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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敎

학부모님께 보내는 편지... 당신의 자녀는 어떻게 커가고 있습니까?

어릴 때, 간절하게 갖고 싶던 것이 나이키 운동화와 파카 만년필이었습니다. 지금 나에게는 만년필이 두 개 있습니다. 파카보다 더 유명하고 고급스러운 상표도 여럿이라지만, 파카만 고집하는 것은 어릴 때의 꿈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키 운동화는 아직도 없습니다. 어인 일인지 사게 되지 않습니다. 그 돈이면 값싼 운동화 서너 켤레를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주저하게 하곤 합니다.

우리 학교 동네는 시골이라서 지금도 5일마다 장이 섭니다. 교문만 나서면 바로 장터입니다. 거기서 운동화를 사다가 아이들을 신겼습니다. 금방금방 발 크는 아이들에게 비싼 운동화가 무슨 소용인가 싶어 서지요. 큰아이는 불평 없이 잘 신고 놀았습니다. 새신발이라는 게 그저 좋았겠지요.

그런데 이 녀석이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나이키를 신어야 하겠답니다. 사춘기인데 무조건 억누르기만 해선 안 되겠다 싶어서 사줬습니다. 2가 된 녀석은 더는 나이키를 고집하지 않습니다. 다시 털털해졌습니다.

이 녀석, 아무리 아들놈이지만 너무 무뚝뚝합니다. 속으로 섭섭할 때가 많습니다. 문자 열 번 보내면 두세 번 겨우 답장합니다. 그런데 그 답장이 늘, “한 글자입니다. 친구들하고 문자 할 때면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만큼 민첩하게 잘도 쓰더구먼, 아비에게는 달랑 한 글자. 그래서 어느 날 나쁜 놈이라고 욕을 했더니, 다음엔 길게 보내겠다고 합니다.

점심때 문자를 보냅니다. “목 아픈 건 좀 나았냐?” 답장이 왔습니다. “어어어고맙지요. 세 글자나 보내줬으니.

어버이날이나 내 생일 같은 때도, 선물은커녕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습니다. 그러려니, 적당히 포기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생일에 녀석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흰 봉투를 쑥 내밀며 나이키 사 신어. 꼭 나이키 사야 돼.” 이러는 겁니다. 여기저기 헤진 아비 운동화를 보며 뭔가 느낀 게 있었나 봅니다. 오래도록 용돈을 모아 운동화 값을 마련한 것이지요. 이제 저도 나이키를 신게 되었습니다.

 

꼭 한 가지 자랑할 것이 있는 아들

 

녀석이 1학년 때 모의고사를 봤는데, 국사가 40점이었습니다. 아비가 고등학교 국사 선생인데, 자식은 국사를 제일 못 봤습니다. 초등학교 때도 이런 일이 있어서 끼고 앉아 며칠 가르친 적이 있었습니다. 좀 화가 나기에 아이를 불렀죠. 아무래도 잔소리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이에게 한마디도 못했습니다. “국사 점수가 왜 이러냐?” 물었는데, 애가 뜻밖의 답변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빠, 내가 참 몹쓸 짓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 아이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지금 녀석은 나름대로 열심히 국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저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어봐라, 이해 안 가는 거 없냐, 얀마 아빠 전공이 국사야! 다그칠 때마다 됐어.” 할 뿐입니다. 저는 큰 애가 나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 국사 공부하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3자의 눈으로 볼 때, 우리 아이는 내세울 게 없습니다. 공부를 특출하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성격이 아름답지도 못합니다. 인물이 훤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한 가지 자랑할 만한 게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자립심이 강하다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홀로 병원 다니던 아이입니다. 할머니가 데려간다고 해도 굳이 떼를 써서 혼자 병원 가서 진료받고 약 받아 옵니다. 웬만해서는 부모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철든 어른이 되는 것이 더 절실하다

 

얼마 전에 신문에서 가슴에 와 닿는 글을 만났습니다. 결혼까지 시킨 자식이 마치 어린애처럼 부모에게 의존해 살아가는 문제를 다룬 글이었습니다.

 

“…집을 넓혀 달라는 40대 아들과 며느리의 성화로 아파트 평수를 줄인 부모가 있고, 자녀들 결혼시킬 때마다 더 먼 변두리로 이사 간 부부도 있다. 자식의 빚 때문에 늘그막에 단칸 전세방을 전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연금마저 차압당한 이도 있다. 뼈 빠지게 교육시키고 직장까지 얻게 해 결혼까지 시켜 주었지만 철딱서니 없는 자식들은 끝까지 부모의 애프터서비스를 요구한다. 자녀들이 태어나 부모에게 준 기쁨은 잠시뿐, 그 대가는 길고 혹독하다.…”

(동아일보, 2008.1.10, 오명철 기자, ‘자식을 놓아야 부모가 산다’중에서)

 

물론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부모와 자식 관계를 묘사한 감이 없지 않은 글입니다. 그럼에도, 나도 몰래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시대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자식 공부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는 우리 세대를 가리켜 ()를 행한 마지막 세대요, 효를 받지 못하는 최초의 세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유쾌하지 않지만, 덤덤하게 인정해야 할 현실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애는 절대로 그럴 리 없어.” 자신 있게 말할 부모 얼마나 될까요.

늙어서 자식에게 생계를 의존하려는 사람, 이제 거의 없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결혼하면, 뻔한 봉급으로 저희도 먹고살기 바쁩니다. 그 아이들에게 낳아 기르고 가르치느라 엄마 아빠 희생했으니, 이제는 너희가 우리를 책임져라! 이렇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보다는, 취업하면 더는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는, 자기 힘으로 커가는, 철든 어른이 되기 바라는 게 더 절실합니다.

 

10년 후 내 아이의 모습

 

직장일이 조금만 어려워도 쉽게 그만두고, 조금만 기분 상해도 더럽다며 때려치우고, 사업해보겠다며 부모에게 손 벌리면서, 씀씀이는 헤프기만 한 철없는 어른을 만든 책임. 그 책임은 바로 부모에게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저 공부, 공부. 성적만 좀 나오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가정. 아이가 원하는 것 다 가질 수 있게 해주고, 부족함을 전혀 모르게 키운 아이가 결국, 철부지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나는 우리 아이가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명문대학 가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축하 인사받으면 황홀할 것 같습니다. 아이보다 제가 더 어깨 힘주고 다닐지도 모릅니다. 아이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기를 바라는 이유는 아이를 위해서라기보다 주변의 부러워하는 시선을 만끽하고픈 나의 이기심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명예의 순간은 속절없이 짧습니다. 어느새 모든 영광이 잊히게 마련입니다.

중요한 한 것은 그 이후죠. 우리 아이는 어떤 어른으로 커갈 것인가. 철든 어른이 될 것인가. 철없는 어른으로 남을 것인가? 나는 우리 아들이 나이 값 하는 성숙한 어른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상대적으로 두드러진 자립심, 독립심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당신의 자녀는 어떻게 커가고 있습니까? 한 번쯤은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당장 공부시키는 게 중요하지만, 잠시 여유를 갖고 아이를 바라봅시다. 10년쯤 후의 내 모습, 그리고 내 아이의 모습을 그려봅시다.

엔터스터디, 2008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