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지."
하늘을 향해 아버지를 불러본다.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간다. 산수유 먼저 노란 봄을 알리더니 질세라 붉은 진달래꽃 대궐을 이뤘다. "너희 덕분에 울 아버지 외롭지 않으리. 너희가 나보다 낫다." 나이 오십 되고 보니 눈시울이 젖을 때가 잦다.
아버지는 강화에서 오래도록 관광회사에 다니셨다. 국내외 관광 안내를 나가시다가 나중에는 배차 업무를 주로 하셨다. 지리부도보다 더 정확하게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꿰뚫고 계셨다. 그 관광회사 기사님들은 관광객 모시고 멀리 나섰다가 길을 잃으면 무조건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금방 어디 어디로 가라고 알려주시곤 했다.
아버지가 잠드신 충렬사 뒷산은 이제 여린 초록이다. 새순 올라온 잔디가 대견하다. 일흔 겨우 넘기시고 하늘로 가신 지 1년여. 그래도 가끔 아버지를 떠올리며 먹먹해한다. 도무지 사양이라는 걸 몰랐던 분. 그저 베풀기만 즐기셨던 분. 그래서 밖에서는 좋은 소리 많이 들었지만, 집안은 궁색을 면하기 어렵게 했던 분이 내 아버지였다.
내 어린 시절은 하루 세끼를 모두 수제비로 때워야 할 정도였다. 가난은 사람을 빨리 철들게 하는 법이다. 세발자전거가 밤마다 꿈에 보일 만큼 갖고 싶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날도 문구점 앞에 서서 자전거를 보며 침만 삼키고 있었다. 우연히 지나가던 아버지를 만난 순간 나의 인내는 끝나고 말았다. 조르고 또 졸랐다. 나는 철없는 '국민학교' 1학년생이었다. 한 손에 풍선껌을 두 개 들고 한 손은 아버지 손에 매달려 질질 끌려갔다. 울면서 집으로 갔다. 아팠다. 풍선껌으로 달래던 아버지는 몇 곱절 더 아팠을 것을 그때는 당연히 몰랐다. 그저 야속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관절염, 고혈압, 당뇨 등 찾아오는 병마다 사양하지 못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받아들여 10여 년을 앓으셨다. 그랬던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찾아온 병이 치매였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처음부터 효자와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는 눈동자 가득 간절함을 담아 나를 보곤 하셨지만, 난 못 본 척 외면하기 일쑤였다. 어쩌다 입을 열면 투덜거림이었고, 빽빽 소리지르기 일쑤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또 그러고 또 그랬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여러 해 대문 밖 거동도 못하던 아버지가 다시 병원에 입원하셨다. 몇 개월을 병실에서 힘들어하시는 얼굴을 보며 '차라리 돌아가시는 게 좋겠다'는 몹쓸 생각도 많이 했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는 핑계를 달고 입원실에서 요양병동으로 옮겨 드렸다. 요양병동에는 간병인이 있어 가족은 일단 환자에게서 해방된다. 아버지가 드신 방 이름은 진달래 방이었다.
"아부지, 이 방 조용하고 좋지? 일찍 자요. 내일 다시 올게." 기분 좋은 사람처럼 웃으며 말했다. 병실문을 나서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하고 비상계단으로 뛰었다. 평생 자식에게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으셨던 분, 늘 따뜻하고 온화했던 아버지. 아픈 것이 죄가 아닌데 그런 아버지를 마치 죄인 다루듯 차갑기만 했던 아들….
은인(恩人), 정말 은인을 만났다. 간병인 아주머니는 지극한 정성으로 아버지를 돌봐주셨다. 아들은 몰랐던 욕창을 아주머니는 눈 밝게 알아보고 깨끗이 치료했다. 누워만 계셔야 하는 아버지 옆에서 말벗이 되어 주었다. 아이 달래 먹이듯 식사 수발도 허투루 하지 않으셨다. 밝고 편안해진 표정의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감사했다.
'아버지, 10년이든 20년이든 오래 살아요. 그깟 병원비 걱정하지 마시고.' 진심이었다. 집에 계실 때보다 건강한 얼굴로 웃는 아버지를 보면서 기도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작년 봄이 오기 전에 한순간 촛불처럼 그렇게 눈을 감으셨다.
돌아가시면 좋겠다는 나쁜 마음을 품고 있을 땐 별일 없었는데, 막상 오래도록 사시기를 빌었더니 100일을 넘기지 못하셨다. 생각해보니, 못난 자식 놈 마음 덜 불편하게 해주려는 배려 같았다. 돌아가시기를 바랐을 때 정말 가셨다면 나는 평생토록 더 큰 죄스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부지, 담배 참 맛나게 드셨네." 묘소에 놓아 드린 담배가 필터까지 탔다. 담뱃재가 그대로 길게 누웠다. 하루에 두세 갑 피우던 아버지에게 "담뱃값 대기도 힘들어!"라며 성깔 부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날 바라보던 아버지의 슬픈 얼굴도 떠오른다. 이 세상 계실 제 불효(不孝)했으니, 저 세상 계신 지금에라도 효도 흉내 내고 싶다. 산 내려오는 길 구석구석 진달래꽃이 숨어서 나를 본다. 손도 흔든다. 나도 서서 손을 흔든다. "얘들아 고맙다."
〈조선일보〉 2011.04.13.
《나는 오늘도 선생이다》(포이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