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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참성단이여, 고맙습니다

 

참성단에 성화가 올랐다. 육군 군악대의 반주에 맞춰 수많은 사람이 노래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 장관 등이 개천절 경축사를 한다. 이어지는 만세 소리. 기념식이 끝나고 공군 비행기들이 마리산 하늘을 난다. 멋진 경축 비행에 사람들이 환호한다.

상상이 아니다. 1949103, 참성단에서 실제 있었던 개천절 기념식의 모습이다. 정부 차원의 국가 행사였다. 지금은 참성단에서 채화해서 전국체전 장소로 성화가 봉송되는데 1949년 그날은 삼랑성 안에서 채화해 참성단으로 모셨다. 일 년 전 1948년 개천절 때는 신익희 국회의장을 포함해 30여 명의 국회의원이 참성단에 집결했다. 그때는 그랬다.

일제에 맞서 싸우던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으로 돌아와 먼저 찾아오던 곳, 광복을 맞은 대한민국 정부 요인들이 함께 모여 하늘에 예를 갖추던 곳, 참성단. 이제 그 역사가 어떻게 이어졌는지 간략히 살펴보자.

고조선, 단군과 관련된 전설이나 유적은 전국 여러 곳에 퍼져있다. 그런데 옛 역사책에 기록이 남아 공신력이 인정되는 곳은 딱 두 곳이다. 하나가 참성단이요, 또 하나가 삼랑성이다. 둘 다 여기 강화다.

고려사마리산은 부의 남쪽에 있으며 산 정상에 참성단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제단이라고 한다.”, “전등산은 일명 삼랑성인데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은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적혀 있다. 세종실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비록 세상에 전하기를[世傳]’이라는 단서를 달았으나 나라에서 편찬한 공식 역사책에 담긴 내용이기에 그 무게감이 남다르다.

1264년 어느 날, 강화 읍내를 출발한 행렬이 남쪽으로 이어진다. 이윽고 배를 타고 마리산 입구에 내린다. 그들은 참성단에 올랐다. 행렬의 주인공은 고려 임금 원종. 원종이 친히 참성단에서 천제(天祭)를 올렸다. 때는 몽골에 맞서 싸우던 강도(江都) 시기다. 몇 해 전 몽골과 화의를 맺었지만, 개경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화 도읍을 유지하던 때이다.

원종은 하늘에 빌었을 것이다. 몽골을 완전히 몰아내 나라를 바로 잡고 백성을 평안하게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역사 기록상 원종은 참성단 천제를 직접 올린 유일한 임금이다. 그래서 원종이 최초로 참성단에서 천제를 지낸 왕으로 말해지지만, 단정할 수 없다.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도 원종 이전부터 그래왔을 개연성이 있다.

원종이 배를 타고 마리산에 갔다고 했다. 그랬을 것이다. 당시 마리산은 강화 본섬과 떨어진 별도의 섬이었다. 마치 석모도나 교동도처럼 말이다. 이름은 고가도였다. 마리산 지역이 육지가 된 것은 조선시대에 시행된 대규모 간척의 결과이다. 하나의 섬으로 우뚝 선 마리산은 지금보다 훨씬 신비로운 모습을 간직했을 것 같다.

고려 원종 이후에는 왕을 대행해서 조정의 높은 신하가 참성단에서 제사를 모셨다. 조선시대에도 그러했다. 대개 1년에 두 번씩 봄, 가을에 정기적으로 행해졌는데, 이에 더해서 나라에 위기가 닥쳤을 때, 가뭄이 극심할 때도 이곳에 올라 하늘에 기도했다.

고려와 조선시대 참성단은 국가 제사의 중심지였다. 제사는 초제(醮祭)라고 해서 도교 형식으로 진행됐다. 하늘의 별을 비롯해 여러 신에게 올렸다. 여러 신 가운데 천신(天神)의 의미가 있는 옥황상제도 있었다고 한다.

도교를 중국 종교로만 인식할 필요가 없다. 고구려 때 우리나라에 수용된 도교는 우리 고유의 토속신앙들과 결합하면서 백성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 주목할 것은 어떤 종교와 관련됐는가가 아니라 하늘에 올린 제천 행사였다는 점이다.

전통시대 유교적 질서 아래서 천제(天祭)는 천자 즉 중국의 황제만 올릴 수 있었다. 주변 제후국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게 원칙이었다. 고려는 실리를 위해서 대외적으로 중국의 제후국 형식을 취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의 위상을 갖추고 있었다. 자존감과 주체의식을 포기하지 않았다. 임금을 전하가 아닌 폐하라고 불렀고, ‘천세대신 만세를 외쳤으며, 도읍도 황도(皇都)로 지칭했다. 개성이 황도이듯 강화도 황도였던 것이다.

원종이 올린 초제는 말 그대로 천제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참성단 초제는 성격이 좀 변한다. 제사의 격이 낮아졌다고 할 수 있다. 기도의 주 대상이 하늘의 별이니, 여전히 천제이지만, 종교의 울타리에 가둬두려는 의미가 강해졌다.

중종실록에 한 신하가 중종에게 이렇게 말한 기록이 있다. 도교 기관인 소격서를 없애자는 주장이다. “소격서는 바로 성신(星辰)을 제사 드리는 것이니, 천자라야 하늘에 제사 드리고 제후는 산천에만 제사 드립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제사 드리는 일은 자못 예에 합당한 것이 아니니, 혁파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늘에 제사를 올릴 수 있는 이는 중국의 황제뿐이고, 조선의 왕은 산천(山川)에만 제사를 모실 수 있으니, 조선이 하늘의 별에 제사하는 천제를 지내는 것은 중국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결국, 소격서는 혁파되고 말았지만, 참성단 초제는 계속됐다. 대신 도교 형식에 유교 형식이 점점 더 섞이게 되었다.

기도의 목적 중 하나가 위안이다. 그리고 희망이다. 고려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국가 차원의 참성단 제사가 유지되면서 백성은 위안받고 희망을 안고 힘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참성단을 통해 단군의 자손이라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려는 그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주변 강국들의 침략을 막아내며 나라를 지키고 키워냈고 위대한 업적들을 후세에 남겼다. 조선 역시 어려운 고비를 이겨내고 500년 역사를 이어왔다. 때로 지배층이 못난 짓을 해도 백성들이 피눈물로 외침에 맞서며 나라를 구했다. 윗물이 흐려도 아랫물은 맑았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그 힘, 백성의 힘을 든든히 받쳐준 버팀목이 참성단 아니었을까. 그렇다. 참성단은 민족의 심장을 뛰게 하고 피를 돌게 했던 생명의 근원이다.

그러면 참성단은 누가 언제 쌓게 한 것인가? 궁금하지만, 명확히 알 수 없다. 단군이 쌓게 했다고는 전한다. 조선 후기 인물인 이형상이 지은 강도지에도 단군이 축조한 것이라고 세전(世傳) 되고 있다라고 나온다. 단군이 쌓게 했다면 그 시대는 고조선시대이다.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기에는 부담이 있다.

어떤 옛 책들은 단군이 참성단을 쌓은 때가 기원전 몇 년이라고 시원하게 밝혔다. 하지만 대개의 역사학자는 그러한 책들이 후대에 만들어진 가짜라고 주장한다. 위서(僞書) 논쟁이 계속되는 한, 그 연대를 따르기도 역시 조심스럽다.

사실, 언제 쌓았는가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고조선시대가 아니면 어떤가. 삼국시대이면 또 어떤가. 고려 때 세웠다고 해도 대략 천 년 전이다. 그 아득한 세월 그 자리에 고요히 서서 만백성 품어주는 은혜를 베풀었다. 그 자체가 값지고 고마운 일 아닌가.

지금 여러 종교단체가 마리산과 참성단을 귀히 여기고 그네들의 종교와 연결 짓기도 한다. 그럴 수 있다. 다만, 특정 종교의 전유물인 양 내세우는 것은 잘못이다. 몰상식이다. 마리산은, 참성단은 종교 성지 이전에 한국사의 성지요 뿌리이다. 이 어려운 시기에 다 함께 격랑을 헤쳐 나아갈 민족의 구심점이다.

참성단이여, 고맙습니다. 이 땅 강화(江華)에 있어 주셔서.

강화뉴스2017.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