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산성, 그러면 떠오르는 사건과 인물이 있을 겁니다. 예, 병인양요 문수산성 전투와 한성근입니다.
1866년(고종 3) 병인년에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공하고 점령합니다. 그들은 지금의 강화 읍내에 주둔했습니다. 대원군이 파견한 양헌수(1816~1888)가 염하를 건너 강화 정족산성에 들었습니다.
그러자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으로 쳐들어갑니다. 양헌수 부대가 그들을 격퇴합니다. 참패한 프랑스군이 서둘러 강화에서 철수하면서 전쟁이 끝납니다. 이것이 대략적인 병인양요의 경과입니다.
한성근의 문수산성 전투는 어느 단계에서 벌어진 사건인지 검토해봅시다.
<병인양요(1866) 경과>
날짜 | 전개 과정 |
10월 16일 (음력 9월 8일) |
프랑스군, 강화 점령 흥선대원군, 순무영 설치 (순무사 이경하·순무중군 이용희·순무천총 양헌수) |
10월 17일 (음력 9월 9일) |
이용희·양헌수, 강화로 출발 프랑스군, 통진부 약탈 |
10월 18일 (음력 9월 10일) |
이용희·양헌수, 통진부 도착 |
10월 21일 (음력 9월 13일) |
대원군, 봉상시 봉사(종8품) 한성근을 순무영 초관에 임명 |
10월 26일 (음력 9월 18일) |
한성근, 문수산성 전투 |
11월 5일 (음력 9월 28일) |
대원군, 한성근을 병조좌랑(정6품)으로 승진 임명 |
11월 7일~11월 8일 (음력 10월 1일~10월 2일) |
양헌수, 염하 건너 정족산성 집결 |
11월 9일 (음력 10월 3일) |
양헌수, 정족산성 전투 승리 |
문수산성 전투 이전에 프랑스군이 통진부를 약탈한 사건이 있었네요. 이용희·양헌수 부대가 통진에 도착하기 전입니다. 50여 명의 프랑스군이 마을로 들어와 주민의 가축과 옷 등은 물론이고, 통진도호부 관아까지 싹 털어갔습니다. 완전 강도질을 했습니다. 아니, 통진부사는 뭐한 건가?
내뺐습니다. 통진부사 이공렴은 “홀로 외로이 있다가 가만히 앉아서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부득이 걸어서” 도망쳤습니다.
쯧쯧. 강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스군이 강화를 침공하자 강화유수 이인기는 프랑스군이 쳐들어오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강화가 허망하게 점령당했던 것입니다.
양헌수 등이 통진에 도착하고 며칠 뒤, 한성근이 문수산성에 듭니다. 그리고 10월 26일(음력 9월 18일), 문수산성 전투가 벌어집니다.
프랑스군 70명쯤이 통진 지역을 정찰하려고 문수산성으로 접근합니다. 그들이 상륙하려 할 때 한성근 부대가 선제공격을 단행합니다. 프랑스군 3명이 죽었습니다. 프랑스군 첫 전사자가 문수산성 전투에서 나온 겁니다.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할 때는 전투다운 전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사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성근 부대는 바로 후퇴하고 맙니다. 프랑스군의 반격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문수산성을 점령한 프랑스군은 한성근 부대를 맹렬하게 추격합니다. 마침, 문수산에 짙은 안개가 꼈습니다. 지척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추격을 포기했고 그래서 한성근은 무사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여기저기 불을 질러 분풀이하고 강화로 돌아갔습니다.
조선군의 패배입니다. 축구 경기에 비유하면, 전반전에 한 골 넣고 후반전에 세 골 먹어 1:3으로 진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흥선대원군이 문수산성 전투를 승전으로 포장합니다. 조선이 프랑스에 이겼다! 홍보합니다. 패장 한성근을 승장으로 둔갑시켜 승진시켜 줍니다. 백성들의 불안감을 덜어주려는 의도였을 겁니다.
아무튼, 이리하여 허위가 진실이 되어 갔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한성근 위인전 성격의 소설인 《병인양요, 일명 한 장군전》(1928)이 출간됐습니다. 이 책에서 한성근을 이렇게 그렸다고 합니다.
적선 2척을 침몰시키고 상륙한 적군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적군을 주먹으로 한 번씩 치니 두개골이 깨져 그때마다 즉사하였다, 적병 수백 명을 죽이니 적의 시체가 산같이 쌓이고 피가 흘러 강물이 붉게 물들었다, 장군은 적탄 수백 발을 맞아 갑옷에 탄환 구멍이 없는 곳이 없었다.
한성근은 전쟁영웅이 되었습니다. 그 여파로 지금도 한성근의 문수산성 전투가 조선군의 빛나는 승리로 잘못 말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문수산에 산성 성곽이 많이 남이 있고 또 복원도 했지만, 염하변으로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파괴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기껏 수십 명이 맨몸으로 돌성을 허물 수도 없거니와 그래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문수산성 전투 당시 조선 측 피해 상황은 공식적으로 전사 3명(최장근·김달성·오준성), 사망 1명(문수진 백성 오돌중단), 부상 2명, 실종 2명입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불을 질러 관사 54칸 반과 민가 29호가 소실됐습니다. 이때까지 문수산성 성곽은 온전했습니다.
양헌수 부대가 통진에 도착한 날이 언제였는지 다시 확인해 볼까요. 10월 18일이네요. 통진을 떠나 염하를 건너 정족산성으로 간 날은 11월 7일입니다. 무려 스무날을 통진에 머문 겁니다.
프랑스 군함이 오르락내리락, 염하를 지키고 있어서 쉽게 건널 수 없었습니다. 우리 군사들을 태울 배도 없었습니다. 배가 한강 쪽에서 내려와야 하는데 프랑스군이 막고 있어서 올 수 없었던 것이지요.
양헌수 부대 500여 명이 통진에 머무는 동안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먹을거리 등을 대주었습니다. 순무영 중군 이용희가 고종에게 이런 보고를 올립니다.
“덕포진 하린동 대명촌에 사는 반민(班民) 권영두가 황소 1마리와 남초(南草, 담배) 6단을 가져와서 내면서 호궤(犒饋,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함)하기를 자원하기에 본진에서 소를 잡고 남초를 나누어 진졸(鎭卒)과 본진의 방수 군병들에게 호궤하였습니다.”
대명리 사람 권영두뿐이 아닙니다. 수많은 이가 소, 쌀, 말먹이, 땔감 등을 보내왔습니다. 세세한 내용은 《승정원일기》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배를 구했습니다. 양헌수 부대가 염하를 건널 배가 확보됐습니다. 석정리 선비 이중윤이 구해왔습니다. 다해서 5척입니다.
양헌수는 병사들을 3개 조로 나눠 덕포진 주변에서 염하를 건너게 했습니다. 그리고 승리했습니다. 정족산성 전투 승전은 통진 주민들의 희생 덕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양헌수 부대에서 직접 싸운 통진 사람도 있습니다. 차재준이 자원해서 양헌수 부대와 함께 염하를 건너 정족산성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병인양요가 마무리되자, 고종이 명령합니다.
“지난번 서양 오랑캐들이 침입하였을 때 통진 역시 그 피해를 받아 공화(公貨)를 약탈당하고 백성들의 재산을 강탈당한 것은 큰 액운이었다. 그런데도 40일 동안 대진(大陣)의 군사들을 도와준 것은 전적으로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 이들에 대하여 특별한 예에 따라 돌봐주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각 영에 바치는 포(布) 가운데서 통진은 금년분 전량을 탕감해 주고….”
고종도 통진 주민들에게 고마움을 느낀 모양입니다. 특별히 세금을 면제해주었네요.
김포문화원, 《김포문화》18,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