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史

강화도조약 내용과 해설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전문

대일본국과 대조선국은 평소 우의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우의가 미흡한 것을 고려하여 다시 옛날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여 친목을 공고히 한다. 그러므로 일본국 정부에서는 특명전권변리대신 육군중장 겸 참의 개척장관 구로다 키요타카와 특명부전권변리대신 의관 이노우에 카오루를 조선국 강화부에 나아가게 하고 조선국 정부에서는 판중추부사 신헌과 부총관 윤자승에게 유지(諭旨)를 받들어 조관을 의논하여 세우게 한 것이다. 아래에 열거한다.

애초 일본이 작성하여 체결을 요구했던 초안에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와 ‘조선국왕 전하’ 라는 호칭이 있었다. 조선의 요구로 삭제되었다. 일본도 이 부분을 조선이 절대 수용하지 않을 것임을 짐작했을 것이다. 폐하와 전하라는 차별적 왕호를 쓴 것은 삭제 조건으로 다른 조항의 협의를 이끌어 내려는 일본의 술책으로 추정된다.

 

강화도조약을 맺은 장소인 연무당 옛터

 

❚제1관

조선국은 자주국[自主之邦]으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제부터 양국은 화친한 사실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우하여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이전부터 사귀어온 정의를 손상할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없애고 되도록 너그러우며 융통성 있는 규정을 만들어서 영원히 서로 평안할 것을 기약한다.

조선을 자주 국가로 공포한 것은 청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일본의 속뜻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1874년 프랑스는 베트남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베트남이 독립국가임을 명시했다. 베트남에 대한 청의 영향력 행사를 막으려는 조치였다. 일본은 프랑스의 사례를 조선에 적용한 것이다.

 

❚제2관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조선국 서울에 사신을 파견하여 예조판서를 직접 만나 교제 사무를 상의할 수 있다. 해당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또한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에 가서 직접 외무경(外務卿)을 만나 교제 사무를 상의할 수 있다. 해당 조선국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도 역시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초안의 병권대신(秉權大臣)이 예조판서로, 외무성 귀관이 외무경으로 바뀌었다. 일본 우위의 외교 관계를 평등하게 고친 것이다. 초안을 지금 식으로 말하면, 일본 관리가 한국에 오면 무조건 국무총리가 만나줘야 하고, 한국 관리가 일본에 가면 총리는커녕 외무성 장관도 만날 수 없고, 그냥 해당 실무자만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를 양국의 외무부장관(조선은 예조판서, 일본은 외무경)이 만나주는 것으로 격을 맞춘 것이다.

 

❚제3관

이제부터 두 나라 사이에 오가는 공문은, 일본은 그 국문을 사용하되 지금부터 10년 동안 별도로 한문으로 번역한 것 1본을 첨부하며 조선은 진문(眞文)을 사용한다.

초안은 “이제부터 두 나라 사이에 오가는 공문은, 일본국은 그 국문을 사용하고 조선국은 진문(眞文)을 사용한다.”였다. 조선의 요구로 한문 번역본 첨부 규정이 삽입되었다. 진문(眞文)은 한글이 아니고 한문이다. 일본의 국문은 일본어를 말한다. 예민한 문제에 양국이 한문 번역에 이견을 보일 때 일본은 일본어 문서를 중심으로 일을 처리할 것이다. 한문 번역본이 사라지는 10년 후가 되면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제4관

조선국 부산 초량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 공관이 세워져 있어 양국 백성의 통상 구역이 되었으나 이제부터는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은 없애버리고 새로 만든 조약에 따라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조선국 정부는 제5관에 기재된 2개 항구를 별도로 개항하여 일본국 백성이 오가며 통상하는 것을 허락한다. 해당 토지에 집을 짓거나 그 지역 백성의 집을 임대해서 거주하는 것은 각각 그 편의에 따른다.

초량항 왜관을 ‘공관’으로 기록했다. 조선은 왜관과 공관의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왜관은 조선의 지원 그리고 규제와 통제 안에 있던 공간이다. 그러나 공관은 치외법권을 가진 외교사절의 거주 지역으로 거주국 즉 조선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다.

 

❚제5관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연해에서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서 지명을 지정한다. 개항 시기는 일본력으로 명치 9년 2월, 조선력으로 병자년 2월부터 계산하여 모두 20개월 후로 한다.

초안에서 일본은 함경도 영흥부 해구(海口)를 개항장으로 지목하고 그 외 한 곳을 추가로 개항할 것을 요구했다. 조선의 반대로 특정 지역을 정하지 않고, 5도의 연안 중 두 곳을 정해 나중에 개항하기로 했다. 조선이 영흥부 개항을 거부한 것은 태조 이성계가 영흥 출신이어서이다. 영흥에 태조 어진을 모신 원묘(原廟)가 있고, 인근에는 추존된 태조 조상들의 왕릉이 있다. 제5관에 따라 기존의 부산 외에 원산(1879.7)과 인천(1883.8)이 추가 개항된다. 조약 내용보다 한참 뒤에 개항한 것은 조선의 반발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제6관

이제부터 일본국의 배가 조선국 연해에서 큰바람을 만나거나 연료와 식량이 떨어져서 목적지까지 갈 수 없을 때는 어느 곳이든 연안 항구에 들어가서 풍파의 위험을 피하고 결손을 보충하며, 배를 수리하고 땔감과 연료 등을 구매할 수 있다. 비용은 선주가 지급하되 그 지방관과 백성도 일본인의 곤경을 헤아려 진심으로 돌봐주고 필요한 물품을 보급함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혹시 양국의 배가 바다에서 파괴되어 배에 탔던 사람들이 표류하게 되면 그들이 가닿은 지역 주민들이 즉시 구조하여 생명을 건져주고 해당 지방관에게 보고한다. 해당 지방관은 이들을 본국으로 호송해주거나 그 근방에 체류하는 본국 관리에게 인도한다.

 

❚제7관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를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다. 따라서 일본국 항해자의 자유로운 해안 측량을 허락해서 그 위치와 수심을 조사한 후 도지(圖誌)를 제작해서 양국 선객이 위험한 곳을 피해 편안히 항해할 수 있게 한다.

제6관에서 일본의 배는 공식적인 개항장 외에 조선 어느 해안에든 상륙할 수 있게 되었다. 제7관의 ‘일본국 항해자’는 사실상 일본 군함이다. 이 조약에 근거해서 일본 군함은 1877년~1879년, 수시로 조선 동해안과 서해안을 측량했다. 측량 결과로 작성된 탐사 지도는 전투에 바로 활용할 수 있는 해도가 되었다.

 

❚제8관

이제부터 일본국 정부는 조선국의 지정된 각 항구에 시의에 따라 일본 상인을 관리하는 관을 설치하고, 양국에 관계되는 안건이 생기면 소재지의 지방관과 상의하여 처리한다.

 

❚제9관

양국이 우호 관계를 맺은 이상 피차 백성들은 각기 마음대로 무역한다. 양국 관리는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도 없다. 만일 양국 상인들이 거짓으로 물품을 판매하거나 채무를 갚지 않는 등의 일이 발생하면 양국 관리들이 빚진 상인을 엄히 잡아서 빚을 갚게 한다. 단, 양국 정부는 그것을 대리 변상할 수 없다.

 

❚제10관

일본국 사람이 조선국의 지정 항구에서 조선국 사람과 관계된 죄를 범하면 모두 일본 관리가 심의하여 처단하게 하고, 조선국 사람이 일본국 사람과 관계된 죄를 범하면 똑같이 조선 관리가 조사하여 처리하게 한다. 각자 그 국률(國律)에 따라 조사하고 판결하되 추호도 은폐나 비호가 없게 함으로써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하도록 노력한다.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인정한 것이다. 쌍방 의무인 것으로 규정했으나, 당시는 조선인 상인이 일본에 건너가 활발한 무역활동을 벌일 상황이 못 됐다. 이제 조선은 개항지에서 활동하는 일본 상인을 통제할 법적 근거를 잃었고, 더해서 일본 상인들이 조선 땅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은커녕, 체포하여 조사할 수도 없게 됐다.

 

❚제11관

양국이 이미 통호했으니 반드시 따로 통상장정을 체결하여 양국 상민의 편리를 도모한다. 아울러 지금 상의하여 작성한 각 조관 가운데 다시 보충해야 할 세칙은 조목에 따라 지금부터 6개월 이내에 양국에서 별도로 위원을 임명하여 조선국의 서울이나 강화부에서 만나 상의하여 결정한다.

이에 따라 일본은 1876년 7월, 이사관 미야모토를 파견하여 〈조일수호조규부록〉과 〈조일무역장정〉을 체결했다. 〈조일수호조규〉에 〈조일수호조규부록〉과 〈조일무역장정〉까지 합해서 ‘강화도조약’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12관

앞에서 의정한 11개 관의 조약은 이날부터 양국이 성실히 준수하고 시행한다. 양국 정부는 다시 이를 변혁할 수 없으며 영원히 성실하게 준수함으로써 우의를 두텁게 한다. 이를 위하여 조약서 2본을 작성해서 양국의 위임대신이 각자 검인하고 교부해서 증거 자료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