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올해는 2025년입니다. 150년 전인 1875년(고종 12)에 초지진 수비군이 무단 침입한 일본 군함을 쫓아냈습니다. 운요호 사건입니다. 다음 해 1876년(고종 13) 2월, 그들이 다시 강화에 왔습니다.
조선 정부에 따지겠다고 왔습니다. 서계(외교문서) 접수 거부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사과를 받겠다는 겁니다. 중국에 가다가 물이 부족해 물 좀 달라고 간 사람들에게, 그것도 국기를 달아 국적을 밝힌 사람들에게 물은 안 주고 포격한 이유가 뭐냐.
인도주의적으로도 그렇고, 국제법상으로도 그렇고, 조선이 잘못했다는 얘기입니다. 지난 호(제77호, ‘운요호 사건의 진실’)에서 말씀드린 대로 식수를 구하러 왔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중국 가던 길이라는 말도 거짓입니다. 국기를 달았다는 것도 거짓인 것 같습니다.
조약을 맺으러 오는 거면서 거짓 명분을 내세운 것은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잘못은 자기들이 해놓고 사과를 요구하는 뻔뻔함. 우리는 이를 적반하장이라고 합니다.
강화도에서 조선 대표와 일본 대표가 만났습니다.
일본 대표가 짐짓 발끈하여 따집니다.
“우리 선박 운요함이 작년에 우장으로 향하던 중에 귀국 경내를 통과하다가 귀국인의 포격을 받았으니 교린의 우의가 어디에 있습니까?”
조선 대표가 점잖게 응답합니다.
“애초에 어느 나라 배가 무슨 일 때문에 왔다는 사유를 먼저 통지하지 않고 곧장 방수(防守)하는 곳으로 진입했으니, 변방 수비병의 발포 또한 부득이한 일이었소.”
조선은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운요호 사건 때 일본군이 영종도를 분탕한 게 잘못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당연한 대응입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위축되게 만들고 협상의 우위를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대표는 신헌
일본 대표는 구로다 키요타카입니다. 수백 명 군사를 대동하고 강화도로 왔습니다. 구로다의 공식 직함은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변리란, ‘옳고 그름을 따져 알아본다.’ 정도의 의미입니다. 뭘 따져 보겠다는 소리인가? 서계 문제와 운요호 사건입니다. 조약 체결 대표라는 의미는 직함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들을 만날 조선 대표는 강화유수를 지낸 신헌(申櫶, 1810∼1884)입니다. 신헌의 공식 직함은 접견대관(接見大官)입니다. 접견은 ‘신분이 높은 사람이 공식적으로 찾아온 사람을 만남’이라는 뜻입니다. 일본에서 사람들이 오니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겠다는 정도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조선은 일본이 강화도에 오는 이유를 전혀 몰랐을까요? 그냥 운요호 사건 등에 관해 시비나 걸려고 오는 것으로 알았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 일본이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려고 온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 대표단이 강화로 오던 중 남양부사(지금 화성시장)를 만났습니다. 남양부사가 왜 왔느냐고 묻자, 일본 대표단은 조선과 새로운 조약을 맺으려고 왔다는 의미로 대답했습니다. 남양부사는 즉시 조정에 보고했습니다.
조선은 ‘새로운 조약’을 일본과 전통적 우호 관계를 다시 확인하되 조금 더 구체화하고 시대 변화에 맞게 수정하는 정도로 여겼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이때만 해도 근대적 의미로 ‘개항’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겁니다.
연무당에서 조약을 맺다
한편, 운요호 사건 얘기를 계속해봤자 득 될 게 없다고 여긴 일본 협상단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13조항으로 작성한 조약문 초안을 내놓고 체결을 요구한 겁니다.
신헌은 일본이 내민 조약문을 조정에 보냈습니다. 조정에서 대책 회의가 이어졌습니다. 이건 거부하고 이건 승낙해도 되겠다,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신헌은 신헌대로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일본 측과 밀고 당겼습니다.
일본 협상단은 군인들을 동원해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조약이 체결되지 않으면 수만 명 대병력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공갈도 치면서 조선을 겁박해댔습니다. 조선 협상단은 끌려다니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위협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조약안 일부 문구를 수정하고, 수용할 수 없는 내용은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많은 이가 오해합니다. 조선 대표 신헌 등이 일본의 위협에 쫄아서, 조약안을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은 채, 일본이 시키는 대로 도장 쿡쿡 찍어주고 조약을 체결했다고 여깁니다. 그렇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조선 측의 한계도 명확했습니다. 근대적 조약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조약문의 후폭풍을 예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초안의 ‘대일본국 황제 폐하와 조선국왕 전하’를 ‘대일본국과 대조선국’으로 고치는 등 국가 체면과 형식적 명분 지키기에 머물렀습니다. 일본은 당연히 실리를 챙겼습니다.
첫 회담하고 거의 20일이 흘러서야 양국은 합의에 이르렀습니다.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강화산성 서문 옆 연무당에서 12개 항목으로 된 강화도조약을 맺었습니다. 공식 명칭이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입니다만, 대개 강화도조약이라고 합니다. 1876년이 병자년이라서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하고요.
13개 항목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 일본이 처음 제시한 건 13개 항목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조선이 거부해서 제외했습니다. 제외한 내용은 “… 이후 타국이 조선국과 수호하고 화약(和約)을 의립할 때 만약 이 조약 내에 기재되지 않았는데 별도로 타국에 허락하는 조건이 있으면 일본국도 그 특전을 받아야 한다.”였습니다. 말이 좀 어렵네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조선이 일본에 A, B 권리를 주었는데 나중에 조선이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으면서 A, B, C 권리를 주게 되면 일본도 자동으로 C 권리를 갖는다는 소리입니다. 이에 조선은 외국과 또 조약을 체결할 일이 없을 것이라며 삭제를 요구해서 관철했습니다.
혹시 강화도조약 12개 항목 내용이 필요하신 분은 다음(Daum)이나 네이버(NAVER)에서 ‘강화도조약 내용과 해설’로 검색하세요. 조약문과 간략한 해설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강화도조약 때문에 망했다?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입니다. 아울러 조선에 불리하고 일본에 유리한 불평등조약입니다. ‘근대적’ 국가가 전근대 국가에 조약을 강요할 때 전근대 국가는 불이익을 당하기 마련이에요.
청나라가 영국과 맺은 개항 조약도 청나라에 불리한 불평등조약이며, 일본이 미국과 맺은 조약 역시 일본에 몹시 불리한 불평등조약이었습니다. 강화도조약은 조선의 치욕이 아닙니다.
조선은 조약 맺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일본이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회담에 응한 걸까요? 아닙니다. 고종은 이미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아버지 흥선대원군과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일본은 300년 동안 수호하던 곳인데, 이제 서계의 일로 이처럼 여러 날 동안 서로 버티니, 헤아리기 참 어렵다. 정부에서 미리 강구하여 타결할 방책을 만드는 것이 좋을 듯하다.”
강화도조약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일본과의 ‘근대적’ 관계가 강화도조약에서 비롯되다 보니 이런 평가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불평등조약 자체가 원인이라면 일본부터 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어쨌든 발전의 길을 갔습니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원인은 일본의 군사 침략을 막아내지 못한 데 있습니다. 개항 이후 고종을 포함한 지도층의 대처 과정에도 잘못한 부분이 참 많았습니다. 강화도조약에 독박을 씌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진 두 장, 큰 오해
인터넷에서 강화도조약을 검색할 때, 으레 따라 나오는 사진 두 장이 있습니다. 이 사진들이 조선을 한심한 나라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우선 열무당 사진입니다(사진2).
열무당(閱武堂)은 강화읍사무소 옆 ‘강화군가족센터’ 자리쯤에 있었습니다. 무장한 일본군이 여럿 서 있고 그들 옆으로 대포처럼 보이는 무기들이 빼곡합니다. 그 안에서 강화도조약을 맺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연상되는 것이 있지요? 일본군에게 갇혀서 벌벌 떨고 있는 조선 대표단!
아닙니다. 여기서 조약을 체결한 게 아닙니다. 조약 체결 장소는 열무당이 아니라 연무당(鍊武堂)입니다. 연무당은 강화산성 서문 옆에 있던, 진무영 병사들의 훈련장입니다. 지금은 ‘연무당 옛터’(사진1)라는 비석만 서 있지만, 그때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조약을 맺은 겁니다. 연무당과 열무당을 구분하지 않아 생긴 오해입니다.
또 하나의 사진은 조약 체결 장면입니다(사진3).
보고 있자니 우울해집니다. 일본 대표 구로다로 보이는 이가 주인인 양 중앙 상석에 앉았고 조선 대표 신헌으로 보이는 노인이 오른쪽에 앉았네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까지 숙였습니다. 빌빌대는 조선, 뭣도 모르면서 일본이 시키는 대로 따르며 숙이며, 조약 맺는 조선의 이미지가 떠오르게 됩니다.
당시 신헌은 67살, 구로다는 37살이었습니다. 그렇게도 명분과 격식을 중시하는 조선의 신헌이, 그 꼬장꼬장한 신헌이 저 자리에 저렇게 쭈그리고 앉아 조약을 맺었을 리 없습니다.
이 사진은 출처가 불분명합니다. 사진이라고 설명들 하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진짜 사진이 아닙니다.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납니다. 일본 교섭단은 강화도에 머무는 동안 구석구석 돌며 많은 사진을 찍어 남겼습니다. 열무당 사진도 그들이 촬영한 것입니다.
꼭 찍어야 할 결정적 장면은 조약 체결 현장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사진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하필 당일에 사진기가 고장 났을 수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찍었다면? 그랬다면 그들이 공개하기에 불편한, 그런 장면이 찍혔을 겁니다. 그래서 감췄을 겁니다. 대신 정체불명의 ‘사진3’이 나돌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진3’을 강화도조약 체결 장면이라고 믿고, 소개하고, 교육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이들 교과서에 무장군인 서 있는 열무당(사진2)과 함께 강화도조약 체결 장면이라고 하는 ‘사진3’이 여전히 실려 있습니다. 학교 시험문제는 물론이고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도 출제됩니다.
《수신사기록 번역총서 5》(보고사, 2018)라는 책에 일본인 소가 소하치로가 쓴 〈조선응접기사〉가 실려있습니다. 이 책에 강화도조약 체결 현장을 그린 그림이 한 장 나와요. 조선 대표 두 사람과 일본 대표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은 모습이에요(사진4). 사실이라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만, 문제의 ‘사진3’보다는 훨씬 진실에 가까운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강화도조약은 분명 아쉬운 사건입니다. 성찰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강화도조약으로 느끼는 부끄러움의 상당 부분은 사실과 거리가 먼, 왜곡된 기억이 원인입니다. 왜곡을 바로잡고 실체를 확인하는 작업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강화투데이〉 2025년 3월 25일 제79호
강화도조약 내용과 해설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전문대일본국과 대조선국은 평소 우의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우의가 미흡한 것을 고려하여 다시 옛날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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