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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고려 강화 도읍기의 문화 예술 - 팔만대장경, 금속활자, 고려청자

팔만대장경

1232(고종 19)부터 1270(원종 11)까지 39년 동안 강화는 고려의 수도였습니다. 고려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문화적 성취를 이루어냅니다. 그 중심에 강도(江都)가 있었습니다. 팔만대장경과 상정고금예문이 강화에서 탄생했습니다. 국보급 고려청자 상당수가 강화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불경 등 부처님 말씀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통틀어 대장경(大藏經)이라고 합니다. 대장경을 인쇄해서 보급할 목적으로 목판에 새긴 것을 대장경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팔만대장경은 엄밀히 말하면 팔만대장경판입니다. 경판이 8만 장이 넘어서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릅니다.

팔만대장경은 재조대장경’, ‘고려대장경’, ‘강화경판(江華京板) 고려대장경등으로도 불립니다. 문화유산(국보) 공식 명칭은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입니다. 그런데 공식 명칭으로 호칭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팔만대장경의 다른 이름들 가운데 주목해 볼 것이 재조대장경입니다. ()재방송의 그 입니다. 그러니까 재조(再雕)는 다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만든 대장경이라는 의미죠. 그러면 고려에서 처음 만든 대장경은 무엇이라고 하나. ‘초조대장경입니다.

고려 초에 초조대장경을 조성했습니다. 부처님의 힘을 빌려 거란군을 무찌르겠다는 열망을 담았습니다.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모셔졌던 초조대장경을 1232(고종 19)에 몽골군이 불 질렀습니다. 그래서 강화도 정부가 주도하여 대장경 조판을 다시 하니, 그것이 바로 팔만대장경이요, 재조대장경인 것입니다. 초조대장경이 거란군을 물리치게 해달라는 기원을 담았다면, 재조대장경은 몽골군을 무찌르게 해달라는 소망을 담았습니다.

송해면 고려천도공원에 국난극복-팔만대장경이라고 새긴 탑 모양의 조형물이 있습니다. 그 안내판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고려는 거란의 침략에 맞서 지속적인 항쟁을 이어나가며, 국난극복의 의지를 모아 팔만대장경을 판각하여 완성하였습니다.” 아니죠? 안내판 수정이 꼭 필요합니다.

1236(고종 23)에 팔만대장경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1251(고종 38)에 이 거대 작업이 종료됩니다. 1236년부터 16년 걸렸습니다. 사전 준비 작업 기간까지 포함한다면 조금 더 걸렸을 것입니다.

대장경 조성 작업을 기획하고 추진하고 총지휘한 기구가 대장도감(大藏都監)입니다. 당연히 강화에 대장도감이 있었습니다. 대장경 조성을 강화에서 다 한 것은 아닙니다. 경상도 남해와 경주 등에 분사대장도감을 설치하고 그곳에서도 판각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강화 대장도감이 본사라면 분사대장도감들은 지사가 됐던 셈입니다.

 

강화군 선원면 선원사지(사진출처 강화군청)

 

선원사는 강도시기에 창건된 절입니다. 최우가 1245(고종 32)에 세웠는데 조선 초쯤에 폐사되고 지금은 터만 전합니다. 오백여 칸 크고 작은 건물에서 수백 명의 승려가 생활했다고 합니다. 당시 고려에서 손꼽히는 대규모 사찰이었습니다. 환도 이후에도 번성했던 이 큰 절이 어떤 연유로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선원사가 팔만대장경 판각 성지로 알려졌지만, 사실 좀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선원사가 세워진 1245년에는 이미 대장경 판각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습니다. 처음부터 선원사에서 주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창건 이후 어떤 방식으로든 조성 사업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선원사의 위치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습니다. 그동안 선원사지를 몇 차례 발굴했지만, 선원사가 확실하다고 말할 만한 유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강화의 읍지인 속수증보강도지등에 충렬사 근처에 선원사가 있었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지금의 자리가 맞다, 아니다, 의견이 나뉩니다.

 

금속활자

인쇄 문화 강국, 고려입니다. 팔만대장경 같은 목판 인쇄는 물론이고 금속활자까지 세계에서 처음으로 사용했으니까요. 상정고금예문이 기록상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말해집니다. 1234~1241년 사이 어느 해엔가 인쇄한 것 같고요, 그 장소도 강화였습니다.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의 말뜻을 풀어봅니다. 고금(古今)의 예()를 상정(詳定, 상세하게 논의하여 규정함)한 글이라는 뜻입니다. 나라 제사를 비롯한 각종 의식 절차, 복식, 음악 등을 종합적으로 규정한 의례집이 상정고금예문입니다.

이 책은 고려 의종 때인 12세기 중엽에 나라의 명을 받은 최윤의 등에 의해 편찬됐습니다. 강화에서 처음 제작된 책은 아닙니다. 강화로 천도할 때 담당 관청에서 챙겨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최우가 한 부 갖고 있었지요.

 

주자(鑄字)를 사용해서 28본을 인출하여 제사(諸司)에 나누어 보내 간수하게 하니, 모든 유사(有司)는 일실 되지 않게 삼가 전하여 나의 통절한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

동국이상국집

 

최우는 자신이 갖고 있던 상정고금예문을 저본으로 해서 새로 28부를 인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주자(鑄字)를 사용하라고 했네요. 주자가 곧 금속활자입니다. 이렇게 나온 책을 관련 부서에 나눠주면서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라고 했어요. “나의 통절한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 간곡하게 호소했지만, 지금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 그러면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직지심체요절이지요. 흔히 직지라고 줄여서 부릅니다. 1377(우왕 3)에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 책인데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가 있습니다.

직지는 강화와 별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말해지는 오류가 있습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 정족산사고(또는 외규장각)에서 직지를 훔쳐 갔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19세기 말에 조선에 왔던 프랑스인 동양학자가 직지를 구입해서 가져간 것입니다.

서양에서 처음으로 금속활자로 인쇄한 사람은 독일의 구텐베르크입니다. 1450년쯤이었다고 해요. 고려에서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하고 대략 200년 뒤의 일입니다. 고려에서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하고 70여 년 뒤입니다.

금속활자는 인쇄를 목적으로 발명된 것이죠. 인쇄하려면 종이와 먹이 필요합니다. 글자가 번지지 않고 인쇄 중에 찢어지지 않으며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는 종이! 금속에 적절하게 묻어서 또렷하게 글자를 찍어낼 수 있는 기능성 먹!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활자·종이·먹 모두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금속활자 기념비(강화군 갑곶돈대)

 

강화전쟁박물관(갑곶돈대) 마당에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기념비(世界金屬活字發祥中興紀念碑)’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발상發想이라고 쓰지요. 어떤 생각을 해낸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이 비석 이름에 쓴 發祥이란,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가질만한 일이 처음으로 나타남을 뜻합니다.

곧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개관합니다. 어디에 있나? 인천 송도입니다. 전국 여러 시도가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을 유치하려고 치열하게 경쟁했는데 최종 승자는 인천시였습니다. 아마도 우리 강화가 큰 역할을 했을 겁니다. 팔만대장경과 금속활자의 고향이 강화입니다. 점자 훈맹정음을 만드신 박두성 선생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 교동입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전경(출처 경인일보)

 

고려청자

이제 마지막으로 고려청자를 짚어봅니다.

강화 도읍기에 강화에서 고품질의 청자가 생산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전라도 부안과 강진 등에서 제작한 청자가 강화도로 공급됐습니다. 왕릉과 지배층의 무덤에 그 청자도 같이 묻혔어요. 대략 40년 도읍이었으니 강화에서 사망한 이가 얼마나 많았겠어요. 함께 묻힌 청자도 아주 많았을 겁니다. 그런데 주인과 함께 영원히 땅속에 잠든 청자는 거의 없을 것이에요. 다 세상에 나와버렸습니다.

발굴이 아니라 도굴입니다. 개항 후 들이닥친 일본인 도굴꾼들이 개성과 강화의 산이란 산은 다 헤집고 다녔습니다. 욕하면서 배운다고 일본인에게 기술 배운 우리나라 사람들도 도굴꾼이 되었습니다.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사진출처 문화재청)

 

지금 이름난 청자 대개가 강화에 묻혔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한민국 대표 상감청자인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국보)이 발견된 곳이 강화입니다. 무신집권자 최우의 무덤에서 나왔다고 해요. 최우의 무덤이 고려산 어딘가에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그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은 지금 간송미술관에 있습니다.

간송은 전형필(1906~1962)의 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야마모토라는 사람이 강화에서 이 청자를 도굴해서 스즈키에게 천 원에 넘겼다고 합니다. 천 원이면 당시 서울에 번듯한 기와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대요. 마에다라는 이가 6천 원에 사들여서 무려 2만 원을 부릅니다. 전형필이 이 매병을 2만 원에 삽니다. 기와집 스무 채 값을 선뜻 지불한 겁니다.

이 소식을 듣고 일본에서 도자기 수집가가 전형필을 찾아옵니다. 그는 전형필에게 4만 원에 팔라고 간청합니다. 더 달라면 더 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전형필은 거절합니다. 돈 불리려고 산 게 아니었기 때문이죠.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마음이었습니다. 또 다른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청자 동화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사진출처 문화재청)

 

역시 국보인 청자 동화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도 강화에서 출토됐습니다. 최우 아들 최항의 묘에서 나왔다고 전합니다만, 그게 아니라 송해면 어디선가 나왔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최항의 묘는 진강현 서쪽 창지산 기슭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청자는 지금 리움미술관에 있는데요, 원래 이름은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였습니다. 이름 바꿔 청자 동화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며 리움미술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해보니 청자동채 연화문 표형 주자라고 표기했네요.

(이 글은 2020년에 강화문화원이 출간한 고려 대몽항쟁과 강화 천도에서 해당 내용을 발췌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강화투데이, 2023615,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