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史

창왕과 영창대군, 유배 오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언제 갔던 게 마지막이었더라. 헤아려보니 십 년도 더 지났네요. 어디? 거제도! 거제도는 풍광이 참 아름답고 역사 유적도 다양합니다. 또 가보고 싶은데 아휴, 너무 멀어서 이제 엄두가 안 납니다.

조선시대, 전국의 섬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귀양 갔던 유배지가 거제도입니다. 거제도, 제주도, 남해도, 진도, 흑산도 순이었어요. 강화는 순위에 들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강화도와 교동도가 유배지로 널리 알려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귀양 왔던 사람들의 신분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강화에 유배된 사람들은 대개 왕족이거나 폐위된 왕이었습니다. 폐왕이나 왕족은 언제든 역모에 휩쓸릴 가능성이 큰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려면 도읍에서 가까운 섬, 강화가 가장 적합한 유배지였습니다.

 

고려 희종왕릉 석릉(강화 진강산)

 

조선 개국초 강화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1392(태조 1), 태조 이성계가 명합니다. “강화와 거제에 나누어 두게 하라뭘 나누어 두게 하라는 걸까요? 고려의 왕씨(王氏)들을 강화도와 거제도로 옮기라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강화에 상당히 많은 왕씨 성 가진 이들이 끌려왔습니다. 집단 유배였던 셈입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1394(태조 3)에 강화와 거제의 왕씨들을 거의 다 물에 빠트려 죽입니다. 연려실기술은 왕씨들을 배에 태워 바다에 나가서 배에 구멍을 뚫어 가라앉혀 죽였다고 기록했습니다. 용케 살아남은 왕씨들은 태조의 명령으로 성()을 바꿔야 했습니다. 그래서 왕씨들 상당수가 전씨(田氏), 옥씨(玉氏), 또 다른 전씨(全氏)로 성을 고쳤다고 전합니다.

 

태종조에 왕씨의 후예로 민간에 숨어 있는 자가 있다 하여 해당 관청에서 죽이기를 청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왕씨의 후예를 죽인 것은 태조의 본의가 아니다.” 하고, 바로 전교를 내려 왕씨의 후예로 남아 있는 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각각 생업에 종사하게 하라고 하였다.(《연려실기술》)

 

그렇습니다. 태종 때 이르러서야 왕씨 사람들에 대한 칼부림이 끝났습니다.

이제, 왕씨 살해 사건 이후 강화로 귀양 왔던 대표적인 이들을 알아보겠습니다. 폐위된 임금으로 연산군과 광해군이 있습니다. 강화에서 귀양 살다가 임금 된 이는 철종입니다. 왕족은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군, 영창대군 등등입니다.

 

교동도 연산군 유배지 조형물

 

고려시대에도 강화로 귀양 왔던 임금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희종, 충정왕, 우왕, 창왕입니다. 강종과 고종은 강화에서 귀양 살다가 개성으로 가서 임금이 되었습니다. 조선 철종처럼이요. 그러고 보니 고려 고종은 몽골의 침략으로 강화로 천도할 때, 그때 강화에 처음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 강종과 함께 강화에서 유배 살았던 것입니다.

이들 가운데 조선의 영창대군(1606~1614)과 고려의 창왕(1380~1389)을 살펴보겠습니다. 영창대군과 창왕은 죄 없이 강화에 귀양 와서 어린 나이에 강화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영창대군은 9, 창왕은 10살에 살해당했습니다.

영창대군 묘가 경기도 안성시에 있습니다. 남한산성 쪽에 있었는데 1970년대에 안성으로 이장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창왕은 묘조차 없습니다. 어딘가로 시신을 모셔갔을 수도 있겠고 강화 땅 어딘가에 버려지듯 묻혔을 수도 있습니다.

 

영창대군 묘(경기 안성)

 

창왕이 인천 을왕리에서 죽어 그곳에 묻혔다는 전설이 있다고 해요. 하지만, 사실이 아닐 겁니다고려사절요예문관대제학 유구를 강화로 보내어 창을 처형하였다.”라고 나오거든요. 원문을 확인해 봅니다. “藝文館大提學柳玽于江華, 誅昌(벨 주)! , 칼로 베어 죽였습니다. 목을 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통상 왕족은 몸이라도 온전하게 묻어주라고 사약을 내리는 법인데, 10살 꼬마 창왕은 칼을 맞고 죽었습니다.

그러면 영창대군은 어떻게 살해됐을까요? 방에 가두고 불을 잔뜩 때서 태워 죽였다고 합니다. 많이들 들어보신 이야기일 겁니다. 그런데 정말일까요? 실록에 나오기는 하는데 정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면, 실록에 각각 다른 내용 세 가지가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태워 죽였을 가능성은 33.3%인 셈입니다.

폐왕인 연산군과 광해군의 실록은 실록임에도 실록이라 하지 않고 일기라고 합니다. 광해군일기에 영창대군을 굶겨 죽였다는 기록과 함께 태워 죽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조실록에는 음식에 잿물을 넣어 죽였다고 나옵니다. 독살했다는 얘기지요. 굶겨서, 태워서, 독약 먹여서, 이 셋 중 무엇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창왕과 영창대군은 왜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요.

고려 창왕은 이성계 세력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폐위되고 살해되었습니다. 일국의 왕을 신하들이 폐위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겠죠. 창왕을 폐위한 명분은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움)입니다. 창왕은 왕씨가 아니고 신씨이다, 그러니 가짜 왕인 신씨를 폐위시키고 진짜 왕씨를 새 왕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왕을 내쫓고 공양왕을 세웁니다.

공민왕-우왕-창왕-공양왕, 고려 마지막 네 임금을 순서대로 적어 봅니다. 공민왕의 아들이 우왕이고 우왕의 아들이 창왕입니다. 공민왕 당시 활약하던 인물이 신돈입니다. 신돈이 공민왕에게 한 여인을 바쳤는데요, 그 여인이 낳은 아들이 우왕입니다.

이성계 세력은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 우왕은 신씨가 되고 우왕의 아들 창왕도 신씨가 됩니다. 왕건이 세운 나라 고려에서 신씨는 임금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왕이 진짜 누구의 아들인지 궁금합니다만, 알 수 없습니다.

 

선조왕릉 목릉(경기 구리)

 

영창대군은 광해군의 왕권 안정을 위한 희생양이었습니다.

임해군, 광해군, 영창대군. 모두 선조의 아들입니다. 임해군과 광해군은 그냥 인데, 영창대군은 대군입니다. 왕비가 낳은 아들, 그러니까 왕의 적자는 대군이 되고 후궁이 낳은 서자는 이 됩니다.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광해군보다 영창대군이 왕위 계승권자로 더 확실한 자격을 갖춘 것입니다. 비극은 영창대군이 너무 늦게 태어났다는 것이죠.

선조는 적자로 왕위를 잇게 하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런데 낳는 아들마다 서자였네요. 장남 임해군, 차남 광해군. 왕비는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세자를 임명하지 않고 버티던 선조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할 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습니다. 장남 임해군은 평판이 너무 나빠서 세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랬는데 1606(선조 39)에 새 왕비 인목왕후(인목대비)가 드디어 적자 영창대군을 낳았습니다. 이때 선조 나이 55, 인목왕후는 23세였습니다. 세자 광해군은 32세였고요. 광해군이 새엄마인목왕후보다 9살이나 많았습니다.

선조는 고민합니다. 세자를 바꿀까, 말까. 신하들도 세자 광해군파와 영창대군파로 나눠집니다. 그러다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겨우 즉위합니다. 광해군은 자신보다 정통성에서 앞서는 형 임해군을 교동도로 유배 보내 죽였고 아우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보내 죽였습니다.

 

성안을 두루 다니면서 위리에 합당한 집을 찾았는데 마지막 날 늦게서야 동문 안 최언상의 집을 얻고 군인들을 시켜 … 담을 쌓고 울타리를 치게 해서 그날에 일을 끝마쳤습니다.(《광해군일기》)

 

영창대군을 강화성 동문안 최언상의 집에 가뒀다는 얘기입니다. 이 사료를 소개하는 이유는 이제 살채이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군청 동쪽, 견자산 남쪽 마을을 살채이 또는 살챙이라고 합니다. 살채이는 살창리(殺昌里)에서 온 말이라고 합니다.

살창리는 ()을 살해한 마을이라는 의미라고 해요. 그러면 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어디서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인 곳이라서 살창리라 했다 하고 어디는 창왕(昌王)을 살해한 곳이라 살창리라 불렀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영창대군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살창리가 을 죽인 곳이 맞다면, 그 주인공은 고려 창왕일 것입니다. 광해군일기에 나오듯 영창대군이 갇힌 곳은 동문 안입니다. 당시 동문은 성공회 성당 언덕쯤에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강화산성은 원래 있던 강화성보다 훨씬 넓게 규모를 키워서 숙종 때 쌓은 것입니다.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다음 임금이 숙종입니다.

따라서, 살창리는 창왕이 갇혔다가 살해된 동네라고 해야 말이 됩니다. 강화문화원에 편찬한 증보 강화사(1994)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창왕은 강화읍 살챙이에 위리안치하였고 그다음 해 살해되어 원사하였기 후일에 비석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나 마멸된 비석이 있어 회의를 자아낸다.”

 

강화읍 살채이 창왕 유허비(출처: 동아일보)

 

살채이에 마멸된 비석이 있다? 창왕의 비석이 있다? , 정말 옛 비석이 있었습니다. 1975719일 자 동아일보창왕 추모 유허비로 추정되는 비석이 살채이 마을 어느 집에 누워있는 사진과 기사가 실렸습니다.

비석 높이는 185인데 글씨는 마멸돼 읽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동네 어르신이 어릴 때 비석 서 있는 걸 봤는데, 사람들이 창왕 유허비라고 말했다는 증언도 기사에 나옵니다. 이 귀한 비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강화투데이2023.06.30.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