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떡이었다.
된장, 고추장, 부추 등속 버무려 오물조물 동그랗게 만든 장떡을 나는 좋아했다. 짭짤한 장떡만 있으면 밥을 맛나게 먹었다. 일 년 전 이맘때, 어머니는 자식 놈 먹이려고 온종일 장떡을 만들어 채반에 널어놓으셨다. 적당히 말려 냉동실에 넣어두면 꽤 오래도록 나의 최고 반찬이 된다.
다음날이었던 것 같다. 우당탕, 소리가 컸다. 불길한 느낌이 확 일었다. 뛰쳐나가 보니 어머니가, 쓰러져 있다.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해서 119 도움받아 병원으로 모셨다. 작은 병원, 큰 병원 옮겨가며 입원, 허리 수술, 입원, 몇 개월 만에 결국은 요양원으로 가셨다.
집안에서도 보행기에 의존해 겨우겨우 걷는 양반이 장떡 채반을 옮기다가 넘어지신 게 발단이었다. 아들놈 불러서 채반 옮기라고 하면 될 것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 당신이 손수 하시려다가 사고를 당했다.
아흔 되어가는 어머니 여전히 입원 중이던 어느 날, 육십 넘은 아들은 냉장고를 열었다. 집사람 출근한 사이에 장떡을 버리려는 것이다. 식탁에 장떡 통을 내놓고 가만히 보니, 장떡이 뭔 죄인가, 싶었다. 이것 때문에 어머니가 낙상 사고를 당하기는 했지만,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담긴 음식인데 버려서야 되겠나, 싶었다. 도로 냉동실에 넣었다.
집사람이 눈치를 보며 장떡 몇 조각 구워 밥상에 올렸다. 한입 베어 물었는데 넘길 수가 없었다. 먹지 못했다. 우당탕 소리가 또 들리는 것 같았다. 이튿날 나는 장떡을 모두 내다 버렸다. 집사람은 묻지 않았다.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장떡을 영영 먹지 못할 것 같다.
![]() |
![]() |
요양원 생활 초반, 정신만 온전한 어머니는 “내 신세가 왜 이리됐냐” 한탄만 하셨다. “차라리 죽을 병 걸린 게 낫지.” 이런 소리 들을 때마다 아들은 손바닥으로 탕탕 제 가슴만 쳤다. 어머니 깊은 한숨 소리에 아들은 더 깊은 한숨을 삼켰다. 수개월 지나면서 어머니는 조금씩 새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 ‘적응’이라 쓰지만, 사실은 ‘체념’이리라.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며칠 전, 면회 갔을 때 어머니 모시고 나온 복지사 선생님이 내게 검정 비닐봉지를 주셨다. 어머니가 그러셨다. “쌤비다. 가져가서 먹어. 너 이거 좋아하잖냐.” 어머니는 전병 과자를 ‘샘비’도 아니고 ‘쌤비’라고 부른다. 하여 나도 그렇게 부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상황인가.
마음 고운 요양원 원장님이 식사 제대로 못하는 어머니에게 전병 과자 한 봉지를 주셨다. 어머니는 부채 모양 과자를 맛나게 드시다가, ‘우리 아들도 좋아하는데’ 생각에 이르렀다. 그 순간 어머니는 과자 먹는 걸 중단하고 그걸 담아 두게 했다가, 나에게 주신 것이다. 주시면서 어머니는 살짝 웃었다. 요양원 오시고 처음 보는 미소였다. 어머니 미소에 아들은 웃음으로 화답하지 못했다. 천장 올려다보며 눈만 껌뻑하였다.
어머니 집에 계실 때, 좋아하시는 ‘쌤비’를 종종 사다 드렸었다. “나 혼자 먹자고 이걸 돈 주고 사 오냐.” “아냐, 엄마, 나도 좋아해요. 맛있잖아.” 그러면 어머니가 몇 개 꺼내 주시곤 했다.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쌤비’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쌤비’를 아주 좋아한다고 믿으셨다.
소파에 멍하니 앉았다가 어머니에게 받아온 과자 봉지를 열었다. 한 조각 입에 넣는다. 바사삭 깨지며 고소한 맛이 피어오른다. 눈물이 예고도 없이 주룩, 흐른다. 닦지 않는다. 입안의 과자가, 장떡도 아닌 것이, 짭조름한 것 같다. 먹는다. 요양원에서까지 아들 먹을 거 챙겨주시며 흐뭇해하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우걱우걱, 꺼이꺼이 먹는다.
어머니, 어머니, 엄마!
〈사학연금〉 2023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