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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광해군, 강화에 갇히다

땅굴 파는 사내가 있었다

강화도호부성 서문 안 어느 집, 한 사내가 집 밖으로 나가려 땅굴을 판다. 사방은 겹겹 울타리로 막혔고 지키는 이들까지 있으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삽 한 자루조차 없다. 땅을 파는 장비는 가위와 인두 정도. 벌써 며칠째 흙을 찍어내고 있다. 흙과 땀으로 얼룩진 스물여섯 살 사내의 눈빛이 처절하다. 사내의 이름은 이지. 폐세자 이지(1598~1623)이다. 폐세자라면?

그렇습니다. 광해군의 아들입니다. 무탈했다면, 아버지를 이어 조선의 제16대 임금이 됐을 사람입니다.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습니다. 연산군은 홀로 교동에 유배됐었지만, 광해군은 가족과 함께 왔습니다. 광해군과 폐비가 강화부성 동문 쪽에 갇혔고 폐세자와 폐세자빈은 서문 쪽에 갇혔습니다. 이때가 1623(광해군 15) 3월입니다.

스무날 넘게 굴을 판 폐세자 이지, 드디어 다 뚫었습니다. 캄캄한 밤을 기다려 담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나졸에게 붙잡혀 끌려가고 맙니다. 폐세자 끌려간 지 사흘째, 낙담한 폐세자빈이 목을 매 자결합니다.

폐세자 이지를 벌하러 한양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의금부 도사 이유형입니다. 이유형은 자결하라는 인조의 명을 전합니다. 이지는 처연하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광해군 갇힌 동쪽을 향해 절합니다. 부모님께 올리는 마지막 인사였습니다. 인사 마친 후 목을 맸습니다.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어느새 가을이 깊었습니다. 폐비 유씨 그러니까 광해군의 부인이 병 앓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강화로 유배 온 지 6개월여 만입니다. 의사가 아니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화병(火病)입니다. 청천벽력으로 닥친 폐위, 유배, 며느리 자결, 아들 사망. 성할 수가 없었습니다.

 

광해군 묘(경기 남양주)

 

광해군, 이제 혼자입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며느리, 아들, 아내를 모두 잃었습니다. 이때 광해군 나이 49. “삼시 끼니를 물에 만 밥을 한두 숟갈 뜨는 데 불과할 뿐이고 간혹 벽을 쓸면서 통곡하는데 기력이 쇠진하여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 지경으로 겨우 목숨을 이어갑니다.

그래도, 세월이 약이라고 몸과 마음이 점차 회복되고 귀양살이도 적응해 갑니다. 멘탈이 상당히 강했던 것도 같습니다. 연산군은 유배 뒤 불과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만, 광해군은 오래도록 풍파를 견뎌냈습니다.

 

중립외교를 펼치다

광해군은 34세에 임금이 되어 49세까지 햇수로 16년간 즉위했습니다. 폐위되고 시작된 유배 생활은 67세에 사망할 때까지 19년간 계속됐습니다. 재위 기간보다 유배 기간이 더 길어요. 광해군의 귀양살이는 강화에서 시작해 제주도에서 끝나게 되는데요, 대략적인 과정은 이렇습니다.

 

광해군 유배지로 전하는 교동읍성 동벽 구간

 

1623(인조 1) 3월에 강화도로 귀양 와서 1636(인조 14) 12월에 교동으로 이배됩니다. 1637(인조 15) 4월 이후에 제주도로 옮겨지고 그곳 제주에서 1641(인조 19)에 세상을 떠납니다. 얼추 따져서 강화도 유배 기간은 14년여, 교동도 유배 기간은 수개월, 제주도 유배 기간은 4년 정도였습니다. 14년여 강화도 유배 시기에 임시 귀양지로 몇 번 옮겨지기도 했습니다. 이괄의 난 때 충청도 태안으로, 정묘호란 때는 교동도 거쳐 정포(내가면 외포리)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광해군은 재위 기간에 자신보다 정통성에서 앞서는 형 임해군을 교동으로 유배 보내 죽였고 아우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보내 죽였습니다. 왕위를 지키려고 형과 동생을 강화로 내쳐 죽였으나 결국은 자신도 강화로 유배되고 말았습니다.

예전에 학교에서, 광해군을 연산군과 같은 폭군이라고 배웠습니다. 폐위되어 마땅한 임금으로 치부했습니다. 지금은 광해군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으로 바뀌었습니다. 특히 중립외교라고 하는 광해군의 외교정책이 높게 평가됩니다.

비록 가짜를 내세운 형식이기는 하나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를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극장에서 보았습니다. 광해군 역을 맡은 이병헌은 정말 연기를 잘하는 배우입니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의 충돌이라는 심각한 국제 정세 속에서 전쟁을 막으려는 슬기로운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중립외교를 펼친 것입니다. 조정 신료 대부분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해준 명나라에 올인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오랑캐 후금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듣지 않았습니다. 명분보다 실리였습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 대한민국의 외교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교훈으로 삼을만한 사례가 광해군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는 가치나 명분보다 국익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뜨거운 가슴보다 냉철한 머리로 판단해야 할 영역이 외교입니다.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진정한 친구도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비판하며 일어나 정권을 잡은 인조는 명나라에 더 다가가고 후금을 멀리하는 변화를 꾀합니다. 현실보다 명분을 택한 것입니다. 꼭 이것 때문은 아니지만, 인조 정권 때 조선은 후금의 침략을 당하게 됩니다. 정묘호란(1627)입니다. 후금이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침략한 병자호란(1636)도 겪게 됩니다. 나라의 피해가 컸습니다. 특히 백성들이 입은 참혹한 피해는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염하에 배다리를 설치하자

저는 인조보다 광해군을 더 높게 평가합니다. 저의 평가 기준은 임금이 얼마나 백성을 생각하는가입니다. 정묘호란 때 인조는 강화로 피란 왔습니다. 어느 날 인조가 연미정에 갔다가 김포 쪽에서 배 한 척 건너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피난민들이 타고 오는 걸 겁니다.

인조는 앞으로 배 한 척도 강화로 건너오지 못하게 막으라고 합니다. 한 신하가, 살려고 피란 오는 백성을 어찌 막습니까,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자 인조가 하는 말, 일이 이미 위급한데 어찌 작은 폐단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 어찌 백성의 목숨이 작은 폐단이란 말인가요.

 

염하(강화해협)

 

반면에 광해군은 강화와 김포 사이 염하에 부교(浮橋)를 설치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만약에 후금이 쳐들어오면 조정을 강화로 옮길 것이다, 임금이야 배 타고 건너면 된다, 그렇지만, 수많은 백성은 배를 타지 못해 후금군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규모 백성을 신속하게 강화도에 들게 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래 배다리를 놓자! 이게 광해군의 생각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사실, 폭군이라 평하기 어렵습니다. 폐위되어 마땅한 군주도 아니었습니다. 만약 광해군이 폐위되지 않았다면, 전쟁 양상이 상당히 달라졌을 겁니다. 조금 과장 섞인 기대로 말하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궁궐, 궁궐 또 궁궐

그럼에도, 저는 이제, 임금 광해군에게서 느끼는 아쉬움을 말하려고 합니다.

광해군은 탁월한 국제 정세 분석가이고 전략가였습니다. 그런데 실천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전쟁을 예방하는 방법을 외교에서만 찾으면 안 됩니다. 우선은 국방력을 갖춰야 합니다. 강한 군사를 육성하고 각종 군사 시설을 갖추고 군량과 무기 등을 넉넉하게 비축해야 합니다.

그런데 광해군은 멋있는 말만 했지, 진정성 있게 국방력 강화를 추진하지 못했습니다. , 돈입니다. 돈이 있어야 군대도 키우고 군량도 확보하고 방어 시설도 세웁니다. 임진왜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나라 살림은 엉망이고 백성들 삶은 피폐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광해군이 집중해서 추진한 일은 국방력 강화가 아니라 궁궐 건설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모두 불태웠습니다. 궁궐을 새로 지어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너무 단기간에 많이 지은 것이 문제입니다.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 경운궁(덕수궁), 창경궁, 인경궁, 경덕궁(경희궁)을 광해군 때 지었습니다. 백성들은 각종 물품을 끊임없이 바쳐야 했고 노동력도 징발당했습니다. 차라리 전쟁통이 나을 지경입니다. 신하들이 간곡하게 말렸습니다. 백성들의 무너진 삶을 생각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광해군은 듣지 않았습니다. 비상시에 쓰려고 강화에 비축해 둔 곡식까지 가져다 궁궐 공사에 쓰기도 했습니다. 국방력 강화를 그리도 간절하게 외치던 광해군입니다. 말과 행동이 너무 달랐습니다.

1616(광해군 8), 궁궐 조영 담당 관서에서 광해군에게 건의했습니다. 산지에서 박석을 캐 수송해 오는 일이 백성들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되니, 경복궁 뜰에 깔린 박석을 걷어다 쓰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광해군이 경복궁도 중건해야 하니, 깔아놓은 돌을 모두 가져다 쓰지는 말고조금만 옮겨다 쓰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나, 경복궁까지 다시 세울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박석(薄石, 두께가 얇고 넓적한 돌) 산지 중 한 곳이 강화입니다. 그거 캐서 옮기느라 주민들이 죽어났어요. 강화부사 이안눌이 비변사를 통해 하소연했습니다. “그동안 강화부에서 나는 박석을 창경궁 등 궁궐 공사장으로 운송한 것이 몇천만 장인지 모릅니다. 이번에 또 박석 1만 장에 석회 530여 석을 보내라고 하여 주민들의 원성이 매우 높습니다.”

주민들의 원성은 강화뿐이 아니었습니다. 전국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광해군이 폐위된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나친 궁궐 건설입니다. 광해군은 창덕궁 공사 중에 즉위해서 인경궁 공사 중에 폐위됐습니다. 재위 기간 내내 공사중이었습니다. 인경궁은 인조 즉위 뒤 해체되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창경궁 통명전

 

사관의 한탄이 실록에 실렸습니다 “<광해군이 궁궐 건설에> 어떤 극단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고 마음과 힘을 다 기울였으니, 만약 궁궐을 짓고 보수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면 어찌 어지럽거나 망하는 화가 있었겠는가.”

강화투데이2023730, 43.

 

 

 

《연산 광해 강화》, 연산군과 광해군을 말하다

연산군과 광해군, 굳이 덜어내지 않고 더하지도 않고 그이들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강화도와의 인연도 돌아본다. 다음은 《연산 광해 강화》의 서문이다.  들어가는 글 연산군, 광해군.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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