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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교동에 유배된 연산군

어우동이 궁금해서

1474(성종 5), 성종이 18세 나이에 홀아비가 됩니다. 이때 세상 떠난 왕비 공혜왕후는 불과 19세였어요. 자식 하나 두지 못하고 하늘로 갔습니다. 성종은 후궁 윤씨를 새로운 왕비로 삼았습니다. 왕비 윤씨가 1476(성종 7)에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연산군입니다. 이름은 이융이에요.

임금의 적장자로 태어나 만인의 우러름의 대상이 된 어린 연산군. 그러나 전혀 행복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부모 불화가 극심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윤씨의 질투가 아주 심했다고 해요. 아버지 성종이 결국에는 어머니 윤씨를 죽입니다. 연산군이 이렇게 엄마를 잃은 것은 7살 때입니다.

 

연산군 생모 폐비윤씨묘, 회묘(경기 고양)

 

오시에 임금이 대조전에서 훙()하였는데, 춘추는 38세이다.”

1494(성종 25), 실록에 실린 성종 사망 기록입니다. 성종은 13세에 즉위해서 25년간 나라를 통치하다가 38세에 하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 예기에 천자(중국 황제)의 죽음을 ’()이라 하고 제후국왕(조선)의 죽음을 ’()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따라 이라고 쓴 것입니다.

그러면, 양반 관료의 죽음은 뭐라고 했을까요? ‘’()입니다. 주요 신하가 사망하면 그의 일생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실록에 실었는데요, 그 글을 졸기(卒記)라고 합니다. 일반 백성의 죽음은 그냥, ‘’()라고 했습니다.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조선 제10대 임금으로 연산군(1476~1506, 재위:1494~1506)이 즉위했습니다. 이때 나이 19세였어요. 우리가 알고 있듯, 연산군은 폭군이었습니다. 좀 과장되어 알려지기는 했지만, 모진 짓을 많이 했고, 여자 문제도 지나치게 지저분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제법 번듯한 왕의 길을 가는 모양새였습니다. “죄인 중에 심문받다가 죽는 이들이 많다. 이는 심문하는 관리가 죄인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고 오로지 죄상만을 밝히려고 지나치고 모질게 고문하기 때문이다. 누구의 목숨이든 다 소중한 법이니 앞으로는 심문에 지나침이 없게 하라!” 이런 지시도 내렸던 연산군입니다.

초장에 꽉 잡아야 돼.”

이런 말이 있죠. 기선 제압의 효용성 같은 걸 의미합니다. 그런데요, 그 대상을 아내로 삼으면 좀 거시기하죠. “마누라는 말이야, 초장에 꽉 잡아야 돼.” 이런 말은 오히려 남자를 더 찌질하게 만드는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하들이 초장에 임금 연산군을 꽉 잡으려고 했어요. 왕권이 너무 강해지는 걸 막으려고 그랬겠지요.

어느 날, 연산군이 어우동에 대한 기록을 가져오라고 승정원에 시켰어요. 성종 때 죽임을 당한 어우동은 지금까지도 꽤 유명한 여인입니다.

그런데 승정원 승지들이 임금의 명을 거부하며 말합니다. “이런 더러운 사실을 상께서 보신다는 것은 부당합니다.” 조선의 승정원은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이요, 승지는 비서입니다. 그럼에도 망설임 없이 주군의 명령을 거부한 것입니다.

연산군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감히 임금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냐?”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져오지 마라.” 바로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연산군이 순순히 꼬리를 내렸는데도 승지는 계속 연산군을 윽박지릅니다.

어우동 얘기를 누구에게 들었는지 밝히시라고 다그칩니다. 임금에게 어우동을 말한 이를 처벌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쩔쩔매던 연산군이 겨우 한마디 합니다. “그대들이 나를 심문하듯 몰아붙이는데, 너무 심한 거 아니요?”

 

혀는 내 몸을 베는 칼

이랬던 연산군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성격 자체도 좀 포악한 기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 죽음의 진실을 세세히 알게 되면서 분노로 뜨거워진 연산군, 복수의 길을 갑니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열망이 더해지면서 수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피와 술과 여인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몹시 미움받은 자는 시체를 태워 뼈를 부수어서 바람에 날렸는데 이름하여 쇄골표풍(碎骨飄風)이라 하니, 형벌의 처참함이 이처럼 극도에까지 이르렀다.” 사관(史官)은 연산군이 내린 형벌의 잔인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무오사화(1498, 연산군 4), 갑자사화(1504, 연산군 10)를 거치며 연산군의 왕권은 지나치게 강화됐습니다. 조정 신료들, 바른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저 임금의 눈치만 살핍니다. 막가는 연산군을 전혀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바로 죽음입니다. 어느 날, 천식 앓는 신하가 그만, 기침을 했는데, 감히 임금 앞에서 기침했다고 처벌한 연산군입니다. , 나오는 기침을 어찌합니까.

 

환관이 차고 있는,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내 몸을 베는 칼이니, 입을 다물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몸이 편안하여 곳곳이 안온하리라.’라고 새긴 것을 조관들에게도 아울러 차게 하라.”

 

1505(연산군 11)에 연산군이 이렇게 명합니다. 함부로 입 놀리면 죽인다는 경고의 글을 쓴 신언패(愼言牌)’를 내시들에게 차게 했는데, 그걸 조정 신하들도 모두 차게 한 것입니다. 실록 원문은 구시화지문 설시참신도 폐구심장설 안신처처뢰(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閉口深藏舌 安身處處牢)”입니다.

참으로 끔찍한 입막음입니다만, 곱씹어 볼 만한 부분도 있습니다. 우리 몸에서 가장 무서운 흉기가 혀 아닌가요. 혀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남만 베는 칼이 아니라 나 자신을 베는 칼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말 한마디 잘못해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정치인들을 흔하게 보잖아요.

정치인보다 더 말 한마디에 신중해야 할 사람은 교사입니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무심히 던진 한마디가 수십 년 지나도록 힘이 되어주기도 하고, 거꾸로 고통과 증오로 남기도 합니다. 전교 1등 학생에게 이런 돌대가리 녀석.”이라고 말하면 농담이 됩니다만, 하위권 학생에게 그런 말을 쓰면, 심각한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연산군이 신하들의 입만 막은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해 겨울, 사냥을 나갔습니다. 군사들이 몰이꾼으로 동원됐습니다. 별안간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해졌습니다. 비가 올 것 같습니다. 겨울비입니다. 어느 군사가 옆 사람에게 푸념했습니다.

빗줄기가 아무리 거세도 주상께서는 사냥을 멈추지 않을걸세. 참 황당한 일이지. 주상은 군졸을 아끼는 마음이 없으셔.” 이 말이 연산군 귀에 들어갔습니다. 연산군은 그를 죽였습니다. 공포정치의 시기였습니다.

 

고맙고, 고맙다

결국은 중종반정이 일어납니다.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왕이 되었습니다. 폐주 연산군은 교동으로 유배됩니다. 특이하게도 분홍 옷을 입고 갓을 쓰고 교동으로 출발합니다. 가마에 타며 말하기를, “내가 큰 죄가 있는데, 특별히 상의 덕을 입어 무사하게 간다.”라고 말했습니다. 폐위에 대한 좌절과 분노보다는 사형되지 않음에 대한 안도가 더 컸던 것 같아요.

연산군이 폐위되고 유배지 교동에 도착한 것은 1506(중종 1) 9월 초입니다. 교동까지 연산군을 호위했던 심순경 등이 궐에 들어 중종에게 보고합니다.

안치한 곳에 이르니, 위리한 곳이 몹시 좁아 해를 볼 수 없었고, 다만 한 개의 조그마한 문이 있어서 겨우 음식을 들여보내고 말을 전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폐왕이 위리 안에 들어가자마자 여시(女侍)들이 모두 목놓아 울부짖으면서 호곡하였습니다. 신 등이 작별을 고하니, 폐왕이 말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 수고하였다. 고맙고 고맙다.’라고 하였습니다.”

여시는 나인 즉 궁녀를 말합니다. 궁녀 4명과 내시 2명이 따라와 연산군을 시중들었다. 연산군은 자신을 호위해 온 이들이 돌아갈 때, 몹시 고맙다고[多謝多謝] 인사했습니다.

 

연산군 호송 모형(교동 연산군 유배지, 화개정원 안)

 

갈 사람 가고 남을 사람만 남았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귀양살이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덜컥. 연산군이 큰 병에 걸리고 맙니다. 건강한 사람도 이리 심하게 환경이 바뀌면 아플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연산군은 어릴 때부터 병치레가 잦았습니다. 별의별 병을 다 앓았어요. 즉위 초, 21살 그 창창한 나이에 한 가지 병이 좀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겨고통스럽다고 호소했었습니다.

원체 부실한 몸, 쌓이는 분노, 커가는 불안감, 여기에 자책까지 심하게 했을 테고. 더해서 술과 여자로 무절제한 도피! 안 아프면 이상할 정도. 그래도 몸을 지탱했던 것은 긴장의 끈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이제 폐위되고 유배되면서 긴장의 끈이 풀리고 몸도 가라앉게 된 것 같습니다.

교동에 유배되고 2개월 지난 어느 날, 연산군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중종이 보낸 내의가 치료하러 오고 있었으나 연산군은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향년 31. 이보다 앞서 중종 조정은 연산군의 네 아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넷 모두 열 살도 안 된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연산군이 아들들 보러 서둘러 하늘로 간지도 모르겠습니다.

연산군은 교동 어딘가에 묻혔습니다. 그랬는데 8년 만인 1513(중종 8)에 양주 해촌으로 묘를 옮깁니다.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가 중종에게 이장을 요청했고 중종이 허락해서 이루어진 이장입니다. 양주 해촌은 지금 서울 도봉구입니다. 도봉구 방학동에 연산군 묘가 있습니다.

 

연산군묘(서울 도봉구)

 

지금은 사라진 연산군 적거지비와 안내판(교동읍성)

 

교동에 연산군 유배지로 알려진 곳이 몇 있습니다. 그 가운데 교동읍성 안이 가장 유력한 곳으로 오래도록 전해졌습니다. 교동읍성 동쪽 언덕에 燕山君謫居址’(연산군 적거지)라고 새긴 비와 안내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석과 안내판 모두 사라졌습니다. 대신 화개정원 연산군 유배지를 연산군이 유배된 곳으로 공식화하고 있습니다.

강화투데이2023.07.15. 42.

 

 

《연산 광해 강화》, 연산군과 광해군을 말하다

연산군과 광해군, 굳이 덜어내지 않고 더하지도 않고 그이들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강화도와의 인연도 돌아본다. 다음은 《연산 광해 강화》의 서문이다.  들어가는 글 연산군, 광해군.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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