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고양시에 다섯 왕릉을 모신 서오릉(西五陵)이 있다. 경릉, 창릉, 명릉, 익릉, 홍릉이다. 숙종이 잠든 곳은 명릉(明陵)인데, 제1계비 인현왕후도 함께 모셔 쌍분이 되었다.
그 옆으로 곡장을 달리해서 제2계비 인원왕후를 모셨다. 숙종이 왼쪽으로 눈길 주면 인현왕후요, 오른쪽을 바라보면 인원왕후이다. 그럼, 숙종의 원비는 어디에 계신가? 서오릉의 하나인 익릉(翼陵)이 숙종 원비 인경왕후의 능이다.
숙종 왕릉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봉분만 달랑 있는 대빈묘(大嬪墓)가 있다. 홍살문도 없고 정자각도 없는 이 무덤이 희빈 장씨, 장희빈의 묘이다. 1722년(경종 2) 10월에 장희빈을 추존하여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이라 했기에 대빈묘라고 부른다.
석물이 간소하게 서 있기는 하나 왕릉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세자와 세자빈의 무덤 그리고 왕을 낳은 부모의 무덤을 원(園)이라고 한다. 장희빈은 왕의 생모지만, 폐비 되었기에 무덤의 명칭이 원 아닌 묘가 되었다.
장희빈은 서오릉 안에 묻히고 싶었을까? 원래 양주 인장리(지금의 경기도 구리시)에 묘를 썼다. 숙종의 명을 받은 예조참판이 직접 지관을 거느리고 여러 곳을 다니며 좋은 땅을 찾은 끝에 정한 곳이었다.
그런데 양주에 묘를 쓰고 10여 년이 흐르면서 장희빈의 묏자리가 불길하다는 의견이 일어났다. 숙종이 묘를 옮기라고 했고 명을 받은 예조참의가 용하다는 지관 10여 명과 길지를 찾아 나섰다. 1년 만에 수원 청호촌과 광주 진해촌으로 압축됐다.
숙종은 장희빈이 새로 잠들 땅을 광주(廣州) 진해촌으로 결정했다. 1719년(숙종 45) 4월, 장희빈의 묘소가 양주에서 광주로 이장됐다.
그렇게 수백 년, 경기도 광주 땅에서 외로움을 벗 삼아 잠들어 있었다. 1969년에 묘역으로 길이 나게 되면서 지금의 자리 서오릉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돌고 돌아 초라한 모습으로 숙종의 그늘에 거처를 잡았다. 차라리 광주에 홀로 누워 있던 그 시절이 마음 편하지 않았을지.
예전에 114에 전화 걸면 목소리 예쁜 여인이 “사랑합니다, 고객님.” 그랬었다. 처음들은 ‘고객님’은 당황했었지만, 이내 사랑한다는 소리가 듣기 좋아졌다. “저도요.” 그러고 싶은 장난기가 일기도 했다. 이 나이에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어 보겠나 말이다.
그래, 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기분 좋은 단어다. 숙종과 장희빈 역시 듣기만 해도 좋은 사랑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너무 복잡하고 어렵고 고단해졌다. 핑크에 파란색이 섞이고 노란색도 섞이면서 점점 무거운 짐이 되어 갔다. 끝내 남자는 여자를 죽게 했고 멀리 보냈다. 그러나 여자는 다시 남자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묻혔다. 그들 남녀의 운명이 그러한가 보다.
《숙종, 강화를 품다》, ‘숙종과 왕후의 무덤’ 첨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