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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김포 덕포진의 역사

한강.

참으로 먼 길이었습니다. 흐르고 흘러 하성면 시암리에서 임진강을 만났습니다. 몸 섞어 하나 된 둘이는 드디어 바다가 되었습니다. 염하입니다. 흘러 흘러 도착한 곳, 덕포진이에요.

병자호란(1636~1637) 그때 강화에 봉림대군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인조와 형 소현세자는 남한산성에 있었고요.

문수산 아래 진을 친 청군이 강화도를 침공합니다. 막아 싸워야 할 책임자, 검찰사 김경징과 강화유수 장신은 1등으로 도망갔습니다. 왜 이렇게 도망간 지도자가 많은지….

강화는 청나라 군대에 점령됐고, 봉림대군은 삼전도로 끌려갑니다. 아버지 인조는 거기서 풀려났지만, 아들 봉림대군은 청나라까지 가야 했습니다. 인질입니다. 겨우 돌아와 즉위했습니다. 그이가 효종입니다.

효종은 강화도 방비에 더욱 신경을 씁니다. ‘진’과 ‘보’라는 해안 경계부대를 설치합니다. 새로운 부대를 창설하는 것은 여러모로 큰 부담입니다. 그래서 타지에 있는 부대를 강화도로 옮기는 방법으로 강화도의 군사력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우선 1655년(효종 6)에 월곶진, 제물진, 초지진을 강화도에 둡니다. 월곶진은 교동도에서, 제물진은 인천에서, 초지진은 경기도 안산에서 이설(移設)한 것입니다. 이후 광성보 등이 들어서면서 숙종 무렵 12진·보 체제가 성립됩니다.

 

이때 정포만호 정연과 덕포첨사 조종선이 선봉이었는데, 정연이 적선 1척을 함몰시키고 장차 전진하려고 하였으나 장신이 징을 쳐서 퇴군시키므로 정연 등도 모두 물러갔다.

 

청군의 강화도 침공 당시, 염하 상황입니다. 덕포진 첨사와 정포진 만호가 전선을 이끌고 싸우려 하는데 강화유수 장신이 그들을 불러들여 후퇴한 겁니다.

그러면 이때 덕포진은 강화에 있던 걸까요? 통진에 있던 걸까요?

강화에 있던 겁니다. 효종이 진과 보를 설치하기 한참 전에 강화에 덕포진이 있었습니다. 육군이 아니라 수군 부대입니다.

강화에 덕포진이 언제 설치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광해군이 “지난 선왕조(先王朝) 때 강화 땅에다 덕포(德浦)를 신설”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통상 ‘선왕조’는 직전 임금을 가리키니, 선조 때 덕포진이 설치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대략 1597년(선조 30)~1598년(선조 31) 무렵일 것입니다.

 

김포 덕포진 포대

 

1666년(현종 7)에 강화 덕포진이 통진(지금 대곶면)으로 옮겨집니다. 1665년(현종 6) 10월에 통진의 신촌으로 옮긴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다음 해 1666년(현종 7)에 덕포진 이설이 완료된 것입니다.(강화의 덕포진 자리에는 나중에 덕진진이 설치됩니다.)

강화의 진과 보를 육군 중심으로 개편하려는 의도로 덕포진을 통진에 이설한 것입니다. 이때 강화의 또 다른 수군 부대인 철곶진이 풍덕으로 가고, 정포진은 교동도로 갔습니다.

그런데 잘못된 결정이라는 비판이 바로 일어납니다. 수군의 필요성이 다시 언급됩니다. 결국 1669년(현종 10)에 현종이 명합니다. “철곶·덕포·정포 3진을 다시 강화에 설치하라!”

그래서 철곶진이 강화도로 돌아갔고 정포진도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덕포진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통진의 국방시설로 남아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덕포 백성들이 다시 강화로 옮기는 걸 좋아하지 않고 덕포진 첨사도 통진이 편리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덕포진은 통진에 그냥 두시지요.” 이렇게 강화유수 김휘가 아뢨습니다. 좌의정 허적이 동조했습니다. 현종이 승낙했습니다. 덕포진이 통진에 있게 된 이유입니다.

신미양요(1871) 때 덕포진 ‘포군(砲軍)’ 오삼록이 미군의 포격으로 전사했습니다. 고종은 오삼록을 잘 매장해 주고 그의 처자식을 도와주라고 지시합니다.

대개, 포군(砲軍)을 오늘날의 포병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삼록이 대포를 쏘는 포병이 아니라 조총을 쏘는 포수(砲手), 즉 ‘소총수’일 거라고 여깁니다.

임진왜란 중에 훈련도감이 창설됐습니다. 훈련도감은 포수(砲手)·살수(殺手)·사수(射手), 이렇게 삼수병 체제로 편성됐는데, 포수가 바로 조총을 쏘는 병사입니다.

오삼록을 포병으로 이해하면, 덕포진 포대에서 대포를 쏘다가 전사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신미양요 당시에 덕포진 포대는 없었습니다. 강화도에도 돈대만 있을 뿐, 포대는 없었습니다. 덕포진과 강화 해안에 포대를 둔 것은 신미양요 끝나고 나서입니다.

신미양요 3년 뒤인 1874년(고종 11) 3월에 강화유수 신헌이 용진 이하 세 진에 포대를 신설하겠다고 보고합니다. 강화의 용진진,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을 말하는 것입니다. 임금이 그리하라고 했습니다. 이때부터 강화 해안에 포대가 들어서게 됩니다.

 

김포 덕포진 포대

 

덕포진 포대 설치 시기를 알아봅니다.

1874년(고종 11), 통진에 왔던 암행어사가 안행동(雁行洞)에 진(鎭)을 추가로 설치하자고 건의했습니다. 조정에서 논의한 결과, 안행동에서 덕포진이 가까우니 부대를 설치할 필요까지는 없겠다, 대신 포대를 만들자, 이렇게 뜻을 모았습니다. 임금은 포대를 설치하라고 지시합니다. 안행동과 덕포진 본진의 거리는 4~5리에 불과했습니다.

덕포진 포대가 완공된 것은 1876년(고종 13)입니다. 안행동 포대가 곧 덕포진 포대일 것입니다. 《통진군읍지》(1899)에, 조정의 명령으로 포대 15혈을 병자년 봄에 설치하고 포대수직청(砲臺守直廳)을 두었다고 나옵니다. 병자년이 바로 1876년(고종 13)입니다.

1981년에 김포 덕포진이 사적으로 지정됐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덕포진 영역에 진사(鎭舍)를 비롯한 군부대 중심 건물은 없었습니다. 덕포진 본진은 지금보다 더 북쪽, 부래도 뒤편쯤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지도 대부분이 덕포진을 부래도 뒤편으로 표기했습니다.

다만, 손돌묘 근처에 덕포진 관할 포청(砲廳)과 군기고(軍器庫)가 있었습니다. 포대 설치 이전에 말입니다. 1872년에 제작된 〈통진부지도〉에서 포청과 군기고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통진부지도〉와 같은 해 제작된 〈강화부전도〉는 포청(砲廳)을 포사청(砲士廳)으로 적었습니다. 포청이 곧 포사청인 것입니다.

 

1872년 당시 덕포진 포사청 군기고[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제 덕포진 파수청(把守廳)을 검토합니다.

파수청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이러합니다.

“파수청은 지난 1871년 작성된 고문서 《통진부읍지》에서 사용한 명칭이다. 일부 고지도에는 ‘포청’, ‘포사청’이라고 표기돼 있다. 이곳에서는 탄약고와 포대에 사용하기 위한 불씨를 보관하고, 포병을 지휘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청, 포사청, 파수청이 동일 건물이라는 얘기입니다.

《통진부읍지》(1871)에 덕포진에 있었던 건물 현황이 나옵니다. 객사(客舍) 3칸, 내외 진사(內外鎭舍) 9칸, 삼문(三門)과 행랑(行廊) 10칸 반, 어변정(禦變亭) 10칸, 신미년(1871)에 중건(重建)한 군기고(軍器庫) 3칸이 있고, 덕포진 옆[鎭傍]에는 포사파수청(砲士把守廳) 4칸이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포사파수청? 예, 그렇습니다. 《통진부읍지》에 실린 정식 명칭은 ‘파수청’이 아니라 ‘포사파수청’입니다.

포사파수청이 정말 ‘포대에 사용하기 위한 불씨를 보관하고, 포병을 지휘하던’ 곳일까요? 저는 아닐 거로 생각합니다. 포사파수청은 덕포진에 포대가 설치되기 한참 전부터 존재합니다. 포대가 없는데 어떻게 포대에 사용할 불씨를 보관하고 포병을 지휘합니까. 또 조선 후기 그때는 불씨를 따로 보관하지 않아도 점화하는 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포사파수청은 뭐하던 곳일까요? ‘포사(砲士)’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지만, ‘파수(把守)’라는 단어에 열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어사전은 ‘파수’를 ‘경계(警戒)하여 지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포사파수청의 기능은 일종의 경계초소일 것입니다. 포사파수청이 포대 설치 뒤에 포대수직청으로 이름이 바뀐 것 같은데요, 수직청의 ‘수직(守直)’ 역시 ‘파수’와 의미가 비슷합니다.

‘파수청’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김포에만 있었던 고유 명칭이라는 설명을 간혹 보게 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타지역에 있는 파수청이 옛 사료에 꽤 언급됐습니다. 이를테면 《여지도서》에 평안도 희천 등에도 파수청이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김포 덕포진 파수청

 

고종 때입니다. 경기도에 암행어사가 떴습니다. 수많은 탐관오리가 처벌됐습니다. 암행어사는 나쁜놈만 벌하는 이가 아닙니다. 훌륭한 인물은 임금에게 보고해서 상 받게 합니다.

1883년(고종 20), 암행어사 이건창이 “전 덕포첨사 최봉선(崔鳳善)은 녹봉과 집의 자산을 죄다 방수(防守)에 쓰고, 가난한 군졸과 어려운 집에는 미리 진휼하는 법을” 베풀어 주민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보고합니다.

저마다 백성들 쥐어짜 제 배만 불리던 탐학의 시대에 최봉선은 거꾸로 제 재산까지 풀어가며 덕포진을 정비하고 백성들 배고픔을 덜어주었습니다. 보기 드문 인물입니다. 만나고 싶은 지도자입니다.

김포문화원, 《김포문화》18,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