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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敎

고3 담임의 넋두리

퇴근길, 목욕탕에 들러 땀을 빼냈다. 때도 밀었다. 그래도 영 개운하지 않았다. 울적한 날이면 잠시 들렀다 가던 초지진에 내렸다. 벤치에 앉아 초지대교 야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찰랑대는 바닷물 소리가 이제는 춥다.

전쟁, 그래 전쟁이었다. 약 한 달간 계속된 4년제 대학 수시 1차 원수접수가 끝났다. 오늘 마지막 남은 한 아이의 자기소개서 입력을 도와주는 것으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 오래도록 해오던 일을 끝내고 나면 시원섭섭하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런데 나는 시원하지도 섭섭하지도 않다. 그냥 맥이 빠지고 허탈하다. 몇 아이나 건질 수 있을까? 대한민국 고3 담임들의 공통된 심사가 아닐까 싶다.

우리 반 아이들 대부분이 적게는 한 대학, 많게는 여섯 개 대학에 원서를 썼다. 다해서 백 수십 통이다. 열흘여 동안 쓴 담임 추천서가 30통 정도이고, 아이들이 써온 자기소개서 교정 본 것은 그 이상이다. 그냥 맞춤법 수정해주는 정도로 끝내도 되는 자기소개서도 있었지만, 글을 통째로 들어내고 다시 쓰게 해야 했던 경우가 많았다. 만만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아이랑 붙어 앉아 컴퓨터 모니터 들여다보며 원서 접수를 했다. 웬만하면 집에서 해도 되련만, 우리 아이들은 모든 걸 학교에서 해결하려고 한다. 학교 주변에 변변한 학원조차 없는, 그래서 사교육이 힘을 쓸래야 쓸 수 없는 환경이기에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낮에는 교사 역, 밤에는 학원이나 과외 선생님 역을 하며 아이들을 돌본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원서 쓰는 것도 학교에서 해야 안심을 한다.

밥 먹는 시간까지 줄여도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내 소속인 연구부의 부장은 내가 맡고 있던 행정업무를 슬그머니 가져갔고, 3학년 부장은 하나에서 열까지 챙기며 힘이 되어 주었다. 음으로 양으로 여러 동료의 배려와 지원을 받았기에 겨우겨우 오늘까지 올 수 있었다. 앞으로도 당분간 그래야 할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도 미안하다. 3 담임 직을 수행하기에는 내 체력도 머리도 함량 미달이었다. 많은 상처를 줬다. 지원 대학 선정 과정에서 적합한 곳을 제대로 정해주지 못했다. 농어촌 거주 기간이 3년밖에 안 되는 아이에게 36개월 조건의 대학을 추천하기도 했다. 교사 추천서를 제시간에 입력하지 못해 낭패를 안기기도 했다. 지나치게 눈높이가 높은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고 가슴에 못을 박았다.

접수 모두 끝내고 우리 반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원서 쓰면서, ! 최저 등급 채울 자신 있어? 힘들 것 같지 않아? 이렇게 너희들 무시하는 말 들은 친구들 많지? 자신감을 심어주기는커녕 안될 것처럼 말하는 선생님이 미웠지? 이해하라는 말 하지 않겠다. 계속 미워해라. 더 많이 미워해라. 그리고 두고 봐라, 꼭 수능 잘 봐서 최저등급 넘어서 나를 무시했던 당신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겠다.’ 이런 각오와 독기를 품어라.”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 우리 아이들이 독기를 품고 지난봄 3, 4월의 눈빛으로 돌아가 마지막 힘을 다해 공부했으면 좋겠다. 수시 기간 학습 분위기가 너무 흩어졌다. 수시보다 정시에 목표를 둔 아이들마저 흔들려 교실은 늘 어수선했다. 이제 담임도 아이들도 몸과 마음 추슬러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아이들 또 대학별 면접, 적성, 논술 시험을 보러 나서야 한다. 현 입시제도에서 3학년 2학기는 그냥 버려지는 시간이 되고 마는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문제점 없는 입시제도가 있을 수 있을까. 지금의 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3학년 담임이니 당연히 견뎌내야 할 일이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너무도 버겁다. 원서 쓰고 자개소개서 봐주고 밤 밝혀 추천서를 써대며,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입학사정관이 이 소개서를 이 추천서를 다 읽어주기는 할까. 읽어준다면 이 아이의 합격 여부에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결국, 내신 싸움 아닐까, 회의가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내가 지금 고3 담임이라 이런 말 하기 좀 뭣하지만, 전국의 모든 고3 담임선생님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속으로 멍들고 속으로 퍼석하게 말라버린 딱한 사람들. 그들의 외로운 어깨를 주물러주고 싶다. 지금 기막힌 뉴스가 들려온다. 일부 교사가 방학을 이용해 거짓 입원으로 보험금을 타내는 사기를 쳤다가 적발됐다고 한다. 김포에서 제주까지 그 많은 선생님이 방학도 잊은 채 좋은 교사의 길을 가려 땀 흘려왔는데, 저이들은 뭐란 말인가. 슬픈 일이다.

내일 할 일은 뭐지? 그래 오랜만에 고운 시 한 편 골라 인쇄해주자. 한 달에 한 번씩은 시 한 편이나마 읽혔는데 개학하곤 그마저 하지 못했다. 또 있다. 토요일에 면접시험 보러 가는 아이 준비시키고, 적성시험 가는 애들 수험표 출력해줘야겠구나. 부디 시험들 잘 보기를. “이 녀석들아 쫄지 마라. 잘 될 거다. 우리 반 급훈 잊지 않았지? 그래. ‘나는 꽃이다’.”

(2012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