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충무(忠武)라는 두 글자 시호에 공(公)을 붙여서 충무공이라고 부른다. 시호(諡號)란, 어떤 두드러진 인물이 사망한 뒤 임금이 정해주는 존칭이다. 생시에 율곡이라는 호를 쓴 이이는 사후에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래서 문성공 이이라고 한다.
임금도 시호를 받는다. 그런데 글자 수가 점점 길어지면서 오히려 현대인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정조의 시호가 문성무열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라는 걸 누가 굳이 기억하려고 할까. 우리에게 정조는 정조로 충분하다. 아, 드라마 덕분에 이름도 안다. 정조의 이름은 이산!
정조(正祖)! 이런 임금 칭호를 묘호(廟號)라고 한다. 종묘에 모실 때의 호칭이다.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생전의 업적을 고려해서 적절한 묘호를 올린다. 조(祖)나 종(宗)으로 끝나는 두 글자 묘호는 중국에서 도입된 제도다. 그런데 명나라와 청나라 임금은 ‘○조’, ‘○종’이라는 묘호보다 당대 연호를 활용한 호칭인 ‘○○제’로 더 알려져 있다. 홍무제(명 태조), 옹정제(청 세종)식으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조나 종으로 끝나는 왕호를 처음으로 받는 이는 고구려 제6대 임금인 태조왕이다. 나라를 처음 세운 것과 맘먹는 업적을 남겼다고 해서 태조(太祖)라고 한 것 같다. 그런데 제7대 임금 차대왕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고 별궁으로 물러나니, 태조대왕이라고 칭했다.”라는 《삼국사기》 기록으로 보아서 ‘태조’를 온전한 묘호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그러니까 생시에 태조대왕으로 칭했으니 말이다. 다른 고구려 임금들과 달리 중국식 왕호인 태조를 쓴 이유는 알 수 없다.
조나 종으로 된 묘호를 받은 첫 임금은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이다. 태종(太宗)이 묘호이고 무열(武烈)은 시호이다. 김춘추를 태종으로 칭하자 당나라가 불쾌해했다. “너희 신라는 바다 밖에 있는 조그만 나라임에도 태종의 호를 사용하여 천자의 칭호를 참칭하니 그 뜻이 불충하므로 속히 그 명호를 고치도록 하라.” 요구해왔다.
어찌 감히 당 태종의 묘호를 신라에서 그대로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신라는 김춘추의 삼국통일 업적을 말하며 당의 요구를 거부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나라가 신라에 “다시 사신을 보내서 태종이라는 칭호를 고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원칙적으로, 종이나 조로 된 두 글자 묘호는 중국의 황제만 쓰는 것이었다. 그래서 태종무열왕 이전 신라 임금 가운데 그런 묘호를 쓴 사례가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고려와 조선의 임금들은 조와 종으로 된 묘호를 계속 썼다. 선조 때 명나라가 조선의 묘호 사용 문제를 다시 시비한 적이 있으나 별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면, 어떤 임금이 조(祖)가 되고 어떤 임금이 종(宗)이 되는가?
기준이라고 할까, 원칙이라고 할까, 고대 중국에서 전해진 게 있다. 개창위조, 수성위종(開創爲祖, 守成爲宗)이다. 나라를 연 임금은 ‘조’이고, 이후 임금들은 ‘종’이라는 것이다. 개창이란 나라를 세웠다는 뜻이고 수성은 선대 군주가 이루어 놓은 일을 지켜간다는 의미이다. 고려가 이 원칙을 깔끔하게 지켰다. 왕건만 태조, 조를 썼고 이후 임금들은 모두 종만 썼다(원 간섭기에는 ‘충○왕’을 써야 했다).
그런데 조선은 조(祖) 자 묘호를 가진 임금이 여럿이다. 왜 그럴까. 묘호 제정 원칙이 또 하나 있었다. 조유공종유덕(祖有功宗有德)이다. 줄여서 조공종덕(祖功宗德)이라고 한다. 공이 있는 임금은 조요, 덕이 있는 임금은 종이라는 것이다. 조공종덕, 이게 참 애매하다. 고인이 된 임금이 덕이 많았는지, 공이 많았는지 평가하는 게 쉽지 않다.
현실적으로, 나라를 연 임금과 망할 뻔한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다고 평가하는 임금에게 ‘조’로 된 묘호를 올렸다. ‘조’와 ‘종’은 높고 낮음이 없다고 말들 했으나 실은 ‘조’를 ‘종’보다 높게 여기고 받들었다. ‘조’를 높게 보는 인식은 조선 후기에 더 뚜렷해졌다.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27명 조선의 군주 가운데 7명이나 조로 된 묘호를 받았다. 종으로 된 묘호는 18명. 나머지 2명은 묘호 자체를 받지 못한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태조 이성계를 제외하면, 조선에서 ‘조’ 묘호를 처음 받은 이가 수양대군 세조다.
세조를 이어 즉위한 예종이 의정부 전·현직 정승과 육조 참판 이상 고관들에게 세조의 묘호를 정하게 했다. 그 결과 신종(神宗)·예종(睿宗)·성종(聖宗), 이렇게 세 가지 호칭이 올라왔다. 첫 번째로 적힌 신종으로 정해지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예종이 모두 거부하고 새로운 요구를 한다. “대행대왕께서 재조(再造, 나라를 다시 일으킴)한 공덕은 일국의 신민으로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묘호를 세조(世祖)라고 일컬을 수 없는가?”
정인지 등이, 이미 세종(世宗)이 있는데 어찌 또 세(世) 자를 묘호에 쓸 수 있겠느냐며 난감해 했다. 그러자 예종은 중국 한나라 때 세조가 있고 세종도 있었다면서 밀어붙였다. 이리하여 신종이 될 뻔한 세조가, ‘세조’가 되었다. 세조의 시호는 무려,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의숙인효’
《철종의 눈물을 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