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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초지진 대포를 생각합니다(下)

강화 초지진

 

역사 속 홍이포

 

이제 역사 속 홍이포를 알아봅니다.

불랑기처럼 홍이포 역시 유럽에서 발명된 화포입니다. 명나라 군대가 네덜란드 선박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네덜란드 배에 탑재된 대포의 파괴력이 대단했습니다. 명나라가 이 대포를 수입해서 제작하게 됩니다.

명사(明史)는 네덜란드(화란)를 홍모번(紅毛番)으로 적었습니다[和蘭又名紅毛番]. 당시 명나라 사람들이 네덜란드인을 홍모이(紅毛夷)라고 했습니다. 머리카락이 붉은색이라 그렇게 불렀다고도 하고, 하얀 피부가 햇빛에 붉게 탄 모습을 보고 홍모이라고 했다고도 합니다.

홍모이(네덜란드)의 대포, 그래서 포 이름이 홍이포(紅夷砲)가 되었습니다. 오랑캐라는 뜻인 ()’자 대신에 옷 의()자를 써서 홍의포(紅衣砲)라고도 불렀습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은 네덜란드를 아란타(阿蘭陀)라고 적었습니다. 조선후기 관료였던 윤행임(1762~1801)은 그의 문집인 석재고에 아란타를 홍이(紅夷)라고도 하고, 홍모(紅毛)라고도 한다고 기록했습니다.

명나라 장수 원숭환이 1626(인조 4)에 영원성에서 누루하치의 후금군을 격퇴합니다. 병력 규모가 거의 10배 되는 후금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원숭환의 탁월한 지휘 능력 덕분인데, 여기에 더해 명군의 홍이포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동안 패배를 모르던 파죽지세 후금군이 명의 홍이포에 된통 당했습니다. 이에 후금도 홍이포에 바짝 관심을 두게 되고 결국에는 자체 제작하게 됩니다.

영원성 전투 소식이 조선에 알려졌고, 따라서 홍이포에 관한 정보도 함께 알려졌을 것입니다. 사료로 확인되는 것은 1630(인조 8)입니다. 이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정두원이 인조에게 천리경(千里鏡, 망원경)과 자명종 등을 바쳤습니다. 아울러 홍이포의 규모와 성능에 관해서도 보고합니다.

병자호란 막판인 1637(인조 15) 122, 강화도가 청군에게 함락되고 맙니다. 인조실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랑캐 장수 구왕(九王, 예친왕 도르곤)이 제영(諸營)의 군사 3만을 뽑아 거느리고 삼판선 수십 척에 실은 뒤 갑곶진에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잇따라 홍이포를 발사하니,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적이 이 틈을 타 급히 강을 건넜는데, 장신·강진흔·김경징·이민구 등이 모두 멀리서 바라보고 도망쳤다.

 

강화를 침공한 청나라 군사가 ‘3이라고 했으나 이는 과장된 수치로 보입니다. 강화도가 함락된 가장 큰 이유는 강화유수 장신과 검찰사 김경징의 무능, 무기력, 비겁함에 있습니다. 적이 닥치자 제일 먼저 내빼는, 이런 부류 사람들을 지휘자로 뽑아 보낸 인조와 대신들의 무책임도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홍이포입니다. 사과 알만한 포환이 날아오자, 강화 사람들은 공포에 빠졌습니다. 수군을 지휘하던 장신 유수는 청군의 포격에 눌려 싸움을 포기했습니다. 홍이포의 유효사거리가 여기저기 다르게 나오는데요, 적어도 2는 넘었던 것 같습니다. 김포 쪽에서 쏘면 갑곶 진해루 쪽을 타격할 수 있습니다.

병자호란 이전인 1627(인조 5)에 네덜란드 사람 벨테브레가 조선에 표착합니다.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서 살게 됩니다. 박연이 훈련도감에 소속됐던 것으로 보아 서양식 무기 제조와 사용법 등을 가르쳤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때 박연이 홍이포를 제작했다고 알려졌습니다만, 사실이 아닐 겁니다. 인조 임금 때 박연이 홍이포를 만든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것은 윤행임의석재고를 오역(誤譯)했기 때문입니다. 해당 문장을 옮깁니다.

 

朴延爲國效其能, 遂傳紅夷礟之制

(박연위국효기능, 수전홍이포지제)

 

박연이 나라를 위해 그 능력을 발휘하였다, 드디어 홍이포의 제도를 전하였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박연이 홍이포를 직접 제작한 것이 아니라 홍이포의 성능이라던가 만드는 방법 등을 이론으로 전수한 것입니다.

 

 

남만대포라는 것은

 

사료에 남만대포(南蠻大砲) 또는 남만포(南蠻砲)라는 화포가 등장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홍이포의 일종으로 봅니다.

중국은 주변 나라와 민족을 대략적인 방향에 따라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불렀습니다. 여기서 , , , 은 모두 오랑캐라는 뜻입니다. 같은 문화권인 조선과 일본도 중국을 따라서 이런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동남아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한 유럽인들도 남만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정조 때 비변사 당상 이서구는 아란타가 곧 대만이라고 말합니다. 네덜란드가 대만을 장악했었던 사실이 반영된 인식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그들의 대포 홍이포가 남만대포로도 불리게 되었습니다.

1658(효종 9) 9월에 강화유수 서원리가 입궐했습니다. 효종이 남만대포에 관해 물었습니다. 서원리 유수의 대답이승정원일기에 나옵니다.

훈련 때 허방(虛放)하면서 포격술을 익히고 때때로 실방(實放)을 겸하는 게 마땅합니다.”

허방은 대포에 탄환을 넣지 않고 쏜다는 뜻입니다. 효종과 서원리 유수의 대화를 통해 당시 강화에 남만대포가 배치돼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664(현종 5)강도어사 민유중이 강화의 무기 보유 현황을 현종에게 보고하는데, 남만대포도 12개가 있다고 했습니다.(현종개수실록)

현종실록(1665)강도에 장치해 놓은 대포는 소포(小砲)에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대포 하나에 탄약을 장전할 때 5, 6명을 써야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탄약 장전하는데 5, 6명이 필요하다면, 상당히 큰 화포입니다. 아무래도 남만대포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 강도어사 민유중의 보고가 있고 30여 년 지난 뒤 간행된 강도지(1696), 당시 강화에 남만대포 16개가 있다고 적었습니다. 민유중이 보고할 땐 12개라고 했는데 4개가 늘어 16개입니다.

홍이포(남만대포)가 어떻게 강화에 있게 된 걸까요?

본디 바다에 표류했던 남만의 배에서 얻은 것이다라고강도지에 나옵니다. 조선이 제작한 것이 아니라 조선으로 표류한 서양 배에 있던 것을 강화로 옮겨왔다는 얘기입니다.

서양 배는 네덜란드 배였을 겁니다. 일본이 유일하게 교류하던 서양 나라가 네덜란드입니다. 일본으로 가다가 조선에 표류한 네덜란드 사람들 가운데 하멜도 있습니다. 하멜은 1653(효종 4)부터 1666(현종 7)까지 조선 땅에 억류돼 있다가 탈출합니다. 애초 그가 타고 온 배에 대포 30문이 탑재돼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 남만대포를 강화도로 옮겨 설치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1661(현종 2) 6, 조정에 든 광주부윤 김수흥이 남한산성 쪽에 남만포 9개가 있다고 아뢴 것으로 승정원일기에 나옵니다. 병자호란 전부터 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종이 몇 사람이면 그 포를 운반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한 대당 100여 명이라고 대답합니다. 상당히 크고 무거운 대포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보장처로 말해지는 강화와 남한산성에서 홍이포의 존재가 확인됐습니다. 그런데, 1705(숙종 31) 8월에 예조판서 민진후가 숙종에게 대략 이런 내용을 말했습니다. 출처는승정원일기입니다.

“남한산성에 갔더니 남만포 한 개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표류해 온 사람이 남겨두고 간 것인데 조정에서 산성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제대로 쏠 줄도 모르는 쓸모없는 대포를 남겨둘 필요가 없습니다. 녹여서 불랑기 등 다른 무기로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1661(현종 2)9개 있다던 남한산성 남만대포가 1705(숙종 31)에 한 개 남았습니다. 한 개 남은 대포마저 녹여서 불랑기를 만들라고 숙종이 지시했습니다. 다른 남만포들도 이미 녹여서 다른 포로 제작된 것 같습니다.

강화도에 있던 남만대포도 대개 녹아서 다른 포가 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도 남아있던 게 있었나 봅니다. 1892(고종 29)에 간행된 강화부상각진보상각돈대상각양군기잡물수목성책(江華府上各鎭堡上各墩臺上各樣軍器雜物數目成冊)은 강화유수부 진·보 등에 배치한 무기의 종류와 수량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에 의하면, 덕진진에 홍이포1개 있었습니다. 이 홍이포가 일제강점기에, 앞에서 소개한 한강 월파정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홍이포를 만들었지만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홍이포를 제작한 적은 없을까? 있습니다. 몇 번이나 제작했는지 알 수 없으나 사료로 확인이 가능한 것은 딱 한 번입니다. 승정원일기를 봅시다. 1731(영조 7)에 훈련도감에서 영조에게 올린 보고가 이러합니다.

“홍이포 2문, 중동포 50문을 본영에서 이제 막 새로 만들었으므로 시방(試放, 시험사격)을 해야 하는데 노량과 동작은 강물이 불어서 넘치고 있습니다. 홍이포는 우리나라에서 새로 만든 것으로 포탄이 10여 리를 가고 포성이 다른 것과는 다른데 달리 시험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영조 때입니다. 훈련도감에서 홍이포 2개를 제작했습니다. 탄환이 10리 이상 간다고 했습니다. 한강 물이 넘쳐서 대신 왕십리 차현(車峴) 근처에 나가서 시방했습니다.

숙종 대에 홍이포를 녹여 다른 포로 만들었습니다. 쓸모없는 포로 여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왜, 어떤 경위로 영조 시기에 홍이포를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조선에서는 홍이포가 효용성과 가성비가 너무 떨어지는 무기입니다. 이형상은 강도지에서 홍이포를 성을 지키는 데는 쓰기 적당하지 않은 무기라고 평했습니다.

조선이 치르는 전쟁은 공성전(攻城戰)이 아니라 수성전(守城戰)이 주류입니다. 홍이포는 성을 공격하는데 효과가 탁월한 공성용 대포입니다. 커다란 포알이 날아가 여장을 부수고 성문과 누각을 파괴합니다.

반면에, 성안 수비병이 성 밖 적군에게 홍이포를 쏴 봤자, 몇 명 쓰러트리는 데 불과할 겁니다. 진영을 흩어놓는 정도입니다. 수류탄처럼 탄환이 터지는 게 아니라 그냥 둥근 쇳덩어리가 떨어지는 것이니까요.

홍이포를 만드는데 엄청난 양의 쇠붙이가 있어야 합니다. 한번 쏘려면 다른 대포의 열 배, 스무 배 화약이 소모됩니다. 너무 무거워서 기동성이 떨어집니다. 수비가 우선인 조선 실정에서 홍이포는 꼭 필요한 화포가 아니었습니다. 홍이포 하나 만드느니 불랑기 여러 개 만드는 게 훨씬 유용했습니다.

한편, 1808(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에 금위영, 어영청 등 군영에는 홍이포가 없고 훈련도감에만 홍이포가 2개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영조 때 훈련도감에서 만든 홍이포 2개가 순조 당시에도 그대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홍이포가 초지진으로 왔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강화 덕진진 남장포대 홍이포 복제품

 

정리하자면

 

요약하여 정리합니다.

초지진 대포는 홍이포입니다. 홍이포는 서양에서 발명해 명나라에 전해졌고, 청나라에서도 사용한 화포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를 침공할 때 이 포를 썼습니다.

남만대포와 홍이포를 서로 다른 별개의 화포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만, 같은 종류의 화포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멜의 배에서 내려진 대포처럼, 서양에서 제작해 조선에 유입된 화포를 남만대포로 칭하고, ··조선에서 직접 제작한 것을 홍이포로 칭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효종 임금 때 하멜 일행의 선박이 조선에 표류해왔습니다. 그 배에 있던 남만대포를 강화도와 남한산성 등에 옮겨 배치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만대포를 녹여서 다른 무기로 만들었습니다.

영조 때는 훈련도감에서 자체적으로 홍이포 2개를 만들었습니다. 이 홍이포는 순조 임금 당시에도 훈련도감에 있었습니다. 한편, 1892(고종 29)에 강화 덕진진에 홍이포 1개가 있는 것이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초지진 대포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만, 전해지는 내용을 바탕으로 두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강화 덕진진에 있던 것이 서울 월파정을 거쳐 돌아왔을 것이다.

영조 때 훈련도감에서 제작한 홍이포일 것이다.

물론 알 수 없는 전혀 다른 배경과 경로로 초지진에 오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홍이포라는 화포가 조선의 국방사 관점에서는 존재 이유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실전에서 쓰인 적도 없습니다. 강화도 관점에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초지진 홍이포가 탐방객들에게 중요한 볼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오해를 부르기도 합니다. 마치 병인양요·신미양요·운요호 사건 때 적선을 향해 포알을 쏘아대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초지진 홍이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저는 설명하기 어려운 착잡함을 느낍니다.

강화문화원, 江華文化19(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