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철종의 이름은?
원범! 이원범이다. 원범을 아시는 분은 연령이 육십 세 내외일 것이다. 그 세대가 어릴 때 인기 있던 TV 드라마가 ‘임금님의 첫사랑’이다.
주인공은 원범이, 그의 첫사랑은 양순이였다. 강화에 귀양 온 원범이가 어느 날 갑자기 철종으로 즉위한다. 강화도에 남은 양순이를 그리워하며 애태운다. 참 재밌었다. 주제가도 유명했는데 가사가 이쁘다.
강화섬 꽃바람이 물결에 실려 오면 / 머리 위에 구름 이고 맨발로 달려 나와 / 두 마리 사슴처럼 뛰고 안고 놀았는데 / 갑고지 나루터에 돛단배 떠나던 날 / 노을에 타버리는데 임금님의 첫사랑 …
“두 마리 사슴처럼 뛰고 안고 놀았는데”
사극은 재미있을수록 부작용도 크다. 역사를 소재로 ‘만들어진’ 극이다. 거기 나오는 내용이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우리는 그걸 이해는 한다. 그런데 알게 모르게 사실로 받아들이고 기억한다. 잘못된 역사 상식을 쌓아가는 셈이다.
한국인 대부분이 사극을 통해 한국사를 배운다는 말이 있다. 학교에서는? 대개의 학생은 한국사 수업을 좋아하지 않는다. 교사의 능력보다는 교육 시스템 문제가 크다. 특히 고등학교는 대학 입시에 맞춰 수업을 진행하기에 학생들이 더 지겨워할 수 있다.
수업 시간, 교사가 말한다. “이 부분은 시험에 잘 나와, 외워 두자”, “이런 문제 풀 때는 이걸 주의해야 해.” “이 그림 잘 봐둬라, 이거 나오면 답은 대개 이런 내용이야.” 그저 모의고사 문제, 수능 문제 푸는 방법 제시에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은 조용히 수용만 한다. 이 아이들에게 한국사는 억지로 외워서 정답 찾는 게 목표일 뿐이다. 시험 끝나면 깨끗하게 잊는다. 성인이 되어 사극을 보면서 잘못된 한국사를 다시 배우기도 한다.
‘임금님의 첫사랑’은 잘못된 역사를 오래도록 전해지게 했다. 원범의 첫사랑 양순이는 작가의 창작이다. 실존 인물이 아니다. 원범은 일자무식이 아니었다. 즉위 전에 이미 준수한 학문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원범이는 나무꾼도 아니었다. 나라에서 식량 등이 지급됐다. 나무 해 다 팔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었다. 왕으로 모시러 오는 행렬을 자신을 죽이러 오는 거로 오해하고 도망가 숨었다고 하는데, 도망가지 않았다. 의연했다.
용흥궁 앞길은 좁다. 자동차 한 대 겨우겨우 지나갈 정도다. 그래도 조선시대엔 여기가 강화산성 동문으로 이어지는 큰길이었다. 적당히 시골스럽고 적당히 지저분하기도 한 골목길에 식당 몇 옹기종기 앉아 있다. 강화사람들은 여기를 ‘아리랑골목’이라고 부른다.
전설의 밥집 겸 선술집 ‘아리랑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머니 가벼운 이들 대환영. 아버지가 다녔고 내가 다녔다. 친구들 군대 갈 때마다 아리랑집에서 ‘기념식’을 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노래하는 게 유행했을까. 젓가락 장단 따라 흘러가던 떼창 소리 아련하다.
龍興宮(용흥궁), 높다란 대문에 현판이 걸렸다. 전근대시대 용은 임금을 상징했다. 임금이 일어난 궁이라는 뜻이다. 이 자리에서 원범이 귀양살이했다. ㄱ자 안채가 아늑하다. 행랑도 그럴 듯하다. 뒤편 계단으로 오르면 날렵하면서도 진중해 보이는 한옥 한 채가 더 있다.
원범이 이렇게 근사한 집에 살았었나. 그럴 리가. 누추한 초가였다. 원범이 즉위한 뒤 강화유수 정기세가 ‘즉위 기념’으로 새로 지은 것이다. 그때가 1853년(철종 4)이다. 유수 정기세가 철종에게 아부하려고 지은 것 같지만, 사실은 임금 철종이 먼저 요청했다.
어느 날 철종이 신하 정원용에게 말했다. “내가 살던 집이 근래에 많이 허물어졌다고 하오. 보수하면 좋겠소.” 정원용이 대답했다. “유수가 가서 확인해보니, 과연 썩고 허물어진 곳이 많아서 곧 이엉으로 지붕을 이으려 한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철종이 이렇게 말했다. “이엉으로 이으면 매번 이런 걱정을 하게 되니 기와로 고치는 것이 좋겠소.” 허물어져 가는 집에 무거운 기와를 어찌 올리랴. 아예 새로 지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용흥궁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용흥궁 대문 옆에 두 개의 비가 있다. 하나는 정원용, 하나는 정기세를 기리는 비이다. 정원용과 정기세는 부자간이다. 아버지 정원용은 원범을 즉위시키려고 강화로 모시러 왔던 대신이다. 아들 정기세는 용흥궁을 지은 강화유수였다.
용흥궁 깊숙한 자리에 자그마한 비각이 있다. 비각 안에 비 하나, 이렇게 새겨져 있다. ‘哲宗朝潛邸舊基’(철종조잠저구기). 철종의 잠저가 있던 옛터라는 뜻이다. ‘잠저’는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말한다.
자, 이제 철종을 만나보자. 철종(1849~1863)은 조선의 25대 임금이다. 1831년(순조 31)에 태어나 19세에 즉위했다. 그 어수선한 세도정치기였다. 14년간 왕위에 있다가 33세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사도세자→은언군→전계대원군→철종으로 왕계가 이어졌다. 할아버지가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이인, 아버지는 전계대원군 이광이다.
대원군이라는 칭호는 철종처럼 예정되어 있지 않던 이가 임금으로 즉위했을 때 그 아버지에게 올린다. 그래서 고종의 아버지를 흥선대원군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대원군이 여럿 있었다.
1786년(정조 10), 은언군이 역모 사건에 엮여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당했다. 정조는 원하지 않았으나 신하들의 뜻을 꺾지 못했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강화 은언군 집안이 완전히 망가졌다. 1801년(순조 1) 신유년, 신유박해 때 은언군의 부인과 며느리가 죽임을 당했다.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였다. 두 달여 만에 은언군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은언군 아들 이광(철종의 아버지)은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이광,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절망의 세월이었다. 그래도 세월은 갔다. 1822년(순조 22) 드디어 유배가 풀렸다. 2살 때 부모 따라 강화도에 유배됐던 이광, 나이 마흔 다 돼서야 한양으로 돌아갔다. 남들보다 한참 늦은 나이에 결혼했고 아들 셋을 두었다. 막내가 원범이다. 이광은 1841년(헌종 7)에 사망했다.
1844년(헌종 10), 14살 원범이 강화로 유배 왔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서 삼대가 강화다. 왜, 또? 또 역모 사건에 엮였다. 반역을 꾀하다 적발된 이가 원범의 이복형 이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생뚱맞은 사건으로 이원경은 죽임을 당했고 원범과 가족들이 강화로 귀양 오게 된 것이다. 처음 유배지는 교동이었으나 며칠 만에 강화읍내로 옮겨졌다.
5년간 강화에서 귀양 살다가 19살에 왕이 되었다. 헌종이 아들 없이 죽어 원범이 즉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원범에게 친형이 있었고 사촌 형도 있었다. 조정 실권자 순원왕후(순조의 비, 안동김씨)가 원범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수렴청정하려고 그랬던 것 같다.
수렴청정이란 왕의 나이가 어릴 때 어머니나 할머니 등 궁궐 어른이 통치를 대신 하는 행위이다. 늦어도 왕의 나이 스물이 되면 수렴청정을 끝낸다. 원범의 형들은 나이 스물이 훨씬 넘었다. 원범만 19살이었다. 19살이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준비되지 않은 왕이었으니 수렴청정의 명분이 섰다.
철종은 통치를 잘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뜻을 펼칠 환경이 전혀 되지 않았다. 안동김씨 등 특정 가문이 정권을 오로지 하던 시절, 부패가 만연했던 조정을 바로잡지 못했다. 귀양살이를 통해 백성의 삶과 현실을 잘 알고 있는 철종이다. 궁에서 태어나 자란 여느 왕들과는 달랐다.
백성 살리는 정치를 해보려고 노력도 꽤 했다. 그러나 벽을 부수지 못하고 끝내 주저앉고 만다. 때로 권모술수도 필요한 군주라는 자리가 맑고 여린 원범에게는 잘 맞지 않는 옷과 같았다. 무기력, 분노, 좌절. 술과 여인은 도피처였을 것이다. 그렇게 14년, 나이 서른셋에 사망했다. 자식을 낳지 못했다고 말해지지만, 아니다. 여럿 낳았다. 그마저 불행했다.
철종은 아들 다섯, 딸 여섯 모두 11명 자식을 두었다. 어인 일인가, 아들 다섯이 모두 어려서 죽고 말았다. 딸 여섯 가운데 다섯도 너무 일찍 죽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하나 영혜옹주. 15살에 박영효와 결혼했으나 결혼하고 3개월이 안 돼서 사망했다.
참 지독한 불행이다. 자식 하나하나 죽어 나갈 때마다 아비의 가슴은 얼마나 찢어졌을까. 철종이 세상을 떴을 때, 그때 뒤를 이어야 할 아들은 모두 하늘에 있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의 아들 고종이 즉위하게 된다.
“철종의 휘는 변(昪)이다.” 실록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휘(諱)는 ‘꺼리다’라는 뜻을 가진 한자로 보통 임금 이름을 뜻한다. 이름이 이변이라고? 그러하다. 본명이 이원범이었는데 즉위하고 이변으로 개명한 것이다. 그래야 했다. 임금 이름은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쓰지 못하는 게 원칙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임금 이름을 외자로 짓는다. 그것도 일상에서 거의 쓰지 않는 낯선 글자로.
용흥궁 뒷문으로 나가면 바로 성공회 성당이다. 뒷문으로 향하는 높은 계단 오르다 잠시 걸터앉았다. 산속도 아닌데 새가 운다. 구슬프게 들린다. 철종, 이원범, 33년 생애. 행복한 적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언제였을까. 5년간 강화 유배 시절이 그나마 행복하지 않았을까. 차라리 양순이와 여기서 사랑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정말 두 마리 사슴처럼 뛰고 안고 놀았다면 좋았겠다.
강화문화원, 《江華文化》 제15호,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