啐(줄), 어려운 한자다. 옥편을 찾아보니 ‘빠는 소리 줄’ 자로 나온다. 우는 소리, 떠드는 소리라는 뜻도 적혀 있다. 啄(탁), 역시 어렵다. ‘쪼을 탁’ 자다.
알 속 병아리가 세상으로 나올 때가 되면, 뭔가 소리를 낸다고 한다. 여린 부리로 껍데기를 두드리는 모양이다. 그러면 어미닭이 알아듣고 밖에서 알을 조심스레 쪼아준다. 안팎에서 동시(同時)에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이렇게 병아리가 태어난다.
하여, 생긴 말이 ‘줄탁동시(啐啄同時)’다. 불경에 처음 언급된 성어인데, 교육의 의미를 말할 때도 종종 인용된다. 학생의 노력과 교사의 조력이 어우러지면서 학생이 성장한다는 뜻으로 말이다. 아니, 학생과 교사가 함께 성장한다고 해석해야 온전할 것 같다.
본연의 줄탁동시가 엄마와 뱃속 아기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아가의 미묘한 신호를 감지한 엄마는 몸으로 응답한다. 아기를 위해 문을 열어준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극한의 시련 속에서 마침내 분만에 이른다.
그런데 산모가 겪는 그 숭고한 아픔만큼이나 바깥으로 나아가려 몸부림하는 아가의 고통도 몹시 클 것이다. 차라리 엄마처럼 신음이라도 토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지도 못한다. 드디어 “응아!” 첫울음을 터뜨리는 아가, 얼마나 기진했으랴. 새 생명은 이렇게 고통 속에 온다.
그저 잠만 자는 갓난아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환희로운 한순간을 맛본다. 어느 순간 아기가 눈을 떠 나를 응시한다. 첫 눈맞춤이 이루어지는 순간, 뭉, 클, 하였다.
그래 아가야, 내가 네 할아버지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