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지를 띄우시오
강화의 대표적인 전설 가운데 하나가 뱃사공 손돌 이야기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창작된 허구인지, 아니면 실재했던 어떤 사실에 점점 살이 붙으면서 완성된 이야기인지,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우선, 오늘날 널리 알려진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손돌은 뱃사공이다. 어느 임금이 난리를 피해 강화도로 오게 되었다. 김포 쪽에서 배를 타야 강화도에 올 수 있다. 임금을 모실 사공으로 손돌이 선발됐다. 배가 출발했다. 그런데 심히 출렁인다. 임금과 신하들이 보니 손돌이 물살 세서 위험해 보이는 곳으로 배를 저어 가는 거다.
잔잔한 곳으로 가도록 명했지만, 손돌은 듣지 않았다. 자신이 가는 길이 안전한 물길이었기 때문이다. ‘이놈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의심이 인 임금은 그 자리에서 손돌의 목을 치게 했다.
손돌은 죽기 직전 바가지 하나를 꺼내 놓으며, “내가 죽거든 이 바가지를 물 위에 띄워 흐르는 대로만 배를 저어가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면 사나운 여울을 피해 무사히 강화섬에 닿을 것이라 했다.
그가 죽자 물결이 더욱더 거칠어지고 배가 요동쳤다. 혼비백산, 와중에 정신을 수습한 누군가가 바가지를 띄웠다. 바가지 흘러가는 길 따라 배를 몰아가니 정말 신기하게 강화 땅에 닿았다.
임금은 충성스러운 백성을 의심하여 죽인 걸 후회했다. 그래서 양지바른 곳에 손돌을 묻어 주고 사당도 지어 원혼을 위로하게 하였다.
임금 심정! 짐작이 갑니다. 얼마나 민망했을지.
손돌이 죽임을 당한 그날이 10월 20일이라고 하죠. 양력으로 따지면 11월 말쯤입니다. 아직 본격적인 추위 전이지만, 해마다 이날만 되면 칼바람에 추위까지 닥치곤 한답니다. 손돌의 한이 부른 바람이요, 추위인 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도 ‘손돌추위(손돌이추위)’, ‘손돌바람(손돌이바람)’이라고 말합니다. ‘손돌이추위’와 ‘손돌이바람’은 국어사전에도 올라있습니다.
손돌이 처형된 그 바다가 ‘손돌목’으로 불리게 되었답니다. 김포 대곶면 덕포진과 강화 광성보 용두돈대 사이 바다가 손돌목입니다. 손돌목은 명량해전의 현장인 전남 울돌목과 함께 물살이 아주 센 곳으로 꼽힙니다. 해난 사고가 빈번했던 험한 물목입니다.
19세기 말, 손돌목을 지나던 한 서양인이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강물은 여기서 폭이 좁아져 거친 파도를 일으키면서 쏴쏴 거리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는다. 우리의 작은 조각배는 불안하게 이리저리 흔들렸다. 파도가 갑판에 몰아쳤고, 나는 극단적인 상황에 대처할 준비를 했다. 거대한 암초들이 강바닥 한가운데 솟아 있었다. … 선장은 능숙한 솜씨로 직접 배를 몰았다. 양옆으로 지나가는 암초들이 너무 가까워서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거품을 일으키며 솟아오르는 큰물이 우리 키보다 더 높았지만 운 좋게도 가장 위험한 순간이 지났고, ….”(《조선, 1894년 여름》)
손돌 이야기의 전거
손돌 이야기의 원형은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1760)의 《강도부지(江都府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강도부지》에 실린 손돌항(孫乭項) 부분을 그대로 옮깁니다.
옛이야기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이 몽고 군대에 쫓겨서 섬으로 피난 가게 되었다. 공민왕이 배를 탔을 때 손돌이 배를 조종했다. 갑진(甲津)에서 배를 타고 광성진(廣城津)에 이르렀는데, 바닷물은 제자리에서 빙빙 돌고 왼쪽과 오른쪽이 모두 막혔으며 갈수록 날이 어두워져 마치 나아갈 길이 없는 것만 같았다.
왕이 몹시 화가 나서 “손돌이 나를 속여 위험한 곳으로 끌어들였다.”고 말하고, 그의 목을 베어 죽이도록 했다. 뱃사람들이 강변에 그의 시체를 묻어 주고 그 땅의 이름을 손돌항이라고 했다고 한다. 무덤의 모양은 지금까지도 뚜렷이 남아있다. 해변에 사는 사람들은 매년 10월 20일에 풍랑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아는데, 그날이 손돌이 처형당한 날이라고들 한다.
‘옛이야기에 따르면’이라고 했습니다. 이야기의 유래가 꽤 오래라는 걸 알려줍니다. 그런데요, 《강도부지》 내용이 지금 전해지는 이야기와 다른 부분이 꽤 있습니다. 한번 뽑아 볼게요.
① 바가지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② 《강도부지》가 편찬된 영조 당시 손돌의 묘가 강화에 있었던 것 같다.
③ 임금이 김포 덕포진 쪽에서 강화로 건너온 것이 아니라, 갑곶나루에서 염하를 타고 내려오다가 지금의 광성보 어름에서 손돌을 죽였다고 했다.
④ 손돌을 죽인 임금이 고려 공민왕이라고 밝혔다.
이제 이 네 가지 차이점을 더 따져볼 건데요, 그 전에 손돌 이야기가 또 어디에 실려 있는지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강화유수 김노진이 1783년(정조 7)에 쓴 《강화부지》에 손석총(孫石塚)이 나옵니다. 손돌의 무덤을 말한 것인데,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손돌은 옛 뱃사공의 이름이다. 몽고병이 닥쳐오자 고려의 임금이 이 바다를 건너는데, 제자리에서 빙빙 돌고 막혀 마치 나아갈 길이 없는 것만 같았다. 사공이 자신을 속였다고 여겨 목을 베라고 명하였다. 바다 위 언덕에 그 시신을 묻어 주었다. 지금의 이른바 손석총이 바로 그것이다. 매년 10월 20일에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거센 파도가 치는데, 일 년마다 똑같이 도래한다. 대개 손석이 처형당한 날이라고 이르고 있다. 그 아래로 배가 지날 때 반드시 술을 붓고 간다고 한다.
《강도부지》와 비슷한데요, 뱃사람들이 손돌 묘를 지날 때 술을 붓는다는 내용이 추가됐습니다. 19세기에 편찬된, 세시풍속을 정리한 책, 《열양세시기》와 《동국세시기》도 손돌을 언급했습니다. 《열양세시기》의 해당 내용을 옮깁니다.
10월 20일
강화 부근 바다 가운데에 암초가 있는데, 이곳을 손돌목[손석항, 孫石項]이라고 한다. 방언에 산수가 험하고 좁은 곳이 ‘목’[項]이 된다고 말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고려 때 손돌이라는 뱃사공이 10월 20일에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어서 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날이 되면 바람이 불고 매섭게 추워 뱃사람들은 조심하고 삼가며 집에 있는 사람도 털옷을 준비하고 근신한다.
이번에는 《동국세시기》입니다.
기타 10월 행사
이달 20일에는 해마다 큰바람이 불고 추운데 그것을 손돌바람이라고 한다. 고려의 왕이 바닷길로 강화도에 갈 때 뱃사공 손돌이 배를 저어 가다가 어떤 험한 구석으로 몰고 가자 왕이 그의 행위를 의심하여 노해서 명령을 내려 그의 목을 베어 죽였고, 잠시 후에 위험에서 벗어난 일이 있었다. 지금도 그곳을 손돌목[孫石項]이라고 한다. 손돌이 죽임을 당한 날이 바로 이날이므로 그의 원한에 찬 기운이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열양세시기》는 손돌이 억울하게 죽었다고만 썼습니다. 《동국세시기》는 왕이 바닷길로 강화에 올 때 손돌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강화 선비 고재형이 1906년에 쓴 《심도기행》은 손석항(孫石項)이라는 제목으로 한시를 짓고 설명글을 달았습니다. 설명글의 내용은 《강화부지》와 흡사합니다. 고재형의 시를 옮깁니다.
孫石荒墳倚斷阿 손돌의 황량한 무덤이 절벽 위에 있는데,
舟人指点酹而過 뱃사람 그곳 가리키며 술 따르고 지나가네.
年年十月寒風至 해마다 시월 되면 찬바람이 불어오니,
知是冤魂激激波 원혼이 격렬하게 물결쳐서 그러는 것이려니.
이상에서 소개한 책들 모두 손돌이 고려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책 어디에도 손돌이 바가지를 띄워 임금 살린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강화문화원, 《江華文化》 제18호(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