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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강화 도읍기의 문화 예술 - 팔만대장경, 금속활자, 고려청자 팔만대장경1232년(고종 19)부터 1270년(원종 11)까지 39년 동안 강화는 고려의 수도였습니다. 고려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문화적 성취를 이루어냅니다. 그 중심에 강도(江都)가 있었습니다. 팔만대장경과 《상정고금예문》이 강화에서 탄생했습니다. 국보급 고려청자 상당수가 강화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불경 등 부처님 말씀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통틀어 대장경(大藏經)이라고 합니다. 대장경을 인쇄해서 보급할 목적으로 목판에 새긴 것을 대장경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팔만대장경’은 엄밀히 말하면 ‘팔만대장경판’입니다. 경판이 8만 장이 넘어서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릅니다. 팔만대장경은 ‘재조대장경’, ‘고려대장경’, ‘강화경판(江華京板) 고려대장경’ 등으로도 불립니다. 문화유.. 더보기
소설 같은 역사, 이연년과 김경손 이연년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몽골의 3차 침략기인 1236년(고종 23)에 고려에 반기를 들어 봉기하였다. 세력을 키워 스스로 백제도원수라 칭하고 백제의 부흥을 내세웠다. 전남 담양 인근에서 시작된 반란의 물결은 광주를 휩쓸고 나주로 향했다. 1237년 봄 강화경 조정은 김경손을 전라도지휘사로 삼아 나주로 보냈다. 김경손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이연년 세력을 진압했다. 그 과정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이연년이 나주성을 포위하고 자신의 무리에게 엄히 이르기를, “지휘사로 온 김경손은 귀주에서 몽골군을 크게 물리친 대장이라 인망이 매우 두텁다. 생포하여 내 사람으로 삼을 것이니 절대로 활을 쏘지 마라. 죽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이연년의 반군은 활을 내려놓고 짧은 칼로 진압군에 맞섰다. 이연년이 돌.. 더보기
장만과 인조의 리더십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사실은 아닐 테지만, ‘혼수 장만’, ‘집 장만’할 때의 ‘장만’이 사람 이름에서 비롯했다는 설이 있다. 광해군과 인조 때 조정의 중추로 활약했던 장만(1566~1629)은 조선의 국방 대책을 장만하고 추진했던 인물이다. 광해군은 후금에 대한 대응 전략을 그에게 물어 결정하곤 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에 묵직한 영향을 준 이가 바로 장만이다.  인조반정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그의 능력을 높이 산 인조도 귀하게 썼다. 장만이 이괄의 난을 진압한 뒤 더욱 신망했다. 정묘호란(1627)이 터지자,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로 피란했다. 그때 장만은 강화도에 없었다. 후금군을 막는 총사령관이 되어 뭍에서 분투했다.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벌인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에서 전쟁을 종결하는 데 기여했다.  정묘호란.. 더보기
삼국시대 백제 아이들도 구구단을 외웠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 특별전 가 열리고 있다고 한다. 2023년 7월 30일까지다. 목간 중에 구구단이 기록된 것이 있다고 해서 보도자료 사진을 확인해봤다. 정말 있다. 신기하다. 나뭇조각에 담긴 역사의 한 페이지…백제의 기록문화를 만나다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나무를 깎아 그 위에 먹으로 문자를 쓴 것을 목간(木簡)이라 한다. 글을 적은 나뭇조각이라 보면 된다. www.yna.co.kr 더보기
고려궁지에서 보는 고려 최우의 결단, 천도 1232년(고종 19) 2월, 개성 조정에서 강화 천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됩니다. 고종 임금과 신하들 대부분이 천도에 부정적이었습니다. 6월 16일, 최우가 자기 집 세간살이를 강화로 옮깁니다. 《고려사절요》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어요. “최우가 왕에게 … 강화도로 행차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하였다. 최우가 녹전거(수레) 100여 대를 빼앗아 집안의 재물을 강화도로 옮기니, 개경이 흉흉하였다.” 다음 날인 6월 17일, 최우는 강화에 궁궐을 짓기 시작합니다. 7월 6일, 고종도 어쩔 수 없이 개성 궁궐을 떠나 강화로 향합니다. 7월 7일, 칠월칠석날, 고종이 송해면 승천포에 도착합니다. 비가 하염없이 내렸습니다. 궁궐을 막 짓기 시작했으니, 그곳으로는 갈 수.. 더보기
장떡과 어머니 장떡이었다. 된장, 고추장, 부추 등속 버무려 오물조물 동그랗게 만든 장떡을 나는 좋아했다. 짭짤한 장떡만 있으면 밥을 맛나게 먹었다. 일 년 전 이맘때, 어머니는 자식 놈 먹이려고 온종일 장떡을 만들어 채반에 널어놓으셨다. 적당히 말려 냉동실에 넣어두면 꽤 오래도록 나의 최고 반찬이 된다. 다음날이었던 것 같다. 우당탕, 소리가 컸다. 불길한 느낌이 확 일었다. 뛰쳐나가 보니 어머니가, 쓰러져 있다.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해서 119 도움받아 병원으로 모셨다. 작은 병원, 큰 병원 옮겨가며 입원, 허리 수술, 입원, 몇 개월 만에 결국은 요양원으로 가셨다. 집안에서도 보행기에 의존해 겨우겨우 걷는 양반이 장떡 채반을 옮기다가 넘어지신 게 발단이었다. 아들놈 불러서 채반 옮기라고 하면 될 것을, 귀찮게 .. 더보기
보도 사진 한 장에도 신문사의 정치관이 담긴다 지난해 8월에 있었던 ‘대통령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보도한 두 신문 속 사진(2022.08.18. 기사)을 본다. 대통령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다. 헤드라인도 옹호적이다. 이른바 보수 쪽 색깔이 강한 신문이다. 대통령이 잔뜩 인상 쓰고 있는 모습이다. 헤드라인도 부정적으로 뽑았다. 이른바 진보 쪽 색깔이 강한 신문이다. 더보기
몽골의 침략과 강화도 천도 거란·여진·몽골조선시대의 전쟁 그러면, 우리는 임진왜란(1592),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을 떠올립니다. 그렇습니다. 큰 전쟁은 이게 다예요. 조선 건국(1392) 이래 임진왜란 때까지 200년간 대규모 전쟁이 없었던 겁니다.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장기간의 평화 시대였어요. 병자호란 이후 다시 전쟁 없는 시대가 계속됩니다. 고려는 아니었습니다. 건국 초부터 멸망 시기까지 거듭 큰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때 국제 정세가 전쟁을 부르는 시대였습니다. 당시 중국은 송나라였어요. 문화, 경제적으로 번영했으나 군사력이 약했습니다. 그래서 송나라는 북방민족의 거듭된 침략으로 시련을 겪다가 결국은 몽골에 망하고 맙니다. 고려 역시 북방민족의 침략당합니다. 북방민족, 그들은 대개 만리장성 이북.. 더보기
강화 부근리 지석묘, 받침돌 균열 심각 공식 이름이 ‘강화 부근리 지석묘’이다. 1964년에 사적으로 지정할 때는 ‘강화 지석묘’였으나 2011년에 ‘강화 부근리 지석묘’로 변경됐다. 보통 ‘부근리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남한에서 제일 큰 탁자식(북방식) 고인돌로 균형미까지 탁월하여 우리나라 고인돌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덮개돌의 무게가 55톤이다. 수천 년 세월을 품은 이 고인돌이 위태로워 보인다. 뒤쪽에서 보아 오른쪽 받침돌에 생긴 균열이 심각하다. 균열이 생긴 것은 오래전인데 점점 심해지고 있다. 강화군에서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한다. 정부 차원의 관심과 지원도 필요하다. 세계문화유산, 그중에서도 으뜸인 고인돌이 ‘강화 부근리 지석묘’이다. (촬영일, 2023.05.10)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