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명에 대한 의리, 실로 대단했다. 명나라는 진정으로 조선에 감사해야 했다. 본디 사대란 큰 나라 작은 나라 피차 기본적인 섬김의 자세가 필요한 법이니.
그런데 명나라의 조선 인식은 어떠했을까. 그저 조금 더 각별한 오랑캐 정도이지 않았을까. 애정과 믿음? 글쎄. 명나라 장수 주문욱의 조선에 대한 인식은 이랬다. 아마도 명나라 사람들 대개가 비슷했을 것이다.
조선은 비록 약하지만 우리의 울타리이다. 우리를 도와 오랑캐를 제압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우리를 배반하여 오랑캐에게 보탬이 되기에는 충분하다.
명에는 조선도 견제와 감시의 대상일 뿐이다. 후금(청)은 조선이 명과 손잡고 자기네를 칠까 봐 걱정했고 명나라는 조선이 후금(청)과 손잡고 자기네를 칠까 봐 걱정했다. 아무튼, 조선이 소중한 나라이기는 했네.
지금 한반도 주변 정세가 병자호란 때랑 비슷하다며 걱정하는 의견이 많다. 대한민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라고도 한다. 에이, 처량하다.
역으로 한번 생각해볼까. 샌드위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가운데 낀 각종 속 재료다. 알맹이다. 영양가와 단가도 제일 높다. 바깥에 두 개의 식빵은 그냥 껍데기이다.
돌이켜보자. 수천 년 우리 역사에서 대외관계 평온하던 시기가 얼마나 되랴. 시련이라면 시련이고 역경이라면 역경이다. 시련, 역경 다 극복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까짓거, 할 수 있다. 주변국에 휘둘리지 않고 바로 설 수 있다.
고려의 서희처럼 상대의 속마음을 읽어내는 능력, 빈틈을 볼 줄 아는 통찰력, 적절하게 숙여주되 비굴하지 않은 의젓함, 상대에게 얕보이지 않고 끌려다니지 않는 당당함. 때로는 “배 째” 할 수 있는 담대함. 정권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을 우선하는 실질적인 조국애. 필요한 게 많기는 하다.
이때 묘당이 사람을 심양으로 보낼 계획을 이미 확정했는데, 이는 대개 황 감군의 오랑캐 동정을 정탐하라는 요청에 의한 것으로, 겸하여 옛날의 우호 관계를 닦으려는 것이다.
톺아볼 만한 사료이다. ‘이때’는 병자호란 몇 개월 전인 1636년(인조 14) 9월이요, 황 감군은 명에서 조선에 온 사신 황손무이다. 묘당 즉 비변사에서 청나라에 사람을 보내 우호 관계를 회복해보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게 한 이가 황손무라는 얘기다. 명의 사신이 조선과 청나라가 친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황손무는 명이 청을 치는데 조선이 협조하라는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명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자신의 속마음을 담은 편지를 조선 조정에 보냈다. 공식적인 명의 입장과는 다른 소리를 했다. 얼추 이런 내용이다.
조선은 청에 대한 기미 정책을 계속 추진해서 그들과 적절히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겠다. 구구한 의리를 내세워 망국의 화를 재촉하지 말라. 저들을 배척만 하다가 침략당하면 아마도 나라가 무너질 것이다. 조선이 망하면 그건 조선의 불행일 뿐 아니라 우리 명나라에도 불행이다. 명의 동쪽 울타리가 무너지는 셈이니까. 이는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조선이 청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명나라에도 이익이라는 현실적인 인식이다. 이에 고무된 비변사에서 청나라 심양으로 사신을 보내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청의 동정을 정탐한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내세워서 말이다.
하지만 청과 절대 화친할 수 없다는 조정 척화 신료들의 거대한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황손무가 조정의 반응을 알았던 것일까. 인조에게 글을 또 보내 이렇게 말했다. 학문은 현실 정치를 잘 펼치려고 하는 것인데 조선은 그렇지가 않다. 정사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시 3백 편을 외우는 게 무슨 소용인가.
이어서 말한다. “뜻도 모르고 응얼거리고 의관이나 갖추고 영화를 누리고 있으니 … 군대를 강하게 만들고 세금을 경리하는 것을 왕의 신하 중 누가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으니 몹시 안타깝습니다.”
21세기.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직접적인 나라가 미국과 중국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을 자기편에 묶어 두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들도 내심 한국이 미국이나 중국 어느 한 나라 편에 완벽하게 서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만약에 한국이 중국과 완전 절교하고 미국 편이 된다면 그게 오히려 미국의 국익을 해칠 수 있다. 반대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미, 중 양국은 한반도에서 어떤 극단적인 정세 변화가 오는 걸 바라지 않을 것이다. 현상이 유지되기를 원할 것이다.
약 400년 전 조선 조정에 배달된 황손무의 편지는 오늘날 우리 외교를 풀어가는데 뭔가 작은 실마리를 줄지도 모르겠다.
《오군 오군 사아이거호》 '황손무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