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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사공 손돌과 손돌목 이야기(中)

이야기 분석

이제, 지금 알려진 손돌 이야기와 《강도부지》의 차이점을 보겠습니다.

 

① 바가지

손돌이 죽기 직전 바가지를 띄우고 가라고 한 이야기는 가장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다양한 생각거리를 제공합니다. 교훈적이기도 합니다. 손돌은 임금이 야속하고 미웠을 것입니다. 그냥 잠자코 죽었으면, 임금도 죽었을지 모르는데, 왜 살렸을까요?

충성심일 것 같습니다. 저는 손돌의 충성심을 임금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나라에 대한 충성, 즉 애국심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당시는 임금이 곧 국가인 시절입니다. 임금이 죽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기를 백성 손돌은 원하지 않습니다. 결국, 임금을 살려야 했습니다. 자신은 죽임을 당하더라도.

진정한 프로페셔널, 사공으로서의 자부심, 이런 시각으로 해설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내 배에 탄 승객이다. 나는 저들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실 의무가 있다. 내 목숨이 여기서 끝날지라도.’ 이렇게 맘먹고 바가지를 띄우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무튼, 그러한데 사료로 전하는 손돌 이야기 속에는 바가지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언제 어떤 경로로 바가지 이야기가 추가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찾은 기록만으로 본다면, 일제강점기의 기사가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선일보〉(1935.10.26.)에 이은상이 쓴 ‘강도유기(江都遊記)’라는 글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은상은 강화도 주민들에게 오래 전하는 민담이 있다고 하면서 손돌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내용과 흡사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임금이 손돌을 물에 던져 죽였다고 쓴 것입니다. 칼로 목을 벤 것이 아니고요.

손돌이 물에 던져지기 직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이은상은 기록했습니다. 현대 맞춤법에 맞게 수정해서 옮깁니다. “나는 원통하게 죽거니와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 바가지 흘러가는 곳만 따라가면 王은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바가지 이야기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바가지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런 이야기도 전해졌습니다.

독립운동가 이승희(1847~1916)의 문집인 《대계집》에 〈강화일기〉라는 글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승희는 세상에 전해오는 이야기라며 손돌목 전설을 소개했습니다. 내용이 대략 이러합니다.

고려 고종이 몽골군을 피해 강화로 들어왔는데, 사공 손돌을 오해하고 배에서 목을 벴다. 목이 떨어지기 직전, 손돌이 자기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을 띄우고 흐르는 대로 따라가소서.” 고종이 손돌의 잘린 머리를 물에 띄우고 흐르는 대로 배를 몰아 강화에 무사히 닿았다. 그제야 잘못을 깨닫고 손돌의 시신을 거두어 나루에 장사지내주었다.

 

아이고, 이건 뭔 소리인가요. 바가지가 아니라 손돌의 잘린 머리입니다. 머리가 둥둥 떠서 앞서가며 임금 탄 배를 인도한 것입니다. 바가지보다 더 극적인 장면입니다만, 이 이야기는 널리 퍼지지 않았습니다.

 

② 손돌 묘

손돌의 묘가 원래 강화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후 언젠가 김포로 옮겨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 덕포진 포대 안쪽에 손돌 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바닷가 절벽 쪽에 바짝 붙어있었는데, 현대에 들어 안쪽에다 다시 조성한 것입니다.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강화도지도 8폭 병풍>(서울대박물관 소장)에 지금 자리가 아니라, 바다에서 보이는, 절벽 끄트머리에 ‘孫乭塚(손돌총)’이라고 표기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손돌 묘비에 ‘舟師孫乭公之墓(주사손돌공지묘)’라고 새겼습니다. 손돌에 대한 존칭으로 주사(舟師)를 쓴 것 같습니다만, 적절한 표현은 아닙니다. 주사는 수군(水軍)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민간인 뱃사공 손돌을 군인으로 표현한 셈입니다.

《강도부지》와 《강화부지》는 고사(篙師, 숙련된 뱃사공)라고 했습니다. 《열양세시기》에는 손돌이 초공(梢工, 뱃사공)이라고 나옵니다. 《동국세시기》는 선인(船人)으로 표기했고요. 선인 역시 뱃사공이라는 의미입니다.

개항 후, 어느 서양인이 손돌의 묘소를 돌아보고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인천일보〉(2014.12.11.)에 실린 이영태의 글에서 옮겨옵니다.

 

죽은 영웅의 무덤이 강을 오르고 내리는 여행객들이 볼 수 있는 절벽 저 끝쪽에 선명하고 분명하게 서 있었다. … 작은 둔덕 위에 손돌의 사당이 있었는데, … 보잘것없는 구조물이었다. 말하자면, 다소 서툰 인물화가 손돌의 초상으로 의도된 벽면 위에 칠해져 있었는데, 그 밑에는 소원을 비는 봉헌물을 담아두기 위한 긴 선반이 있었다.

 

손돌이, 신앙의 대상이 되어 손돌목 오가는 이들의 안전을 보살피고 있던 겁니다. 뱃사람들이 위험한 손돌목을 무사히 통과하게 해달라고 손돌에게 빌었던 모양입니다. 《강화부지》도 뱃사람들이 손돌묘를 지날 때 술을 부어 올렸다고 했습니다.

병인양요(1866) 때 양헌수 장군도 손돌 묘에 예를 올리고 염하를 건너 정족산성에 들었습니다. 거기서 프랑스군을 격퇴했습니다.

손돌을 모신 작은 사당에는 초상화도 있었네요. 이 사당이 일제강점기까지도 존재했다고 합니다. 지금 손돌 사당은 없지만, 그를 위안하는 행사가 해마다 열립니다. 김포시가 주최하고 김포문화원이 주관하는 손돌공 진혼제가 손돌 묘에서 펼쳐집니다. 날짜는 물론 음력 10월 20일이죠. 뜻깊은 행사라고 생각합니다. 이쯤 되면 손돌이 실존했던 인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③ 임금의 이동 경로

김포 덕포진쯤에서 염하 건너 강화로 들어온 것이 일종의 ‘정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도부지》는 갑곶나루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지금의 광성보쯤에서 손돌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전설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허술한 부분이 많은 법입니다.

굳이 논리성을 따진다면 갑곶에서 광성 쪽으로 배가 내려왔다는 《강도부지》 기록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조선시대에, 지금의 손돌목 말고, 손돌목 바로 위(북쪽)에 김포와 강화를 잇는 안전한 뱃길 수로가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건너면 될 일이지, 굳이 험난한 손돌목으로 건널 이유가 없습니다.

한편, 《강화부지》는 “몽고병이 닥쳐오자 고려의 임금이 이 바다를 건너는데”라고 했습니다. 몽골 침략 때 고려 조정이 개성에서 강화도로 천도하는 상황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때 고려 고종이 예성강을 거쳐 강화도 북쪽 해안 승천포로 왔습니다. 지금 손돌목과 전혀 관련 없는 지역입니다.

아무튼, 기록으로 남게 된 손돌 이야기 속의 이동 경로는 세 곳으로 정리됩니다. 손돌목 횡단, 염하, 승천포. 그런데요, 다음 기사를 보시죠.

 

조선시대 때 이괄의 난을 피해 한강을 건너던 인조와 관련한 얘기도 그중 하나다. ‘손돌(孫乭)’이라는 사공이 있었다. 그가 피란을 가는 왕을 모시고 뱃길을 가는데, 왕의 눈에는 손돌이 일부러 물살이 거센 곳으로 가는 것처럼 보였다. 인조가 물살이 잔잔한 곳으로 뱃길을 잡으라 했지만, 손돌은 계속 물살이 거친 곳으로 노를 저었다. 이에 인조는 자신을 해하려는 것으로 의심했다. 손돌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인조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죽음을 직감한 손돌은 바가지를 하나 건네며 “뱃길을 못 잡겠으면 물에 바가지를 띄우고 그것을 쫓아가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맞았다.

 

〈경향신문〉(2023.11.29. 엄민용)에 실린 글입니다. 손돌이 조선시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를 죽인 임금은 인조이고요, 사건이 벌어진 장소는 한강입니다. 무엇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대개 전설이라는 것은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로 변주되기 마련입니다. 환웅이 곰과 관계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사실은 곰이 아니라 호랑이가 환웅과 관계해서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④ 손돌을 죽인 임금

손돌이 실존 인물이라면, 그를 죽인 이도 실존 인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왕이라고 하니 그가 누구인지 그 가능성을 확인해봅시다.

사료에 실명이 거론된 임금은 고려 공민왕입니다. 《강도부지》에 그렇게 나옵니다. 몽골군에 쫓겨 피난 가다가 손돌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공민왕이 외적의 침략으로 피난 갔던 것은 사실입니다. 몽골군이 아니라 홍건적의 침략 때 개경에서 경상북도 안동까지 갔습니다. 원나라 말기에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군이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다고 해서 홍건적이라고 불렀어요.

그냥 자기네 땅에서 지지고 볶고 다하면 좋았을걸, 원나라 정부군에 밀린 반란군 즉 홍건적이 고려로 쳐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해야 했습니다.

홍건적이 강화에도 왔던 것 같습니다. 《고려사절요》(1361.12)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강화부(江華府)에서 거짓으로 적에게 항복하고 적의 비장 왕동첨에게 음식을 주다가 복병을 모두 죽이니, 적이 감히 경계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런데 공민왕은 개성에서 파주, 양주, 이천을 거쳐 경상도로 향합니다. 뱃길을 이용한 것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손돌을 죽인 주인공이 공민왕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손돌목

 

손돌 이야기를 전하는 사료 대개가 손돌은 고려 사람이고, 그를 죽인 임금은 몽골군을 피해서 강화도로 온 임금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임금은 고종뿐입니다. 이승희의 《대계집》에도 고려 고종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지금도 손돌을 죽인 임금이 고려 고종이라고 말해집니다. 하지만, 고종도 아닐 겁니다.

고종이 개경을 떠나 강화로 향한 것은 1232년(고종 19) 음력 7월 6일입니다. 다음날 7월 7일에 강화 승천포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장맛비가 열흘이나 계속 내려 다리가 진흙에 빠지는 바람에 사람과 말이 마구 쓰러졌다.”라고 《고려사》에 나옵니다. 손돌이 10월 20일에 죽임을 당했다고 했으니, 시기적으로도 손돌을 죽인 이가 고종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김포에서 해마다 10월 20일에 손돌 진혼제를 연다고 했습니다. 2023년에도 음력 10월 20일(양력 12월 2일)에 “제791주기 손돌공 진혼제”를 올렸습니다. 저는 ‘제791주기’라는 표현이 맘에 걸립니다. 791년 전은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1232년(고종 19)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김포의 손돌 진혼제는 손돌이 죽은 해가 1232년이고, 그를 죽인 임금은 고려 고종이라고 단정하여 개최하는 행사인 것입니다. 고종일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 말이죠. 그냥 “2025년 손돌공 진혼제” 이런 식으로 명칭을 바꿨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위 〈경향신문〉에 손돌을 죽인 임금이 인조라고 나왔죠. 이괄의 난(1624)을 피해 인조가 갔던 곳은 강화가 아니라 충남 공주입니다. 그런데요, 강화에서도 한때 인조를 자주 말했었습니다. 광성보 용두돈대 앞 안내판에 인조가 손돌을 죽였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정묘호란(1627) 때 인조가 강화도로 피란했으니, 개연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인조도 아닙니다.

인조는 남쪽 손돌목이 아니라, 북쪽 갑곶을 건너 강화부로 들어왔습니다. 1627년(인조 5) 1월 26일, 궁궐을 나선 인조. 한강 건너 양천, 김포, 통진을 거쳐 1월 29일에 지금의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에서 배를 타고 강화 갑곶나루에 내려 진해루로 들어왔습니다. 인조는 손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손돌 묘

 

대개의 사료가 손돌이 고려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고려 임금 가운데 가능성 있는 인물이 고종 말고 누가 있을까? 저는 희종을 떠올립니다. 구종서가 지은 자그마한 소설, 《손돌선장과 임금님》에 희종이 등장합니다.

희종(1204~1211)은 고려 무신집권기의 왕입니다. 실권자 최충헌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고 폐위되어 강화로 유배된 인물입니다. 이후 자연도(영종도) 등으로 옮겨지다가 죽어 강화에 묻혔습니다. 그이의 무덤이 진강산에 있는 석릉입니다.

구종서 작가는 희종이 강화에서 자연도로 옮겨질 때 손돌의 배를 탄 것으로 구도를 잡았습니다. 강화 갑곶에서 손돌이 모는 배를 타고 자연도로 향할 때 손돌목에 이르러 손돌의 목을 벤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했습니다. 《강도부지》에서 말한 경로와 일치합니다. 손돌을 전하는 사료마다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는 구석이 있는데 《손돌선장과 임금님》은 이야기 구성이 비교적 자연스럽습니다.

지금까지 손돌을 죽이라 명했던 임금으로 고려 희종, 고종, 공민왕 그리고 조선 인조를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짐작하셨겠지만, 주인공이 누구라고 특정할 수 없습니다. 사실(史實)인지, 경계가 모호한 이야기 속에서 역사 인물을 확정하는 행위는 바람직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손돌 이야기를 할 때는 “어느 임금이” 정도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강화문화원, 《江華文化》 제18호(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