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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에 유배된 연산군 어우동이 궁금해서 1474년(성종 5), 성종이 18세 나이에 홀아비가 됩니다. 이때 세상 떠난 왕비 공혜왕후는 불과 19세였어요. 자식 하나 두지 못하고 하늘로 갔습니다. 성종은 후궁 윤씨를 새로운 왕비로 삼았습니다. 왕비 윤씨가 1476년(성종 7)에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연산군입니다. 이름은 이융이에요. 임금의 적장자로 태어나 만인의 우러름의 대상이 된 어린 연산군. 그러나 전혀 행복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부모 불화가 극심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윤씨의 질투가 아주 심했다고 해요. 아버지 성종이 결국에는 어머니 윤씨를 죽입니다. 연산군이 이렇게 엄마를 잃은 것은 7살 때입니다.  “오시에 임금이 대조전에서 훙(薨)하였는데, 춘추는 38세이다.”1494년(성종 25), 실록에 실린 성종 사망 .. 더보기
제1회 강화 청소년 역사토론대회 "강화역사 공부도 하고, 상금도 타고"...제1회 강화 청소년역사토론대회 개최 - 인터넷 강화뉴스 강화역사를 주제로 한 청소년토론대회가 개최된다.강화청소년역사토론대회 조직위원회(위원장 유담)는 9월 23일 강화교육지원청 마니산홀에서 「제1회 강화 청소년역사토론대회」를 개최한다 www.ganghwanews.com 2023.09.27. 역사토론대회 결과 기사 링크 "강화는 섬 전체가 역사를 화석처럼 간직한 곳, 스토리의 잠재력이 강화의 경쟁력" - 인터넷 강화 제1회 강화 청소년역사토론대회가 지난 23일 참가 학생과 학부모, 교사, 지역인사 등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강화교육지원청 마니산홀에서 성황리에 진행됐다.이날 www.ganghwanews.com 더보기
조선과 명·청, 한국과 미·중 조선의 명에 대한 의리, 실로 대단했다. 명나라는 진정으로 조선에 감사해야 했다. 본디 사대란 큰 나라 작은 나라 피차 기본적인 섬김의 자세가 필요한 법이니. 그런데 명나라의 조선 인식은 어떠했을까. 그저 조금 더 각별한 오랑캐 정도이지 않았을까. 애정과 믿음? 글쎄. 명나라 장수 주문욱의 조선에 대한 인식은 이랬다. 아마도 명나라 사람들 대개가 비슷했을 것이다. 조선은 비록 약하지만 우리의 울타리이다. 우리를 도와 오랑캐를 제압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우리를 배반하여 오랑캐에게 보탬이 되기에는 충분하다. 명에는 조선도 견제와 감시의 대상일 뿐이다. 후금(청)은 조선이 명과 손잡고 자기네를 칠까 봐 걱정했고 명나라는 조선이 후금(청)과 손잡고 자기네를 칠까 봐 걱정했다. 아무튼, 조선이 소중한 나라이기는 했.. 더보기
상식이 무너지는 교실 잘 가르쳤다. 소위 명문대 갔다. 판검사 하고, 교수 하더니 국회의원이 되었다. 장관이 되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초등학교는 나온 건가.’ 싶은 언행으로 국민을 맥빠지게 하고 분노하게 하는 인사들이 있다. 입으로는 맨날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외치지만, 사실은 지나치게 자기 이익만을 탐하는 사람들이 많다. 너무. 不法도 正法인 그들의 탐욕보다도 그들의 뻔뻔함이 더 기막히다. 염치가 진짜 없다. "잘못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이걸 못한다. 안한다. 잘 가르친 것인가? 아니다. 잘못 가르친 것이다. 똑똑한 머리보다 따듯한 가슴을 키우는 교육이 진짜 교육이다. 성적이 중요하고 입시가 중요하다. 그래도 마음 교육을 포기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염치와 배려를 알게 하는 교육이 진짜 교육이다. 그게 마음 교.. 더보기
강화도조약 내용과 해설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전문대일본국과 대조선국은 평소 우의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우의가 미흡한 것을 고려하여 다시 옛날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여 친목을 공고히 한다. 그러므로 일본국 정부에서는 특명전권변리대신 육군중장 겸 참의 개척장관 구로다 키요타카와 특명부전권변리대신 의관 이노우에 카오루를 조선국 강화부에 나아가게 하고 조선국 정부에서는 판중추부사 신헌과 부총관 윤자승에게 유지(諭旨)를 받들어 조관을 의논하여 세우게 한 것이다. 아래에 열거한다. ← 애초 일본이 작성하여 체결을 요구했던 초안에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와 ‘조선국왕 전하’ 라는 호칭이 있었다. 조선의 요구로 삭제되었다. 일본도 이 부분을 조선이 절대 수용하지 않을 것임을 짐작했을 것이다. 폐하와 전.. 더보기
시집, 《무당벌레》와 《함바집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짓기 어려운 글이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상대방이 시인이라고 하면 그이의 작품을 보기도 전에, 바로, 존경할 준비가 됩니다. 그동안 살아오며 시집을 꽤 읽었습니다. 후딱 한 권을 다 읽어버리지 않고 야금야금 아껴가며 읽습니다. 때로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때로는 가슴이 촉촉해졌습니다. 유명한 시인들의 시집을 주로 보았습니다. 강화에도 무슨, 무슨 문학회 활동을 하며 시를 쓰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고백하건대, 그런 분들의 시는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이제, 반성합니다. 적절한 비유는 아닌 것 같은데 내공 깊은 ‘재야의 고수’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분들 중에 구경분 시인과 임경자 시인을, 그이들의 시집으로 만났습니다. 조금 거만한 마음으로 시집을 열었고 아주 겸손한 마음 되어 마지.. 더보기
창왕과 영창대군, 유배 오다 그 섬에 가고 싶다!언제 갔던 게 마지막이었더라. 헤아려보니 십 년도 더 지났네요. 어디? 거제도! 거제도는 풍광이 참 아름답고 역사 유적도 다양합니다. 또 가보고 싶은데 아휴, 너무 멀어서 이제 엄두가 안 납니다. 조선시대, 전국의 섬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귀양 갔던 유배지가 거제도입니다. 거제도, 제주도, 남해도, 진도, 흑산도 순이었어요. 강화는 순위에 들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강화도와 교동도가 유배지로 널리 알려진 이유가 무엇일까요?귀양 왔던 사람들의 신분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강화에 유배된 사람들은 대개 왕족이거나 폐위된 왕이었습니다. 폐왕이나 왕족은 언제든 역모에 휩쓸릴 가능성이 큰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려면 도읍에서 가까운 섬, 강화가 가장 적합한 .. 더보기
묘호(廟號) 톺아보기 ②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했다. 묘호는 선종(宣宗)으로 정해졌다. 그런데 며칠 뒤 대신들이 “대행대왕께서는 나라를 빛내고 난(亂)을 다스린 전고에 없던 큰 공적이 있으니, 진실로 조(祖)라고 일컫는 것이 마땅”하다고 아뢰었다. 광해군은 자기 뜻도 그러하다며 즉시 추진하라고 했다. 그러자 사간원 정언 이사경이, 묘호를 조로 정하면 후세에 말을 듣게 될 것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이후 조정 신하들의 의견이 다양하게 나왔는데 결국은 묘호를 종(宗)으로 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를 예조가 광해군에게 보고했고 광해군은 조정 의견을 수용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2월 25일, 선조의 묘호가 선종(宣宗)으로 공식 확정되었다.  즉위 초, 광해군은 유영경 등 반대세력 제거와 .. 더보기
묘호(廟號) 톺아보기 ① 충무공 이순신!충무(忠武)라는 두 글자 시호에 공(公)을 붙여서 충무공이라고 부른다. 시호(諡號)란, 어떤 두드러진 인물이 사망한 뒤 임금이 정해주는 존칭이다. 생시에 율곡이라는 호를 쓴 이이는 사후에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래서 문성공 이이라고 한다. 임금도 시호를 받는다. 그런데 글자 수가 점점 길어지면서 오히려 현대인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정조의 시호가 문성무열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라는 걸 누가 굳이 기억하려고 할까. 우리에게 정조는 정조로 충분하다. 아, 드라마 덕분에 이름도 안다. 정조의 이름은 이산!  정조(正祖)! 이런 임금 칭호를 묘호(廟號)라고 한다. 종묘에 모실 때의 호칭이다.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생전의 업적을 고려해서 적절한 묘호를 올린다. 조(祖)나 종(宗)으로 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