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史

사공 손돌과 손돌목 이야기(下)

또 다른 해석

이제 지금까지와 다른 시각에서 손돌목을 보겠습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는 손돌목을 손량항(孫梁項)으로 적었습니다. 《인조실록》에서도 ‘손량항’이 보입니다. ‘梁’은 착량(窄梁)에서 따온 글자입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에 ‘착량(窄梁)’이라는 강화의 지명이 등장합니다.

‘窄’은 ‘좁을 착’ 자입니다. ‘梁’은 ‘들보’ 또는 ‘징검다리’라는 원뜻과 달리 좁은 바다, 즉 해협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명량해전, 노량해전 할 때의 그 ‘량’입니다. 그러니까 ‘착량’을 폭이 좁은 바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될 것입니다.

《속수증보강도지》는 강화와 교동 사이 바닷길이, 그러니까 내가면 외포리 바다쯤이 착량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대개의 역사학자가 염하 또는 염하의 한 구간인 손돌목을 착량으로 봅니다. 《승정원일기》(1682.08.23.)에도 ‘착량 옆이 문수산’[文殊卽窄梁之傍也]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시사인천》(2016.12.12. 김락기)에 손돌목과 관련한 다양한 해석을 소개하는 글이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이승희(1847∼1916)의 〈강화일기〉를 이렇게 인용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 자주 나오는 착량(窄梁)이 바로 손돌목으로 한자 ‘착(窄)’을 우리말로 ‘손’이라 읽으며, ‘량(梁)’을 ‘석항(石項, 즉 돌목)’으로 해석하는 게 맞다고 적었다. 나아가 뱃사공 손돌의 이야기는 호사가들이 갖다붙인데 불과하다고 했다.

 

〈강화일기〉의 원문을 확인해보았습니다. ‘釋窄如讀孫, 釋梁如釋石項’(석착여독손, 석량여석석항)입니다. ‘착(窄)’이 ‘손’되고, ‘량(梁)’이 ‘석항(돌목)’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김락기는 기사에서 《용비어천가》도 언급했습니다.

 

이승희 선생의 위와 같은 해석은《용비어천가》에도 보인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ㆍ반포하신 뒤에…태조 이성계의 활약상을 그리는 과정에서 강화에 침입한 왜구들이 착량(窄梁)에 모였다고 하며 착량 옆에 한글로 ‘손돌’이라고 적어 놓았다. 즉 ‘착량(窄梁)’이라 쓰고 ‘손돌’이라 읽는다는 것이다.

 

이리되면, 손돌목이라는 지명은 사공 손돌과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국어학자 중에 뱃사공 손돌의 실체를 부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손돌이라는 사람으로 인해 손돌목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던 손돌목이라는 지명에서 사공 손돌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의견을 밝힌 기사를 소개합니다.

 

‘솔다’는 ‘너르다’와 반대로 공간이 좁을 때 쓴다. ‘저고리 품이 솔다’, ‘솔아 빠진 방’이라는 표현이 있다. 관련을 맺는 말들도 적잖은데, 말의 형태가 심하게 바뀌어 ‘솔다’에서 온 말인지 알기 어려울 때가 많다. ‘솔다’에 ‘곶’[串]이 합친 ‘송곳’이나, ‘솔다’에 ‘나무’가 합친 ‘소나무’가 있다. … 사실 ‘손돌’은 ‘솔다’와 ‘돌다’가 합쳐진 말로, ‘좁은 목’을 뜻하는 ‘착량’(窄梁)을 ‘손돌’이라고 표기한 보기를 <용비어천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겨레신문》(2008.01.30. 허재영)

 

한편, 조선 후기 문신 이유원(1814~1888)은 《임하필기》에서 “손돌목[孫石項]이 바로 강화부의 손방(巽方, 남동쪽)에 있기 때문에 일명 손석항(巽石項)이라고도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孫石項이 巽石項이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아주 생소한 이야기죠.

 

손돌 묘에서 철책 사이로 바라본 광성보 용두돈대

 

그렇다면

음, 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 봅니다. 근거를 제시할 수 없습니다만, 저는 사공의 죽음이라는 어떤 사건이 실제로 있었고, 그 사건에 극적인 요소가 스며들면서 오늘날의 손돌 전설이 되었을 수 있겠다고 여깁니다.

사공을 죽인 이가 임금이 아니라 어떤 높은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임금으로 격이 올라갔을 개연성도 생각해 봅니다. 갑곶나루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다가 손돌목에 이르러 벌어진 일인데, 그것이 김포 덕포진쯤에서 강화 광성보 쪽으로 건너오면서 일어난 사건으로 변화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손돌목에서 벌어진 사건이기에 사공의 이름이 손돌로 전해지게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설사 일부 학자의 견해대로 뱃사공 손돌 이야기가 완전히 창작된 허구라고 해도, 여전히 값진 역사문화 자산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오랜 세월 백성들이 믿으며 후대로 전해준 이야기는, 심지어 손돌이 바다의 신령으로 모셔지던 상황은, 그 자체가 역사성을 갖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은상은 ‘강도유기’에서 손돌 이야기가 사실인지 알 수 없다고 하면서도, “옛날 임금들의 몰인정한 횡포에 대해 원망과 함께 터져 나온 민중의 정의감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것 같아, 이 전설에 일종의 경의를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앞으로도 손돌 이야기는 훌륭한 문화 콘텐츠 역할을 할 것입니다. 50년 뒤, 100년 뒤, 손돌 이야기가 또 어떻게 변화되어 있을지 문뜩 궁금해집니다.

강화문화원, 《江華文化》 제18호(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