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 대한 믿음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강도(江都)를 내가 다 봤는데 지세와 형편은 강도가 가장 뛰어났다. 옛날에 김경징으로 인해 제대로 지키지는 못했지만, 이는 실로 김경징의 죄이지 어찌 지리 때문이겠는가.”
영조 임금이 한 말인데요, 《승정원일기》에 나옵니다. 병자호란 때 강화가 청군에게 함락된 것은 김경징 등 지키는 이들의 잘못 때문이지 강화의 지형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강화가 외적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는 믿음을 여전히 갖고 있던 영조입니다.
앞의 임금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봉림대군 시절 강화에서 직접 병자호란을 겪었던 효종도 영조와 같은 생각이었지요. 효종은 강화도를 더욱 안전하게 지키려고 해안에 군사시설을 설치합니다. 월곶진, 초지진 등이에요. 강화에 진·보가 설치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효종 때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영조가 정말 강화에 직접 와서 지세와 형편을 따져 보았을까요? 예, 왔었습니다. 즉위 전 연잉군 시절에 강화 정족산사고에 왔습니다. 종부시 도제조 자격으로 봉안사가 되어 정족산사고 선원각에 어첩(왕실 계보의 대강을 뽑아서 적은 책)과 선원록을 봉안하러 왔던 것입니다. 연잉군은 취향당에서 선원각에 있던 기존의 선원록을 포쇄(曝曬)하기도 했습니다.
강화외성 구간은?
숙종이 즉위했습니다. 강화도 해안 빙 둘러서 진이나 보가 있습니다. 그런데 진과 보 사이가 상당히 넓습니다. 그 사이로 적선이 상륙을 시도하면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숙종이 진·보 사이 사이에 돈대를 설치합니다. 강화의 돈대 대개가 1679년(숙종 5)에 세워진 것입니다.
숙종은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강화 동쪽 해안의 돈대와 돈대 사이를 잇는 성곽까지 쌓게 합니다. 이게 바로 강화외성입니다. 외성이 있으면 내성도 있겠지요? 예, 강화읍내 남산과 북산을 빙 두른 강화산성이 내성입니다.
강화외성은 삼군문, 그러니까 금위영·어영청·훈련도감 소속 군사들이 와서 쌓았습니다. 1691년(숙종 17) 8월에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1692년(숙종 18) 5월에 외성이 완공됐습니다. 대략 10개월 걸렸네요.
그러면 강화외성은 어느 돈대에서 어느 돈대까지 구간일까요? 최종적으로 숙룡돈대에서 초지돈대까지입니다. 외성 구간에 포함되는 돈대를, 이후에 설치하게 되는 용두돈대는 빼고, 북쪽에서 남쪽 순서대로 적어봅니다.
숙룡돈대, 낙성돈대, 적북돈대, 휴암돈대, 월곶돈대, 옥창돈대, 망해돈대, 제승돈대, 염주돈대, 갑곶돈대, 가리산돈대, 좌강돈대, 용당돈대, 화도돈대, 오두돈대, 광성돈대, 손석항돈대, 덕진돈대, 초지돈대 |
그런데 말이죠, 강화외성 구간을 기록한 자료들을 검토해보면 조금씩 다르게 적은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속수증보강도지》(1932)는 적북돈대부터 초지까지를 외성 구간으로 기록했습니다. 숙룡돈대와 낙성돈대 구간을 제외한 것이지요. 지금, 국가유산청 홈페이지도 사적 강화외성을 ‘적북돈대로부터 초지진까지 23km’로 설명하고 있습니다.(2024년 5월 17일부로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다음 표는 이형상의 《강도지》(1696) 기록을 기준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강화외성 축성 상황>
주관 | 축성 구간 | 축성 시기 | 투입 인력 |
강화유수부 | 숙룡돈대 ~ 휴암돈대 | 1693년(숙종 19) | |
금위영 | 휴암돈대 ~ 염주돈대 | 1691년(숙종 17)~1692년(숙종 18) | 약 4,000명 |
강화유수부 | 염주돈대 ~ 갑곶수문 | 1687년(숙종 13) | |
어영청 | 갑곶수문 ~ 오두돈대 | 1691년(숙종 17)~1692년(숙종 18) | 약 3,900명 |
훈련도감 | 오두돈대 ~ 초지돈대 | 1691년(숙종 17)~1692년(숙종 18) | 약 3,600명 |
금위영, 어영청, 훈련도감 군사들이 각각 구간을 나눠 외성 쌓은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강화유수부(진무영)가 자체적으로 쌓은 곳도 있습니다. 표를 다시 보아주세요.
염주돈대에서 갑곶수문까지는 삼군문에서 외성을 쌓기 몇 년 전에 강화사람들이 쌓은 것입니다. 그리고 휴암돈대부터 숙룡돈대까지는 삼군문이 외성을 완공한 다음 해에 강화유수부가 연장해서 축성한 것입니다. 역시 강화 주민들이 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강화외성 구간은 ‘적북돈대~초지진’이 아니라, ‘숙룡돈대~초지돈대’로 규정하는 것이 적절한 것입니다.
전성의 등장
1692년(숙종 18)에 완공된 강화외성,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입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강화외성 상당 구간이 바다와 닿아 있습니다. 바닷물의 끊임없는 ‘공격’을 버텨내기 어렵습니다. 큰비라도 오면 더 심각해집니다. 엄청 발달한 장비와 기술로 쌓은 현대의 제방도 가끔 무너집니다.
이제 무너지면 다시 쌓고 무너지면 또 쌓는 지난한 개축 작업이 시작됩니다. 한쪽에서는 외성을 연장하고 있고, 한쪽에서는 허물어진 외성을 다시 쌓고 있는 겁니다. 강화 주민들이 이 일을 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노동의 길입니다.
외성 개축 과정에서 커다란 변화가 김시혁 유수 때 일어납니다. 영조가 재위하던 시기입니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벽돌성에 관심을 두게 된 김시혁입니다. 강화유수가 되자 외성을 벽돌로 다시 쌓습니다. 이를, 벽돌 전(塼) 자를 써서 전성(塼城)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강화전성이 곧 강화외성인 것입니다.
1741년(영조 17) 6월 2일, 영조가 김시혁을 강화유수로 임명합니다. 1742년(영조 18) 6월 19일, 유수 김시혁이 아룁니다. “강화의 토성이 비를 맞으면 허물어지니, 청컨대 북경에서 벽돌을 구워 성을 쌓듯이 강화 토성도 벽돌로 개축하게 하소서.” 영조가 허락했습니다. 1744년(영조 20)에 김시혁 유수 주도로 추진된 전성 공사가 마무리됩니다.
아, 그런데, 전성마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장맛비를 버티지 못했습니다. 믿었던 전성이 붕괴하자 사람들은 ‘뭐니뭐니해도 석성(石城)이 제일이지.’ 생각하게 됩니다. 붕괴 초기에는 벽돌로 다시 쌓다가 1746년(영조 22)부터 돌로 바꿔 쌓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박제가는 《북학의》(1778)에서 벽돌의 우수성을 여전히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은, 벽돌은 돌보다 단단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대답할 수 있다. 돌 하나가 벽돌 하나보다 단단할지는 모르지만, 여러 개를 쌓았을 때는 벽돌이 돌보다 단단하다.”
박제가는 또 전성의 붕괴 원인을 이렇게 짚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강화에 있는 벽돌성은 자주 무너져서 쓸모가 없다고 한다. 그 때문에 벽돌성을 쌓자고 처음 제안한 사람에게 그 잘못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쌓은 방법이 잘못된 것이지 벽돌의 잘못이 아니다.” 쌓은 방법이 잘못된 것이지 벽돌의 잘못이 아니다? 정답이 무엇인지는 바다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애초 외성을 쌓은 것은 삼군문이지만, 이보다 몇 곱절 힘겨운 개축은 오롯이 강화 주민들의 몫입니다. 1779년(정조 3), 강화유수 홍낙순이 상소했습니다. 강화전성 관련 부분을 《정조실록》에서 옮깁니다.
“천하의 일은 시작이 있으면 끝맺음이 있는 것이고, 괴로울 때가 있으면 편안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지금 외성을 개축하는 일은 빙빙 도는 고리와 같아서 주민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심도 백성들의 속담에 ‘아! 이놈의 성을 쌓는 것이 장강과 같아서 끝이 없구나! 저 장강물이 끊어져야만 이 역사가 끝나리.’ 하는 말이 있으니, 그들의 원망하고 애통해하는 정상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끝없는 축성역에 강화 백성들은 완전 탈진입니다. 장강(長江, 강화해협)은 끊어지지 않았고, 역사(役事)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신미양요 이후인 1873년(고종 10) 봄에도 용진진에서 제물진까지 새로 여장 갖춘 석성을 쌓았습니다.
강화외성, 시작은 토성이었는데, 그걸 벽돌로 고쳐 쌓다가 이후에는 석성이 됐던 것입니다. 일부 구간은 토성으로 개축하기도 했습니다. 옛사람들의 땀과 눈물 그득 스민 외성, 아쉽게도 남아 있는 부분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전성 일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갑곶돈대와 광성보를 잇는 해안도로에 있습니다. 불은면 오두리 오두돈대 바로 남쪽입니다. 길이 200m 정도로 말해지지만, 근래에 매끈하게 복원한 것이 대부분이고 옛 전성 그대로 남은 구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밑바닥엔 큼지막한 돌은 앉히고 그 위에 겹겹이 벽돌을 쌓았는데요, 남은 곳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월이, 물결이, 그리고 거대한 나무뿌리가, 벽돌성을 부수고 뒤틀어놓았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일부나마 남아있음에 감사합니다.
생각해봅니다. 벽돌과 돌 중에서 백성들이 덜 힘들고 덜 부담되는 축성 재료는 무얼까?
무거운 돌보다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벽돌이 운반하고 작업하기에 더 편하겠지요. 그런데 벽돌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돌은 그냥 있는 걸 캐다가 쓰면 되지만, 벽돌은 적절한 흙을 구해서 구워야 합니다. 어마어마한 땔감이 듭니다. 나무가 많이 필요합니다. 강화는 질 좋은 돌이 풍부하지만, 산은 대개 민둥산, 나무가 부족했습니다. 종합적으로 볼 때 돌보다 벽돌이 백성들을 더 힘들게 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강화투데이〉 2024년 5월 30일 제6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