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 교육의 명암
산에서 낚싯대를 들고 내려오는 사람, 신발에 갯벌 흙이 묻은 사람, 담뱃값을 모르는 사람, “동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꼭 신고하라는 말을 무진장 듣고 읽으며 자랐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북한 간첩이라고 했다.
나이 육십이 다 된 지금도 기억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반복 학습’을 당했던 모양이다. 초등학생 때인데, 참 궁금했다. 빨갱이는 얼굴이 빨개서 금방 알아볼 수 있을 텐데 굳이 낚싯대와 신발을 살필 필요가 있을까.
분단된 나라에서 반공 교육, 안보 교육이 필요한 건 당연하지만, 과했다. “국가 안보”라고 쓰고 “정권 안보”라고 읽어야 했던 특정 시대도 문제였다. 아무튼, 이런 영향인지, 6·25전쟁 때 북한군이 남쪽 사람들을 보이는 대로 죽인 줄 알았다.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가리지 않고 말이다.
북한 사람 얼굴색이 우리와 같다는 걸 알게 된 이후에도, 산에서 낚싯대 들고 내려오는 간첩은 없다는 걸 알게 된 이후에도 6·25에 대한 나의 인식은 별로 바뀌지 않았던 것 같다.
강화에서 태어나 여전히 살지만, 강화의 6·25 상황을 나는 잘 몰랐다. 크게 관심을 두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의 배려로 6·25를 겪은 강화의 어르신 몇 분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소중한 배움을 얻었다.
강화는 삼국시대는 물론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몹시 중요한 섬이었다. 강화를 거쳐 예성강을 타면 개성이요, 한강을 타면 서울이다. 수도로 이어지는 길목인 강화로 프랑스군이 쳐들어왔고 미군이 쳐들어왔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이다. 그래서 6·25 때도 강화는 남과 북이 서로 차지하려고 애쓰던 요충지였을 것으로 지레짐작했었다.
그런데 어른들 말씀을 들어보니 아니었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기동력을 갖춘 현대전에서 강화도는 크게 주목되지 않았던 것 같다. 대규모 전투도 없었고 전쟁의 참상도 상대적으로 덜했다. 북한군의 폭거는 의도적이고 제한적이었다. 전쟁 당시 강화는 불안 속에서 불편한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인공기 나부끼는 교정
전쟁은 포성과 함께 왔다. 쿵쿵거리는 대포 소리에 가슴도 쿵쿵거렸다.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행렬을 보면서 전쟁이 났다는 걸 알았다. 소문보다 빠르게 피난민이 들이닥쳤다. 강화 사람들도 피난에 나섰다. 내가면 외포리로 많이 모였다.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멀리 가기 어려운 이들은 교동, 삼산, 서도 등 섬으로 갔다.
형편상 피난 가기 어려운 사람들은 일단 주변 산으로 피신했다. 읍내 사람들은 혈구산으로 많이 들어갔다고 한다. 산 아래 상황을 주시하다가 하나둘 집으로 내려갔다. 어차피 오래 버틸 수도 없었다. 어느 주민이 길에서 북한군과 맞닥트렸다. 북한군이 이렇게 말했다. “아바이 동무 수고하십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 계십쇼.”
1950년 6월 28일쯤이다. 학생들이 모두 강화공설운동장에 동원됐다. 주민들도 불려 나왔다. 북한군 환영대회였다. 사람들은 거기서 김일성 만세를 외쳐야 했다. 전쟁 전에 좌익 활동하다 검거돼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던 사람들이 풀려나와 어깨동무하고 춤을 추었다.
북한군은 강화주민들에게 별다른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 지역유지, 공무원 등은 붙잡아 갔다. 청년들은 군대로 끌어갔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청년은 하나도 없었다. 하점면 살던 소년의 아버지는 퇴직공무원이었다. 부르주아 반동으로 찍혀 끌려갔다. 재산이 좀 있었지만, 몹시 검박했다. 자신과 가족에 인색했다. 그러나 헐벗은 동네 주민들에게 넉넉하게 베풀어 인망이 높았다.
북한군이 들어오자 소년 아버지의 도움을 자주 받던 동네 주민 한 사람이 소년의 아버지를 고발했다. 배은망덕이었다. 각 면에서 끌려온 ‘반동분자’들이 모두 강화읍내 산업조합에 갇혔다. 거기 갇혔던 이들은 결국 북으로 끌려갔다. 소년의 아버지도 그렇게 납북됐다. 지금 80대 중반이 된 소년은 말했다. “내 동생은 아버지 얼굴도 몰라.”
잡혀갈 가능성이 있는 이들 가운데 멀리 피난하지 못한 사람은 집안 마루 밑에 구덩이를 파고 숨었다. 아궁이 안으로 기어들어가 구들에 숨은 이도 있었다. 어떤 이는 동네에 피난 갔다고 소문내고 방안 장롱 바닥 아래로 토굴을 만들어 숨었다. 나름의 저항이었다.
북한군은 일종의 자위대를 조직하게 했는데 동네에서 머슴살이하던 이를 자위대장으로 삼았다. 완장 찬 자위대장의 지시를 받으며 주민들은 강제 노동에 동원되곤 했는데 주로 방공호 파는 일을 했다. 북한 사람들은 감나무에 달린 감의 숫자까지 셌다. 좁쌀도 일일이 센다는 얘기까지 돌았다. 수확 때 거둬갈 요량이었다.
학교도 문 열었다. 학생들은 정상적으로 등교했다. 인공기 나부끼는 교정에서 북한 노래를 배워 불렀다. 유난히 득의만만한 선생님이 보인다. ‘아 저 선생님도 공산당이었구나.’ 학생들은 뒤늦게 선생님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초등학생 어느 꼬마는 북한군을 구경 갔다.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 궁금해서 몰래 숨어서 봤다. 빨강 옷을 입었을까 아니면 얼굴이 빨갈까. 빨갱이는 우리와 생김새가 다르겠지. 막상 보니 생김새가 같았다. 오히려 너무 어려서, 키가 너무 작아서 놀랐다. 열댓 살 정도로 보였다. 어깨에 멘 따발총이 땅에 질질 끌렸다.
한 소년의 아버지는 “구루마꾼”이었다. 구루마라고 부른 소달구지로 각종 물품을 운송해주고 삯을 받아 가족의 생계를 꾸려갔다. 소는 힘이 세고 영리했다. 달구지를 끌고 혈구산에 올라 솔가지 40뭇을 싣고 내려오는 일도 거뜬하게 했다.
아버지는 소를 가족 이상으로 아꼈다. 당신의 밥 절반을 덜어 소에게 먹일 정도였다. 자식에겐 못 먹여도 소에게는 먹였다. 심지어 뱀처럼 생긴 드렁허리를 잡아다 먹였다. 소 혓바닥을 잡아당기고 강제로 넣어 삼키게 했다. 그래야 힘을 쓴다고 믿었다.
북한군은 아버지와 소달구지를 징발했다. 경기도 평택까지 끌고 가 짐 나르는 일을 시켰다. 그런데 거기서 포격을 당해 달구지도 소도 잃었다. 빈 몸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살아 돌아온 기쁨보다 소를 잃은 슬픔이 몇 곱절 더 큰 것 같았다.
강영뫼의 비극
강화 사람들은 북에서 온 사람들의 감시와 통제 아래서 힘겹게 전쟁기를 보냈다. 사람들이 다시 산에 올랐다. 바다가 가까운 이들은 바닷가로 나갔다. 산과 바다에 선 그들의 시선은 한곳에 모여있었다. 인천이다.
인천상륙작전이다.
묵직한 포격 소리가 바다를 건너서 강화의 산까지 전달됐다. 함포 사격할 때마다 번쩍이는 섬광, 거기서 사람들은 희망을 보았다. 과연, 서울이 수복되고 강화에서도 북한군이 물러갔다. 다시 대한민국이다.
북한군은 강화에서 후퇴하면서 70여 명의 ‘반동분자’를 살해했다. 강화 전 지역에서 잡아들인, 공산당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하점면 창후리와 양사면 인화리 접경 강영뫼라는 골짜기에서 그 짓을 했다.
이병연이라는 분이 그 마을에 사셨다. 원통하게 죽임을 당한 이들의 영혼을 달래고자 1966년에 비석을 세웠다. 뜻있는 이들이 십시일반 비석 건립 비용을 댔다. 이병연 선생은 해마다 그날이 되면 손수 음식을 장만해 추모제를 지냈다.
그렇게 70여 명의 영혼을 위로했다. 돌아가시던 1982년까지 계속하셨다. 혈육이 죽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거의 20년 세월, 한 해도 거름 없이 제사를 모신 정성이 놀랍다.
북한군에게 죽임을 당한 그분들의 후손이 이어받았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추모제는 중단됐다. 비석조차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그래서 강화군청에서 나서 비석을 송해면 소방서 뒤편으로 옮겼다. 비석 앞면에 殉義碑(순의비)라고 새기고 옆과 뒷면에 죽음을 기리는 글과 사망자 명단 그리고 비를 세운 이들의 이름을 새겼다. 다음은 비에 기록된 글이다.
“누구인들 죽음을 원하랴마는 정의의 죽음은 빛이 있고 누구인들 삶을 싫어하랴마는 구차한 삶은 보람이 없나니 이 보람 없는 삶을 버리고 빛나는 죽음을 택한 이가 과연 누구인가? 이 자리에서 하루아침 이슬로 살아진(사라진) 70여 인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슬프다. 이네들이 6·25 국난을 당하여 살여면(살려면) 방편도 없지 않았으련만 차라리 죽음의 길을 택하여 소지를 굽히지 않았으니 가위 살아서 양민이요 죽어서 의령이라. 어찌 청사에 무명의 빛을 남기지 않았으리오. 그대들이 이루지 못한 뜻은 우리 후배들이 달게 이어받을 터이오니 의령들은 부디 원한을 풀고 길이 명복을 누리시라.”
강화 사람들을 중심으로 특공대가 조직됐다. 연백에서 피난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특공대는 강화의 치안유지를 맡았다. 질서를 바로잡는 데도 기여했다.
1·4후퇴 때 경찰이 철수해서 치안 공백이 된 강화를 지킨 것도 특공대였다. 북한군과 곳곳에서 소규모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 점령 기간 그쪽에 붙었던 사람들을 색출하면서 죄 없는 민간인들을 죽이기도 했다.
특공대원들의 식사를 지역 주민들이 맡았다. 집집이 돌아가며 밥을 해가야 했다. 어느 집에서 밥을 해갔는데 특공대원들이 그릇을 내동댕이치며 화를 냈다. 쌀밥이 아니라 보리밥이라는 이유였다.
당시 강화는 몇 년째 흉년이었다. 더구나 전쟁통이다. 사람들은 쇠비름을 뜯어 먹으며 연명했다. 한 중학생 집에 벽시계가 있었다. 그래도 사는 집안인 셈이다. 어느 날 시계가 사라졌다. 어머니께 시계가 어디 갔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시계를 팔아 감자를 겨우 구했다. 굶어 죽을 처지인데 보리밥인들 고맙지 않으랴만, 특공대원들은 그렇게 행패를 부렸다.
그때 보리밥 해갔다가 봉변당한 어머니의 눈물과 탄식을 보고 들은 소년은 지금 80대 할아버지이다. 아직도 그 일을 생생히 기억하며, 같은 강화 사람들인데 어찌 그럴 수 있나, 혀를 찬다. 북한군이 점령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공포가 훅훅 몰아치곤 했다.
“우리는 멈추지 않아요”
전쟁이 끝났다. 강화 땅은 대규모 포격을 받지 않았다. 간간이 미군 비행기가 와서 기관총을 쏘고 가는 정도였다. 그래서 건물 파괴가 심하지 않았다. 시골 마을. 전쟁 전과 겉모습은 같았다. 그러나 속 모습은 변했다.
살갑게 어우러지던 공동체 공간이 갈라지고 말았다. 좌익 집안과 나머지 집안 간에 또 다른 휴전선이 그어졌다. 품앗이, 결혼식, 장례 등등 서로 돌아보지 않았다. 공산당에게 가족이 피해를 본 집안의 분노는 쉽게 식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가면서 상처는 아물었다. 그러나 생채기는 여전히 남아 가끔 가슴을 후빈다. 지금도 아버지를 붙잡혀 가게 한 이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는 노년의 신사는 긴 한숨을 내쉰다.
6·25전쟁 이후 70년. 돌아보니 북한군이 절대악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남한 사람들도 절대선은 아니었다. 절대선은 없었다. 절대악은 남도 북도 아닌, 전쟁 그 자체였다. 전쟁은 선마저 악으로 만들기도 했다. 강화에서 6·25를 겪으신, 지금 80대요, 90대 어르신들. 전쟁 재발 방지의 소중함을 강조하셨다. 안보의식과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을 말씀하셨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어떤 분은 절대로 북을 도와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6·25 때 경험을 바탕으로, 공산당은 얌전하고 친절하더라, 그러나 속은 잔인하고 교활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북한에 대한 불신이 강했다.
또 어떤 분은 “지금 북한이 지내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 같은데 우리가 북한보다 잘살고 있으니까 좀 도와도 주고 그랬으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말씀하신다. 남과 북의 화합이 중요하긴 하지만, 어려울 것 같다고도 하신다. 남한 안에서도 서로 싸우기만 하고 화합할 줄 모르는데 어찌 남과 북의 화합이 쉽겠냐고 하셨다.
전쟁 당시 강화에서 10대 소년들이 소년단을 결성해서 마을을 지키는 데 일조했다. 소년단은 특공대에 암호를 전달하고 치안을 보조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했다. 소년단으로 활동하다 북한군에게 붙잡혔던 어르신이 있다.
그분은 목숨을 건졌지만, 그때 구타당한 후유증으로 지금껏 허리앓이하고 있다. 여쭈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떻게 보시는지. 밝다고 하셨다. “그래도, 한국 혼이 있어. 당장은 어렵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아요.”
〈인천역사통신〉 제25호,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 2020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