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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성종의 세자 교육을 살펴보며

성종의 선택은?

“세자가 어린데도 날마다 서연에 나와 빡빡한 공부 일정 따라가느라 지친 것 같습니다. 적절히 여가를 주어서 몸과 마음을 휴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선시대, 임금의 공식적인 공부를 경연(經筵)이라고 하고, 세자의 공부를 서연(書筵)이라고 합니다. 지금 세자 나이 겨우 8살입니다. 서연 일정이 너무 빡빡합니다. 김수광이라는 신하가 성종에게 세자를 적절히 쉬게 해주자고 청했습니다.

성종이 다른 신하들의 생각은 어떤지 물었습니다. 김종직이 대답합니다. “공부를 잠시라도 그치게 되면 태만함에 익숙해지는 법입니다. 신은 김수광의 생각이 그르다고 생각합니다.”

노는 맛을 들이게 되면 공부를 안 하게 되니 쉼 없이 시켜서 공부 습관을 잡아줘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자 김수광은 김종직의 말을 “국가의 중보(重寶, 세자)를 소중히 여기는 바가 아닙니다.”라며 반박합니다.

성종왕릉 선릉(서울 강남구)

 

저는 김수광의 말에 공감합니다. 겨우 초등학교 1학년 나이의 아이를, 수험생 다루듯 마구 몰아친 모양입니다. 숨 쉴 틈을 줘야죠. 아무리 영양가 높고 맛난 음식이라도 무한정 먹일 수는 없습니다. 소화를 시키지 못합니다. 배고플 시간을 줘야 음식의 맛을 알고 즐길 수 있습니다. 이제 성종이 어떤 결론을 내는지 들어봅시다.

“김종직의 말이 옳다!”

공부 습관을 잡아줘야 한다는 김종직의 의견대로 세자는 강요된 공부로 끌려 들어갑니다. 소학을 시작으로, 논어, 맹자, 시경, 상서, 춘추…. 성종은 책 한 권 뗄 때마다 세자 선생님들, 그러니까 서연관들에게 상을 내리고, 또 서연관의 수를 늘리면서 세자의 학업을 독려했습니다.

성종은 수시로 ‘진도’를 확인했고 교재 선정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가르치라고 서연관들에게 이르기도 했습니다. 서연관 처지에서 볼 때 성종은 꽤 까다롭고 피곤한 ‘학부모’였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르치는 이의 권위에 대한 존중이 필요합니다.

제 짐작에는 서연관들이 세자의 소화력을 고려하지 않고, 성종에게 보이기 위한 ‘진도 빼기’에 급급했을 것 같습니다. 책을 몇 권 읽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열 권 읽었다, 스무 권 읽었다!” 자기만족일 뿐이에요. 한 권을 읽어도 제대로 소화하는 게 중요한 법입니다.

 

“도대체, 이런 걸 왜 못 푸는 거니?”

세자의 학문 성취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읽어낸 책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많이 공부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외우기에 급급했을 뿐 학문을 체화하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물심양면, 자식 교육에 정성을 다한 성종! 그럼에도 세자의 학문 진척이 더딥니다. 그래서 세자로서 해야만 할 일상의 일들을 줄여주고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하게 합니다.

세자는 죽을 맛입니다. 공부가 싫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실망할까 봐 억지로 억지로 따라갑니다. 공부를 좋아하고, 공부를 즐거워했던 아버지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래저래 세자는 스트레스를 쌓아갑니다. 그렇게 나이만 먹어갑니다.

“세자가 지금 17살인데 아직도 문리(文理)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내 심히 이를 근심하고 있다.”

성종이 걱정합니다. 신하들도 세자의 학문 수준을 알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용기를 낸 신하가 있었습니다. 서연에서 《대학집주》를 가르칠 때입니다. 세자를 가르치는 성현이라는 신하가 성종에게 이런 내용으로 말합니다. 이 책은 어려운 책이라 세자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포기합시다! 성종의 대답은, “가(可)하다.” 그렇게 하라는 소리입니다.

그래도 포기는 없습니다. 성종은 세자 공부를 계속 자기 뜻대로 밀고 나갑니다. 그랬는데, 1494년(성종 25), 세자 나이 19세 때 사헌부 장령 유빈이 아룁니다.

“신이 서연에서 엎드려 세자께서 글 읽으시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읽는 소리가 머뭇머뭇 자꾸 더듬는 것으로 보아 다 통달하지 못하신 것 같았습니다. 또 들으실 때도 질문하여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길, 세자의 나이쯤 되면 평범한 사람도 글을 통하고 이치를 알게 되는데, 세자는 그러하지 못하니, 이는 학문하려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과감하게 지적했습니다. 성종이 대답합니다. “장령의 말이 진실로 옳다.” 슬픈 목소리였을 것 같습니다.

십여 년, 자식 교육에 온 힘을 쏟았는데…. 도대체 문제가 무얼까? 성종은 자문했을 것입니다. 성종은 세종, 정조와 함께 학문 높았던 군주로 평가됩니다. 공부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재밌어했습니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열심히 했고 성취를 이뤘습니다. 공부하기 싫다는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가정해 봅니다. 대학 레벨을 상·중·하, 셋으로 나눈다고 치죠. 세자는 겨우 하급 대학 수준입니다. 아버지 성종은 자기가 상급 대학 나왔으니 아들도 그래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무작정 열심히 가르칩니다. 학원도 보내고 고액과외도 시키고 좋다는 건 다합니다. 그게 아비 된 자의 도리라고 여깁니다. 덕분에 아들이 중급 대학에 갈 실력이 되었습니다. 유의미한 성취이지만, 아버지는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아들은 기껏 성취를 이루고도 칭찬받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칭찬을 기대했다가 핀잔만 들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상급 대학 나온 게 전혀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때로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던 부모가 자녀 교육도 잘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식의 관심 분야와 역량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 “도대체, 이런 걸 왜 못 푸는 거니?” 화만 내기 십상입니다. 성종의 세자 교육도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태종왕릉 헌릉(서울 서초구)

 

태종 이방원도 성종 못지않게 세자 교육에 열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자가 공부를 싫어했습니다. 태종은 서연관들을 직접 압박하는 방법으로 세자를 밀어붙였습니다. 세자는 서연에 결석하며 반항합니다. 태종은 내시들도 닦달했습니다. 세자가 서연에 가지 않자, 내시 김문후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간청합니다. “세자 저하, 제발 서연에 가십시오. 아니 가시면 저희가 벌을 받습니다.” 그날 세자는 서연에 참석했습니다.

어느 날 태종이 세자 대신 세자의 내시 노분을 곤장 치게 했습니다. 세자가 반성하고 자극받고 공부에 열중하기를 바라는 조치였지만, 세자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만 키웠습니다. 참 치사한 교육 방법입니다. 매 맞은 내시도 보통이 아니더군요. 세자에게 직접 따졌습니다. “저하께서 공부 안 하는 것이 어찌 소인의 죄입니까?”

결국, 태종의 세자 교육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태종의 세자는 양녕대군, 성종의 세자는 연산군입니다. 양녕대군은 폐세자가 되었습니다. 동생 충녕대군이 새로운 세자가 되었다가 즉위하니, 세종입니다. 연산군은 무사히 즉위했으나 폐위되고 맙니다. 연산군의 동생이 즉위하니, 중종입니다.

 

공부만 잘하면 된다?

예나 지금이나 자녀 교육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내 뜻대로 자라주지 않는 게 자식입니다. 그런데 자식은 ‘내 뜻대로’ 키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엄연히 나와 다른 인격체입니다. 지금 독자 중에 어린 자녀를 키우는 분이 계시다면, 한 번쯤 당신의 교육을 돌아보시는 게 어떨까요.

대개 우리는 자녀 교육의 목표를 대학입시에 둡니다.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합격시키는 게 인생 최대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오로지 학업 성적에만 신경을 씁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인성 교육입니다. 사람 교육입니다.

잘하면 칭찬받고 잘못하면 꾸지람 듣고, 그러면서 부끄러워할 줄도 알고, 자기의 이익만 탐하는 것이 아니라 남도 생각할 줄 알게, 그렇게 키우는 것이 사람 교육입니다.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직장을 갖게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거기까지입니다. 직장에서의 행복과 성공은 대학순, 성적순이 아닙니다. 사람 됨됨이가 중요합니다. 인간미를 갖춰야 인정받게 되고, 성장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 교육이 중요합니다.

“공부만 열심히 해, 나머지는 엄마가 다 해줄게.”

이렇게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 다 사 주면서 말이죠. 그러면 아이가 나약해집니다. 자립심을 갖추기 어렵습니다.

직장일이 조금만 어려워도 쉽게 그만두고, 조금만 기분 상해도 더럽다며 때려치우고, 사업해보겠다며 부모에게 손 벌리면서, 씀씀이는 헤프기만 한 철없는 어른으로 클 수도 있습니다. 아예, 취직할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부모에게 의지해 살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부모에게 있는 겁니다.

회묘(연산군 생모 폐비윤씨의 묘, 경기 고양)

 

예전에 읽었던 칼럼(동아일보, 오명철, 2008.1.10.)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집을 넓혀 달라는 40대 아들과 며느리의 성화로 아파트 평수를 줄인 부모가 있고, 자녀들 결혼시킬 때마다 더 먼 변두리로 이사 간 부부도 있다. 자식의 빚 때문에 늘그막에 단칸 전세방을 전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연금마저 차압당한 이도 있다. 뼈 빠지게 교육시키고 직장까지 얻게 해 결혼까지 시켜 주었지만 철딱서니 없는 자식들은 끝까지 부모의 애프터서비스를 요구한다. 자녀들이 태어나 부모에게 준 기쁨은 잠시뿐, 그 대가는 길고 혹독하다.

 

‘애프터서비스’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부모와 자식 관계를 묘사한 감이 없지 않은 글입니다.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이구, 너무 심각해졌네요. 분위기 바꾸겠습니다. ‘똑똑한’ 아들에게 낭패를 본 어느 딱한 아버지의 사연을 소개하면서 오늘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문화적 혼혈인간》이라는 책에서 본 글입니다.

19세기 영국에 브로엄이라는 정치가가 있었대요. 대법관까지 지낸 명망가였습니다. 장남을 프랑스 파리로 유학 보냈는데, 아, 이 친구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여배우와 연애질만 하는 겁니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브로엄이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죠. “그 여자와 당장 헤어져라. 안 그러면 앞으로 생활비를 보내주지 않겠다.”

이제 아들은 연애를 끝내야 합니다. 아버지가 돈을 보내주지 않으면 유학을 중단하고 영국으로 돌아와야 하니까요.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아들의 답장을 받고 아버지 브로엄은 지금껏 송금하던 액수의 두 배를 보내줬습니다. 아들의 반성 편지가 그를 감동하게 했던 걸까요? 아들의 답장은 이러했습니다. “송금액을 즉시 두 배로 인상해주세요. 안 보내주시면 그녀와 바로 결혼하겠습니다.”

 

〈강화투데이〉 2024년 5월 15일 제6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