 시집을 열었고 아주 겸손한 마음 되어 마지.. 더보기 창왕과 영창대군, 유배 오다 그 섬에 가고 싶다!언제 갔던 게 마지막이었더라. 헤아려보니 십 년도 더 지났네요. 어디? 거제도! 거제도는 풍광이 참 아름답고 역사 유적도 다양합니다. 또 가보고 싶은데 아휴, 너무 멀어서 이제 엄두가 안 납니다. 조선시대, 전국의 섬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귀양 갔던 유배지가 거제도입니다. 거제도, 제주도, 남해도, 진도, 흑산도 순이었어요. 강화는 순위에 들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강화도와 교동도가 유배지로 널리 알려진 이유가 무엇일까요?귀양 왔던 사람들의 신분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강화에 유배된 사람들은 대개 왕족이거나 폐위된 왕이었습니다. 폐왕이나 왕족은 언제든 역모에 휩쓸릴 가능성이 큰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려면 도읍에서 가까운 섬, 강화가 가장 적합한 .. 더보기 묘호(廟號) 톺아보기 ②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했다. 묘호는 선종(宣宗)으로 정해졌다. 그런데 며칠 뒤 대신들이 “대행대왕께서는 나라를 빛내고 난(亂)을 다스린 전고에 없던 큰 공적이 있으니, 진실로 조(祖)라고 일컫는 것이 마땅”하다고 아뢰었다. 광해군은 자기 뜻도 그러하다며 즉시 추진하라고 했다. 그러자 사간원 정언 이사경이, 묘호를 조로 정하면 후세에 말을 듣게 될 것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이후 조정 신하들의 의견이 다양하게 나왔는데 결국은 묘호를 종(宗)으로 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를 예조가 광해군에게 보고했고 광해군은 조정 의견을 수용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2월 25일, 선조의 묘호가 선종(宣宗)으로 공식 확정되었다. 즉위 초, 광해군은 유영경 등 반대세력 제거와 .. 더보기 묘호(廟號) 톺아보기 ① 충무공 이순신!충무(忠武)라는 두 글자 시호에 공(公)을 붙여서 충무공이라고 부른다. 시호(諡號)란, 어떤 두드러진 인물이 사망한 뒤 임금이 정해주는 존칭이다. 생시에 율곡이라는 호를 쓴 이이는 사후에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래서 문성공 이이라고 한다. 임금도 시호를 받는다. 그런데 글자 수가 점점 길어지면서 오히려 현대인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정조의 시호가 문성무열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라는 걸 누가 굳이 기억하려고 할까. 우리에게 정조는 정조로 충분하다. 아, 드라마 덕분에 이름도 안다. 정조의 이름은 이산! 정조(正祖)! 이런 임금 칭호를 묘호(廟號)라고 한다. 종묘에 모실 때의 호칭이다.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생전의 업적을 고려해서 적절한 묘호를 올린다. 조(祖)나 종(宗)으로 끝.. 더보기 고려 강화 도읍기의 문화 예술 - 팔만대장경, 금속활자, 고려청자 팔만대장경1232년(고종 19)부터 1270년(원종 11)까지 39년 동안 강화는 고려의 수도였습니다. 고려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문화적 성취를 이루어냅니다. 그 중심에 강도(江都)가 있었습니다. 팔만대장경과 《상정고금예문》이 강화에서 탄생했습니다. 국보급 고려청자 상당수가 강화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불경 등 부처님 말씀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통틀어 대장경(大藏經)이라고 합니다. 대장경을 인쇄해서 보급할 목적으로 목판에 새긴 것을 대장경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팔만대장경’은 엄밀히 말하면 ‘팔만대장경판’입니다. 경판이 8만 장이 넘어서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릅니다. 팔만대장경은 ‘재조대장경’, ‘고려대장경’, ‘강화경판(江華京板) 고려대장경’ 등으로도 불립니다. 문화유.. 더보기 소설 같은 역사, 이연년과 김경손 이연년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몽골의 3차 침략기인 1236년(고종 23)에 고려에 반기를 들어 봉기하였다. 세력을 키워 스스로 백제도원수라 칭하고 백제의 부흥을 내세웠다. 전남 담양 인근에서 시작된 반란의 물결은 광주를 휩쓸고 나주로 향했다. 1237년 봄 강화경 조정은 김경손을 전라도지휘사로 삼아 나주로 보냈다. 김경손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이연년 세력을 진압했다. 그 과정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이연년이 나주성을 포위하고 자신의 무리에게 엄히 이르기를, “지휘사로 온 김경손은 귀주에서 몽골군을 크게 물리친 대장이라 인망이 매우 두텁다. 생포하여 내 사람으로 삼을 것이니 절대로 활을 쏘지 마라. 죽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이연년의 반군은 활을 내려놓고 짧은 칼로 진압군에 맞섰다. 이연년이 돌.. 더보기 장만과 인조의 리더십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사실은 아닐 테지만, ‘혼수 장만’, ‘집 장만’할 때의 ‘장만’이 사람 이름에서 비롯했다는 설이 있다. 광해군과 인조 때 조정의 중추로 활약했던 장만(1566~1629)은 조선의 국방 대책을 장만하고 추진했던 인물이다. 광해군은 후금에 대한 대응 전략을 그에게 물어 결정하곤 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에 묵직한 영향을 준 이가 바로 장만이다. 인조반정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그의 능력을 높이 산 인조도 귀하게 썼다. 장만이 이괄의 난을 진압한 뒤 더욱 신망했다. 정묘호란(1627)이 터지자,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로 피란했다. 그때 장만은 강화도에 없었다. 후금군을 막는 총사령관이 되어 뭍에서 분투했다.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벌인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에서 전쟁을 종결하는 데 기여했다. 정묘호란.. 더보기 삼국시대 백제 아이들도 구구단을 외웠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 특별전 가 열리고 있다고 한다. 2023년 7월 30일까지다. 목간 중에 구구단이 기록된 것이 있다고 해서 보도자료 사진을 확인해봤다. 정말 있다. 신기하다. 나뭇조각에 담긴 역사의 한 페이지…백제의 기록문화를 만나다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나무를 깎아 그 위에 먹으로 문자를 쓴 것을 목간(木簡)이라 한다. 글을 적은 나뭇조각이라 보면 된다. www.yna.co.kr 더보기 이전 1 ··· 26 27 28 29 30 31 32 ··· 3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