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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한국사 속 강화도

역사 없는 땅이 어디 있으랴. 그럼에도 강화도는 좀 유별나다. 구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흔적이 섬 안에 가득하다. 고인돌의 성지로 남한 땅에서 제일 큰 탁자식 고인돌이 있다. 고조선·단군과 관련된 전설이나 유적은 전국 여러 곳에 퍼져있다. 그런데 옛 역사책에 기록이 남아 공신력이 인정되는 곳은 강화도의 참성단과 삼랑성이다.

 

삼랑성(정족산성) 서문

 

  《고려사마리산은 부의 남쪽에 있으며 산 정상에 참성단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제단이라고 한다.”, “전등산은 일명 삼랑성인데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은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적혀 있다. 세종실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비록 세상에 전하기를[世傳]’이라는 단서를 달았으나 나라에서 편찬한 공식 역사책에 담긴 내용이기에 그 무게감이 남다르다.

  전국체전 때마다 마니산(마리산) 참성단에서 성화를 채화해 경기장으로 봉송한다. 삼랑성(三郎城)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족산성이라고 흔히 부른다. 이 성안에는 삼국시대에 세웠다고 전하는 전등사가 있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정족산사고가 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격퇴한 곳도 이 산성이다.

 

마리산

 

  고려시대 강화도는 대몽항쟁의 거점이었다. 39년간 고려의 수도였다. 남한 땅에서는 유일하게 고려의 왕릉이 여러 기 있다. 몽골에 맞서던 이 시기에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인쇄본 상정고금예문을 편찬했다. 이때 강화도에서 활동한 주요 인물은 임금 고종, 무신집권자 최우, 몽골과의 외교에 업적을 남긴 문장가 이규보이다.

  조선시대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어냈다. 권율 장군이 태어난 땅이고 송강 정철이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한 곳이 강화다. 권필은 오래도록 머물며 학문에 정진했다. 수많은 왕족이 유배 왔던 눈물의 섬이기도 하다. 연산군과 광해군이 대표적이다. 철종도 즉위 전에 강화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조선 양명학이 뿌리를 내리고 대를 이어 발전해 간 곳이 강화이다. 정제두에서 비롯된 조선 양명학의 흐름, 그 인물들을 강화학파라고 부른다. 이광사, 이긍익, 이건창, 정인보 등이 강화학파 학자들이다. 경술국치 전후 다수의 강화학파 인물이 만주로 간다.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프랑스의 침략, 병인양요(1866) 그리고 미국의 침략, 신미양요(1871) 모두 강화도였다. 흥선대원군이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펼치고 있을 때다. 그들이 강화도를 침략한 것은 강화도라는 섬이 한강을 통해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이다. 강화도를 차지하면 한양을 봉쇄하고 겁박할 수 있다.

  1866(고종 3) 병인년, 프랑스군이 지금의 강화읍내를 점령한다. 대원군은 양헌수를 보냈다. 양헌수는 병력을 이끌고 정족산성에 들어갔다. 읍내에 있던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을 공격한다. 이 전투에서 양헌수 부대가 크게 승리한다. 퇴각한 프랑스군은 강화읍내에 불을 지르고 서둘러 철수한다. 이때 외규장각 도서를 탈취해 갔다.

  1871(고종 8) 신미년, 이번엔 미군이 쳐들어왔다. 그들은 초지진에 상륙하여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에 이른다. 광성보는 어재연이 지키고 있었다. 조선군은 미군의 독한 포격을 견뎌내고 처절한 백병전을 펼치다 쓰러져갔다. 목숨 남은 병사들은 물로 뛰어들어 자결했다. 광성보를 점령한 미군은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다. 조선은 끝내 거부했다. 결국, 어쩌지 못하고 미군은 그냥 철수한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비판하는 견해가 있다. 대원군이 통상수교거부정책 즉 쇄국정책을 고집해서 쓸데없는 전투를 벌였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때 개항해서 근대화를 추진했다면, 성공했을 거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결론 내리기에는 당시 국내외 상황이 너무도 복잡했다. ‘개항이 나라를 살리는 요술 방망이인가? 먼저 개항하는 것이 정답인가? 청나라는 일본보다 먼저 개항했다. 그러나 무너져 내렸다.

 

덕진진 수로

 

  쇄국이 무조건 잘못됐다는 주장은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떤 견해를 갖던 그것은 개개인의 몫이다. 다만, 강대한 외적의 침략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맞섰던 선조들의 죽음의 가치만큼은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것이다.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 진과 보는 조선시대 후기에 강화도 해안에 설치된 해안경계부대다. 모두 12개가 있었다. 각각의 진과 보는 초소 역할을 하는 돈대를 몇 개씩 관리했다. 해안에 설치된 돈대는 모두 54개였다.

  한편 초지진이 신미양요에 이어 또 한 번 역사의 무대에 선다. 운요호 사건(1875)이다. 일본 군함 운요호가 함포 사격을 가하며 초지진 상륙을 기도했으나 초지진 수비군의 반격에 밀려 퇴각한 사건이다. 이를 빌미로 강화도조약(1876)이 맺어진다. 조일수호조규 또는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을 계기로 조선은 개항하게 된다.

 

쇄국정책(鎖國政策)()’에는 자물쇠, 잠그다 등의 뜻이 있다. ‘쇄국은 나라를 걸어 잠그다, 개항을 거부하다, 정도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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