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敎

그래 아들아 맘껏 울어라

 

오후 330. 전화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전화할 일이 없는데, 이상하다 여기며 네 전화를 받았지. “아빠!” 한 마디에 가득한 네 슬픔이 나에게 전해졌다. “아들, 왜 그래 시험 못 봤어?” 너는 대답 대신 울기 시작했다. 여태 그렇게 섧게 우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저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통곡소리는 아빠의 귀를 찌르고 가슴을 후비고 온몸을 아프게 했다. 나도 벽에 기대 그냥 울고 싶었다. 네 울음소리 잦아질 때까지 아빠는 그냥 그렇게 정물이 되어 서 있었다. 전화기를 귀에 댄 채.

네가 울었던 게 언제였더라. 초등학생 때까지는 우는 모습을 보았다. 중학생이 되고는 울지 않았지. 그런데 이제 아빠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고등학생이 되어 그것도 사내 녀석이 꺼이꺼이 우는구나. 그렇게 중간고사가 아팠구나. 첫날 첫 시험이 제일 못하는 과목 수학이었지. 너는 하루 세 시간 자며 여러 날 수학 공부를 했지만, 시험을 망쳤고 절망했고 뜨거운 눈물을 뿌렸다. 중학교 때는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 시험을 못 봐도 절망할 일이 없었을 테지만, 고등학교 입학하고 나름으로 열심히 공부한 결과가 엉망이 되고 보니 괴로울밖에.

이제, 아들아 조금 차분하게 생각해보렴. 너보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늦어도 중학교 때부터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왔단다. 너는 그동안 계획만 하고 입으로만 공부하고 그러다가 이제야 시작하는 거 아니니? 당연히 격차가 클 수밖에 없는 것이란다. 단박에 친구들을 따라잡겠다는 욕심일랑 부리지 말고 하루하루 조금씩 쌓아가겠다고 마음먹으렴.

어떤 이는 공부가 가장 쉬웠다고 말하지만, 그건 온갖 고단한 삶을 견뎌내고 성취를 이룬 후의 회고담일 뿐이란다. 지금 너희에게는 공부가 가장 어려운 것이지. 고등학교에서는 시험기간 며칠의 밤샘공부가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번에 너도 그걸 깨달았을 거야.

한두 달 공부해서 수학을 잘할 수 있으면, 세상에 수학 못하는 학생은 하나도 없을 거다. 그렇지?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자.

어떤 이는 경쟁 없는 학교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은 경쟁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단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야. 다만, 아빠가 원하는 것은 따뜻한 경쟁이란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이 아니라 너에게 도움을 줄 또 다른 선생님이고, 또 너를 분발하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지금 네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데는 아빠의 잘못도 크다. 네 공부를 돌봐줄 수 있었을 어릴 때 관심 갖고 챙겨주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 열심히 가르치려고 노력하면서 정작 내 자식 공부시키기에는 소홀했구나. 어쩌다 네가 뭘 물어봐도 피곤하다는 핑계로 대충 넘어가곤 했던 아빠다. 이제 네가 고등학생이 되고 집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으니 아빠가 뭘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미안하다.

언젠가 너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공부를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고 안 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고. 네가 공부를 하도 안 하기에 했던 말이야. 아들아, 혹시라도 아빠가 너를 부끄럽게 여긴다고 오해하지 마라. 성적 가지고 자식을 부끄럽게 여기는 부모가 어디 있겠니. 오히려 아빠는 네가 대견하다.

아빠가 이만큼 나이를 먹고 보니 세상이 조금 보이는 것 같다. 사회에서 결국 인정받는 사람은 학식을 갖춘 사람보다 인간미를 갖춘 사람이란다. 아빠는 네가 아직은 공부가 조금 부족해도, 인간미는 부족함이 없다고 믿는다. 따뜻한 심성과 염치 그리고 배려의 마음이 너의 가슴 속에서 자라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기쁘다. 아들아 주말에 집에 오면 우리 오랜만에 뜨거운 포옹 한번 해볼까?

한국교직원신문2012.06.11.

나는 오늘도 선생이다